- 억압의 시대, 한 존재의 각성과 희생
누룩 한 덩이가
뜨는 까닭을 알겠느냐
지 혼자 무력(無力)함에 부대끼고 부대끼다가
어디 한군데로 나자빠져 있다가
알맞은 바람 만나
살며시 더운 가슴
그 사랑을 알겠느냐
오가는 발길들 여기 멈추어
밤새도록 우는 울음을 들었느냐
지 혼자서 찾는 길이
여럿이서도 찾는 길임을
엄동설한 칼별은 알고 있나니
무르팍 으깨져도 꽃피는 가슴
그 가슴 울림 들었느냐
속 깊이 쌓이는 기다림
삭고 삭아 부서지는 일 보았느냐
지가 죽어 썩어 문드러져
우리 고향 좋은 물 만나면
덩달아서 함께 끓는 마음을 알겠느냐
춤도 되고 기쁨도 되고
해 솟는 얼굴도 되는 죽음을 알겠느냐
아 지금 감춰 둔 누룩 뜨나니
냄새 퍼지나니
* 누룩
누룩은 밀이나 쌀 등 곡물을 쪄서 만든 곡물 덩어리입니다. 누룩을 따뜻한 방에 두면 미생물이 활동을 시작하며 열이 나기 시작합니다. 이를 '누룩이 뜬다'고 표현합니다. 차가웠던 덩어리가 내부에서부터 뜨거워지며 코를 찌르는 강렬한 향기를 내뿜는 상태, 즉 죽어 있던 무생물이 살아 있는 생명체로 각성하는 최고조의 상태를 말합니다.
누룩 그 자체로는 술이 아닙니다. 하지만 누룩이 가루가 되어 '물', 쌀 등의 전분 속에 들어가 자신을 녹여내면, 비로소 전분이 술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누룩이 형체를 잃고 썩어 문드러질수록 술의 향기는 더욱 깊어집니다. 즉, 누룩은 자신을 소멸시켜 타자(물과 전분)를 술로 변화시키는 '희생적 촉매제'입니다.
같은 자리에서 누룩의 시간을 본 자의 목격담
여기서 누룩은 세상의 횡포에 무기력했던 어느 소시민의 상징입니다. 이 시의 화자는 누룩이 놓인 그 어둡고 눅눅한 방구석을 지켜 본 자입니다. 거창한 지식을 설파하는 인도자가 아니라, 무력하게 나자빠져 있던 누룩이 어떻게 스스로를 부수어 뜨거운 생명으로 변해가는지를 곁에서 가만히 지켜본 이입니다.
화자는 자신이 곁에서 보고 들으며 뒤늦게 깨달은 그 경이로운 변화를 세상에 질문의 형식으로 건넵니다. '내가 옆에서 지켜보니 이러하더라, 당신도 느껴지느냐'라고 나직하게 읊조리는 이 물음들은, 우리 또한 세상을 끓게 할 '누룩'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각성의 초대장입니다.
이 시를 이해하는 핵심은 '무력함이 어떻게 사랑이라는 동력을 얻어 공동체의 기쁨으로 바뀌어 가는가'를 포착하는 데 있습니다.
누룩 한 덩이가
뜨는 까닭을 알겠느냐
지 혼자 무력(無力)함에 부대끼고 부대끼다가
어디 한군데로 나자빠져 있다가
알맞은 바람 만나
살며시 더운 가슴
그 사랑을 알겠느냐
무력하게 쓰러져 있던 존재가 온기를 품기까지
화자의 관심은 처음부터 누룩이 뜨는 까닭에 있습니다. 희망을 선언하기 전에 희망이 왜 가능한지를 먼저 따지는 것입니다.
무력함을 아는 것과 무력함에 부대끼는 것은 다릅니다. 부대낀다는 것은 그것과 싸우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다가 누룩은 해결하지 못한 채로 부대낌이 소진되어 '나자빠져'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패배가 아니라 침잠일 것입니다. 바로 거기서 '알맞은 바람'을 만납니다.
바람은 밖에서 옵니다. 누룩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삶의 자리를 오가는 다른 존재들, 그들과의 공감과 연대가 나자빠진 자에게 닿는 것, 그것이 알맞은 바람일 것입니다. 사랑은 그렇게 접촉에 의해 살며시 가슴이 더워지면서 시작됩니다. '그 사랑을 알겠느냐'는 물음의 무게가 여기 있습니다.
오가는 발길들 여기 멈추어
밤새도록 우는 울음을 들었느냐
지 혼자서 찾는 길이
여럿이서도 찾는 길임을
엄동설한 칼별은 알고 있나니
무르팍 으깨져도 꽃피는 가슴
그 가슴 울림 들었느냐
고독한 울음이 연대의 다짐이 되는 순간
일단 앞부분에서 나타나는 ‘울음’은 누룩이 발효되며 내부에서 일으키는 변화의 소리일 것입니다. 화자는 이 소리를 각성한 자의 울음으로 표현합니다.
타인과의 접촉에서 의도하지 않게 찾아온 열기, 이렇게 각성한 자에게 이제 세상이 보입니다. 같은 자리에서 고통받는 존재들이 보입니다. 보이니까 세상과 부딪힙니다. 그 부딪힘의 소리가 밤새 우는 울음입니다. 각성의 기쁨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가 세상과 부딪히며 치르는 비용입니다. 화자는 세상에 대고 밤을 새우는 그 울음을 아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화자는 그 울음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성한 자가 홀로 삭아가며 찾는 길이 곧 공동체가 찾는 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엄동설한의 칼별을 증인으로 세웁니다. 칼별이 목격한 것은, 겨울을 나는 누룩의 표면이 칼바람에 갈라지고 으깨지는 모습입니다. 각성한 자는 가장 혹독한 조건 속에서 외부의 압력을 온몸으로 받습니다. 으깨지는 것은 파괴이지만 동시에 더 깊이 열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시련을 통과하면서 비로소 각오가 굳어집니다. 의도하지 않게 시작된 것이 시련 속에서 능동적인 다짐으로 깊어지는 순간입니다. 화자는 그 가슴 울림을 들었느냐고 다시 묻습니다.
속 깊이 쌓이는 기다림
삭고 삭아 부서지는 일 보았느냐
형체를 버리고 가루가 되는 숭고한 해체
봄이 오고 누룩이 바스라질 때, 화자는 그가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고요한 소멸을 지켜보며 '보았느냐'고 묻습니다. 각성한 자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내가 완전히 소멸해야 공동체가 살아난다는 것을.
그 앎이 고요한 기다림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것은 수동적 인내가 아닙니다. 나의 소멸을 통해 완성될 공동체의 부활을 향한 기다림입니다. 소멸 자체가 의미를 갖습니다. '삭고 삭아'는 한 번이 아닙니다. 거듭 삭아갑니다. 그런데 삭아 갈수록 속에 쌓이는 것은 더 깊어집니다. 밖으로는 소멸이고 안으로는 충만인 역설적 시간입니다.
이 연이 두 행으로 가장 짧은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형체가 사라지는 과정은 조용합니다. 울음도 다짐도 없습니다. 그저 삭아갑니다. '보았느냐'는 알겠느냐도 들었느냐도 아닙니다. 가장 직접적인 목격의 동사입니다. 이 역설은 설명으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눈으로 목격해야 합니다.
지가 죽어 썩어 문드러져
우리 고향 좋은 물 만나면
덩달아서 함께 끓는 마음을 알겠느냐
춤도 되고 기쁨도 되고
해 솟는 얼굴도 되는 죽음을 알겠느냐
죽음이 춤이 되는 까닭
누룩은 이제 이제 물을 만나 술로 완성됩니다. 죽고 썩고 문드러지면서 형체를 잃어야 비로소 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 물과 만나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고향 좋은 물'이어야 합니다. 고향은 같은 역사적 경험과 고통을 공유한 공동체입니다. 선구자의 희생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이 있는 곳, 그 본래적 자리입니다.
거기서 발효가 일어납니다. 발효는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분위기에 이끌려 번지는 열기입니다. 강요된 연대가 아니라 감염되는 연대, 선구자의 죽음이 공동체 안에서 끓어오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발효가 끝이 아닙니다. 술은 나눠져야 합니다. 춤, 기쁨, 해 솟는 얼굴은 술이 완성되어 사람들 손에 들려진 뒤의 풍경입니다. 몸이 춤추고, 가슴이 기쁘고, 얼굴에 해가 솟는 것. 선구자의 죽음이 공동체의 일상적 행복으로 완전히 전환된 모습입니다. 거대한 역사적 전환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얼굴입니다. 선구자가 죽어 이루려 한 것은 이념이 아니라 그 얼굴이었습니다.
화자는 두 번 묻습니다. 발효되는 순간을 아느냐, 그리고 나눠진 결실을 아느냐. 두 물음 모두 '죽음'에 걸려 있습니다. 끓는 것도 죽음이고, 춤추고 기뻐하는 것도 죽음입니다. 선구자의 희생이 과정과 결실 모두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그것을 아느냐고 화자는 거듭 묻습니다.
아 지금 감춰 둔 누룩 뜨나니
냄새 퍼지나니
지금, 뜨나니 퍼지나니
앞의 긴 물음들이 이 두 행으로 수렴됩니다. '감춰 둔'은, '무력했던, 잠재되어 있던, 인내하고 있던'의 의미일 것입니다. 권력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그것, 누룩들이 이제 각성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는 곁에 있었지만 무력했고 인내했던 자가, 지금 그것들이 뜨는 것을 목격하는 순간의 감탄입니다. 예측했지만 막상 눈앞에 펼쳐지니 벅찬 것입니다.
'뜨나니'와 '냄새 퍼지나니'는 각성과 행동을 향한 과정이 지금 여기서 시작되고 있다는 목격입니다. 냄새는 이미 퍼지고 있습니다. 문을 닫아도, 권력이 눌러도 막을 수 없습니다.
화자가 세상에 건네는 마지막 말은 이것입니다—지금 시작되고 있다, 당신도 이미 맡고 있다.
되어가는 자, 목격하는 자, 초대받는 자
이 작품은 타고난 영웅을 노래하지 않습니다. 선구자는 결심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무력함을 끝까지 통과하고 타인과의 접촉에서 각성되고 시련 속에서 각오가 굳어지고 마침내 소멸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진짜인 변화입니다.
그 과정은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닙니다. 바람은 밖에서 오고, 울음은 발길을 멈추게 하고, 죽음은 공동체를 끓게 합니다. 선구자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존재들과의 접촉 속에서 완성됩니다.
화자는 그 과정을 같은 자리에서 목격한 자입니다. 그는 독자에게 답을 주지 않습니다. 알겠느냐, 들었느냐, 보았느냐—감각의 언어로 물으면서 독자 스스로 그 겪음에 도달하도록 열어둡니다.
이 시가 선동도 교훈도 아닌 것은 그 때문입니다. 단지 증언이고 초대입니다.
[비평 노트]
1. 선구자의 기원
선구자를 타고난 의지나 영웅성에서 찾는 기존 해설과 달리, 무력함의 밑바닥에서 부대끼던 존재가 타자의 부름에 의해 비의도적으로 각성하며 성숙해가는 '낮은 곳에서의 서사'를 구축했습니다.
2. 연대의 매개체로서의 '바람'
'바람'을 추상적인 시대적 흐름이나 거대 담론으로 보지 않고, 고립되어 나자빠진 존재에게 닿는 '타자와의 구체적인 접촉'이자 공감의 시작점으로 해석하여 사랑의 실천적 계기를 복원했습니다.
3. 고통에 대한 능동적 해석
시련과 울음을 단순한 인고의 과정으로 치부하지 않고, 각성한 존재가 세상과 부딪히며 기꺼이 치르는 '실존적 비용'이자, 외부의 압력을 통해 각오를 단련하는 능동적인 다짐의 시간으로 정의했습니다.
4.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는 공동체
'좋은 물'을 막연한 민중이 아니라, 선구자가 겪은 것과 같은 역사적 고통과 경험을 공유하며 그의 희생을 기꺼이 자기 것으로 수용할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의 실체적 토양으로 구체화했습니다.
5. 변화의 궁극적 지향점
선구자의 희생을 통해 도달하려는 결승선을 거창한 이념적 승리에 두지 않고, 술을 나누어 마시는 사람들의 '해 솟는 얼굴'이라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실존적인 행복으로 귀결시켰습니다.
지난 작품 해설들을 다시 보고 싶은 분들, 검색을 통해 들어왔지만 다른 글들도 보고자 하는 브런치스토리 비회원분들을 위해 네이버블로그에 다 모아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