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존 없는 존재의 지속, 그 참혹
포스터 속에 들어앉아
비둘기는 자꾸만 곁눈질을 하고 있다.
포스터 속에 오래 들어앉아 있으면
비둘기의 습성도 웬만치는 변한다.
비둘기가 노니던 한때의 지붕마루를
나는 알고 있는데
정말이지 알고 있는데
지금은 비어 버린 집 통만
비 바람에 털럭이며 삭고 있을 뿐이다.
포스터 속에는
비둘기가 날아볼 하늘이 없다.
마셔볼 공기가 없다.
답답하면 주리도 틀어보지만
그저 열없는 일.
그의 몸을 짓구겨
누가 찢어보아도
피 한방울 나지 않는다.
불 속에 던져 살라 보아도
잿가루 하나 남지 않는다.
그는 찍어낸 포스터
수많은 복사 속에
다친 데 하나 없이 들어앉아 있으니
차라리 죽지 못해 그는 탈이다.
이미지 속에 갇힌 존재, 그 박탈의 깊이
이 작품은 제목부터 하나의 역설을 품고 있습니다. 비둘기는 날개를 가진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비둘기가 포스터 속에 앉아 있습니다. 날기 위해 태어난 것이 날 수 없는 공간에 갇혀 있다는 이 기본 설정이 시 전체를 관통하는 긴장의 원천입니다.
시를 이해하는 실마리는 포스터라는 매체의 속성입니다. 포스터는 살아 있는 장면을 특정 순간에 포착하여 평면으로 인쇄하고 대량으로 복제한 것입니다. 그 안의 존재는 살아 있는 개체가 아니라 이미지입니다. 이미지는 하늘도 공기도 필요 없고, 찢겨도 피가 나지 않으며, 태워도 재가 남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실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 시에서 이 이미지의 조건을 인간에게 적용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탐구합니다. 이념의 얼굴로, 역할의 표정으로 복제되고 소비되면서 실존을 잃어버린 인간, 그 존재의 조건과 그 박탈의 깊이가 이 시의 진짜 주제입니다.
포스터 속에 들어앉아
비둘기는 자꾸만 곁눈질을 하고 있다.
포스터 속에 오래 들어앉아 있으면
비둘기의 습성도 웬만치는 변한다.
곁눈질과 '웬만치는' - 실존의 잔여가 만드는 고통
시의 첫 두 행에 이미 불온한 씨앗이 심겨 있습니다. 비둘기는 포스터 속에서 자꾸만 곁눈질을 합니다. '자꾸만'이라는 부사가 결정적입니다. 정지된 이미지라면 곁눈질을 할 수 없습니다. 비둘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정면이 아니라 곁눈질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알면서도 차마 직시하지 못하는 자의 몸짓입니다. 이미지 속에 갇혀 있으면서도 아직 무언가를 의식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 의식의 정체가 다음 행에서 드러납니다. 화자는 포스터 속에서는 습성도 변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웬만치는'입니다. '웬만치는'에 이 시 전체의 비극적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완전히 변하지는 않습니다. 잔여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잔여가 있기에 고통이 존재합니다. 만약 비둘기가 자신의 과거를 완전히 망각하고 이미지로 완전히 동화되었다면, 오히려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실존했던 기억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에, 지금 실존이 없다는 것이 박탈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치면, 이것은 어떤 이념이나 제도나 역할 안에 오래 놓인 사람의 서사입니다. 그 공간의 논리에 맞게 조금씩 변해가지만, 완전히 변하지는 못한 사람. 자신이 한때 달랐다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비둘기가 노니던 한때의 지붕마루를
나는 알고 있는데
정말이지 알고 있는데
지금은 비어 버린 집 통만
비 바람에 털럭이며 삭고 있을 뿐이다.
화자의 증언 - 실존을 기억하는 목소리
이제 화자가 개입합니다. 비둘기는 이 시에서 한 번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지가 된 존재에게는 목소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가 그 자리를 채우는 것입니다. 비둘기가 한때 지붕마루에서 놀았다는 것, 그 귀소의 공간이 지금은 삭아가고 있다는 것, 화자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비둘기가 실존했었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알고 있는데'라는 반복이 이 증언의 성격을 드러냅니다. 잘 들어 준다는 확신이 있다면 두 번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반복 속에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말을 그래도 계속하는 자의 절박함이 있는 것입니다. 화자는 비둘기를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둘기에 대해 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고독한 발화가 이 시에서 가장 인간적인 순간입니다.
포스터 속에는
비둘기가 날아볼 하늘이 없다.
마셔볼 공기가 없다.
답답하면 주리도 틀어보지만
그저 열없는 일.
하늘도 공기도 없는 공간 - 실존이 없는 포스터
화자가 다시 포스터 안으로 돌아갑니다. 하늘과 공기, 이것은 자연 환경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를 살아 있게 하는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이미지 속에는 그것이 없습니다. 날 수 없는 곳에서 날개를 가졌다는 것은 잉여이고, 숨 쉴 공기가 없는 곳에서 폐를 가졌다는 것은 모욕입니다.
억눌린 것들을 한 번씩 폭발시켜 보려고 몸을 뒤트는 듯하지만(주리를 틀다) 소용없습니다. 이미지 속에서의 저항은 처음부터 보람 없는 짓입니다. 이념과 역할의 틀 속에 배치된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틀 바깥의 공기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저항해봤자 열없는 일입니다. '열없는'이라는 말이 담담하게 표현하는 체념의 깊이가, 이 시의 정서적 온도를 결정합니다.
그의 몸을 짓구겨
누가 찢어보아도
피 한방울 나지 않는다.
불 속에 던져 살라 보아도
잿가루 하나 남지 않는다.
그는 찍어낸 포스터
수많은 복사 속에
다친 데 하나 없이 들어앉아 있으니
차라리 죽지 못해 그는 탈이다.
피도 재도 없다 - 실존의 부재
시의 절정은 후반부의 세 가지 실험으로 이루어집니다. 짓구기고, 찢고, 불 속에 던집니다. 그러데 피가 나지 않고 재도 남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것은 찢기면 피가 납니다. 타면 재가 남습니다. 피가 나지 않고 재가 남지 않는 것, 이것은 파괴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살아 있지 않았고, 처음부터 실재하지 않았다는 확인입니다. 소멸이 아니라 실존 자체의 부재인 것입니다.
이미지는 살아 있지 않기 때문에 상처받지 않습니다.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복제된 이미지는 어떤 파괴 앞에서도 다른 복사본으로 남아 있습니다. 실존이 사라진 자리를 이미지가 대신 차지한 채, 그 상태가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실존은 변합니다. 죽습니다. 그것이 살아 있고 존재한다는 증표입니다. 이미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실존이 없으니 죽음도 없습니다. 고정된 이념의 얼굴로, 역할의 표정으로 복제된 그 이미지는, 어떤 파괴 앞에서도 다친 데 없이 다른 복사본으로 남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가 그리는 가장 근본적인 박탈입니다. 살아 있지 않은 상태로 끝없이 소비된다는 것, 그 상태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실존 없는 불멸, 그 잔혹
이 작품은 실존을 잃고 이미지로만 소비되는 인간의 조건을 날카롭게 포착한 시입니다. 이 시의 비둘기는 살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지로서, 복제본으로서, 이념의 표정으로서 존재합니다. 그 존재가 끝나지 않는다는 것, 실존 없는 불멸, 이것이 이 시가 '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 박탈의 구조를 추상적으로 논하지 않습니다. 곁눈질하는 몸짓, 주리를 트는 몸짓, 찢겨도 피 흘리지 않는 몸, 이 감각적 이미지들이 실존 없이 존재한다는 것의 공포를 육체적 감각으로 전달합니다. 이 시의 공포는 이미지가 남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실존이 사라진 자리를 이미지가 대신하고, 그 상태가 끝나지 않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웬만치는'이라는 단 하나의 부사가 이 공포의 깊이를 결정합니다. 완전히는 이미지가 되지 못한 잔여, 그 잔여가 남아 있는 한 실존을 박탈당한 고통은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이 시가 쓰인 시대는 이념과 선전의 포스터가 도처에 붙어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이 포착은 특정 시대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이미지로 소비되고 역할로 환원되는 인간의 조건, 지금 그것은 포스터의 시대보다 훨씬 더 길게 그리고 훨씬 더 넓게 퍼져 있습니다. 이 시가 오히려 요즘 시대에 더 낯설지 않은 이유입니다.
[비평 노트]
1. 기존 해설들은 피가 나지 않고 재가 남지 않는다는 구절을 이미지의 불멸, 즉 파괴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습니다. 나는 그것을 실존 자체의 부재로 읽었습니다. 피와 재는 살아 있음과 실재함의 증거입니다. 그것이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실존이 없었다는 확인입니다. 이 전환이 이 시의 중심 주제를 '불멸의 공포'에서 '실존 부재의 공포'로 바꾸게 됩니다.
2. '웬만치는'을 이 시의 비극적 핵심으로 읽었습니다. 기존 해설들은 이 시어를 적응의 서술로 처리하는 데 그칩니다. 나는 완전히 동화되지 못한 잔여—실존의 기억—가 있기 때문에 박탈이 고통이 된다는 역설을 내세웠습니다. 완전한 동화는 오히려 고통을 없앨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죽지 못해 탈'을 실존 없는 지속으로 읽었습니다. 실존이 없으니 죽음도 없고, 이미지로서의 순환만 계속되는 것입니다. 죽지 못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이미지라는 해석이 이 구절의 의미를 새롭게 해 줍니다.
4. 이 시를 특정 시대의 저항시로서뿐만 아니라 이미지로 소비되고 역할로 환원되는 인간의 보편적 조건을 다룬 시로 읽었습니다. 포스터라는 매체의 시대적 맥락을 인정하지만, 이 시가 오히려 현재에도 더 심화되어야 할 인간 조건의 탐구임을 말했습니다.
지난 작품 해설들을 다시 보고 싶은 분들, 검색을 통해 들어왔지만 다른 글들도 보고자 하는 브런치스토리 비회원분들을 위해 네이버블로그에 다 모아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