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낮은 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재미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어떤 산은 크고 높은 산 아래
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지막히 엎드려 있고
또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그리고는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순하디순한 길이 되어주기도 하고
남의 눈을 꺼리는 젊은 쌍에게 짐즛
따뜻한 사랑의 숨을 자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낮은 산은 내 이웃이던
간난이네 안방 왕골자리처럼 때에 절고
그 누더기 이불처럼 지린내가 배지만
눈개비나무 찰피나무며 모싯대 개쑥에 덮여
곤줄박이 개개비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듣는 기쁨은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서 잡아죽일 듯
이빨을 갈고 손톱을 세우다가도
칡넝쿨처럼 머루넝쿨처럼 감기고 어우러지는
사람 사는 재미는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이 다 크고 잘난 것만이 아니듯
다 외치며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니듯
산이라 해서 모두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모두 흰 구름을 겨드랑이에 끼고
어깨로 바람 맞받아치며 사는 것은 아니다
높은 산의 위세보다 낮은 산의 온기를 그리워하며
집안 좋고, 물려받은 것 많고, 돈도 잘 벌고, 학벌까지 좋아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게다가 인물도 좋고 인품까지 훌륭합니다. 분명 존경스럽지만, 막상 그 앞에 서면 괜히 주눅이 들고 말이 조심스러워집니다. 같은 세상에 사는 사람이 맞나 싶은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에 비해 평범한 사람들을 만날 때는 다릅니다. 특별히 내세울 것은 없어도, 마주 앉으면 마음이 놓이고 말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서로의 사정을 조금씩 나누다 보면, 어느새 웃음이 생기고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편안함이 되는 순간입니다.
이 작품은 바로 이러한 차이를 ‘높은 산’과 ‘낮은 산’의 모습으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화자는 높고 웅장한 산에서 시선을 거두어, 사람 곁으로 내려온 낮은 산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낮은 자리에서 비로소 사람 사는 삶의 온기와 어울림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어떤 산은 크고 높은 산 아래
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지막히 엎드려 있고
또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존재의 차이를 긍정하는 나지막한 시선
화자는 모든 산이 반드시 높고 험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단언합니다. 이는 단순히 자연에 대한 말이 아닙니다. '성공'이나 '명예'와 같은 권위의 잣대로만 사람을 평가하는 것에 대한 비판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어떤 산은 큰 산 아래에서 천진하게 웃으며 엎드려 있고, 또 어떤 산은 사람 사는 꼴이 궁금해 마을 어귀까지 내려와 우리를 구경합니다. 여기서 낮은 산은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부러워하고 함께 부대끼고 싶어 하는 정겨운 이웃으로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순하디순한 길이 되어주기도 하고
남의 눈을 꺼리는 젊은 쌍에게 짐즛
따뜻한 사랑의 숨을 자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자신을 낮추어 남의 삶을 완성해 주는 조력자
낮은 산은 자신을 과시하지 않고 남의 필요에 기꺼이 응답합니다. 정상을 향해 바삐 걷는 이들에게는 순하디순한 길이 되어주고, 세상의 눈을 피해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에게는 짐짓 따뜻하고 안전한 안식처가 되어 줍니다.
높은 산이 그 장엄함으로 인간을 압도한다면, 낮은 산은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사람들의 삶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줍니다. 화자는 여기서 존재의 가치가 '높이'가 아닌 '헌신과 정다움'에도 있음을 보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의 삶을 받쳐주는 평범한 이들의 소중함을 환기합니다.
그래서 낮은 산은 내 이웃이던
간난이네 안방 왕골자리처럼 때에 절고
그 누더기 이불처럼 지린내가 배지만
지린내 나는 일상 속에 깃든 진실한 향취
화자는 낮은 산을 이웃집 안방의 낡은 돗자리나 지린내가 배어 있는 누더기 이불에 비유합니다.
화려하고 깨끗한 것과는 거리가 먼, 세월의 때가 묻고 삶의 냄새가 밴 이 비유들은, 낮은 산이 민초들의 고통과 애환을 고스란히 체득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낮은 산은 관념 속에 존재하는 깨끗하고 고고한 공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땀과 눈물, 삶의 비루함까지도 온몸으로 받아내는 가장 정직하고 소박한 생명의 현장입니다.
눈개비나무 찰피나무며 모싯대 개쑥에 덮여
곤줄박이 개개비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듣는 기쁨은 낮은 산만이 안다
낮게 머물러야 비로소 들리는 노랫소리
낮은 산만이 아는 고유한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 풀과 나무에 덮여 새들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즐거움은 정상을 향해 치닫는 이들은 결코 포착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이는 더 높이 올라가야만 더 많이 본다는 통념을 깨뜨립니다. 오히려 낮은 자리에 멈춰 서고 머무를 때, 우리는 비로소 소외되었던 작은 존재들의 온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모여 어울리며 노래하고 춤추는 행복은 낮은 산의 자리에서만 가능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서 잡아죽일 듯
이빨을 갈고 손톱을 세우다가도
칡넝쿨처럼 머루넝쿨처럼 감기고 어우러지는
사람 사는 재미는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이 다 크고 잘난 것만이 아니듯
다 외치며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니듯
칡넝쿨처럼 얽히며 완성되는 공동체의 재미
화자는 인간관계의 본질을 '넝쿨'의 이미지로 풀어냅니다.사람들은 때로 서로 증오하고 날을 세우며 다투기도 하지만, 결국은 칡넝쿨과 머루넝쿨처럼 서로 엉키고 기대며 살아갑니다.
낮은 산은 이러한 갈등과 화해의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며 그 속에서 피어나는 '사람 사는 재미'를 아는 존재입니다. 홀로 우뚝 솟은 성공도 있지만, 서로 부딪치고 화해하며 얽혀 살아가는 연대와 공동체가 훨씬 생동감 넘치는 가치일 수도 있임을 화자는 강조합니다.
산이라 해서 모두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모두 흰 구름을 겨드랑이에 끼고
어깨로 바람 맞받아치며 사는 것은 아니다
삶의 기준을 넓히다
마지막은 처음의 구절을 변주하며 시상을 마무리합니다. 사람도 산도 모두 우뚝 서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고, 모든 산이 구름과 바람을 거느리고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화자는 이 반복을 통해 우리가 가치 있다고 믿어온 세속적 기준을 상대화합니다. 우리가 우러러보는 장엄한 이미지들이 실제 삶의 모든 모습들은 아니고, 오히려 낮고 가까운 곳에서 더 온기를 느끼며 살아가는 삶들도 있다는 말입니다.
낮은 곳에서도 피어나는 삶의 품격과 재미
이 시는 산이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 삶의 무게중심을 다시 잡게 해 주는 작품입니다. 압도적인 조건과 완벽한 인품을 갖춘 이들 앞에서 느끼는 위축감은 어쩌면 우리가 여전히 '높은 산'의 기준에 갇혀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인은 말합니다. 지린내가 배고 때가 절어도, 서로 넝쿨처럼 얽혀 정을 나누는 낮은 산의 품에서도 삶은 품격과 재미를 가진다고 말입니다.
이 시는 자본과 경쟁의 논리가 팽배한 현실 속에서, 소박하고 낮은 삶의 가치를 다시 일깨워 줍니다. 결국 낮은 산은 우리 곁의 많은 이웃이자 우리 자신의 모습이며, 그 낮은 곳에서 타인과 어깨를 맞대는 것이야말로 세상 그 어떤 높은 자리보다 더 고귀한 품격일 수 있음을 이 작품은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작품 해설들을 다시 보고 싶은 분들, 검색을 통해 들어왔지만 다른 글들도 보고자 하는 브런치스토리 비회원분들을 위해 네이버블로그에 다 모아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