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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꽃' 해설과 감상

- 도대체 이 시인에게 5·18 영령들은 무슨 꽃이었일까

by 한현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꽃은 꽃이라고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꽃이 된다고 한다. 즉, 꽃은 인간의 명명 행위 이전에는 단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인데, 여기서 유추되는 것은 사물과 언어의 관계이다. 1연은 명명 이전의 단계, 2연은 명명과 동시에 ‘꽃’이 존재한다는 사실, 3연은 ‘꽃’에 비유되는 ‘나’의 존재, 4연은 우리들의 존재를 말하고 있다. 결국 이 시는 모든 사물들이 언어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인식론적 세계를 노래하며, 이런 점에 이 시의 시사적 중요성이 있다.

- 권영민 '한국현대문학대사전'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에 '그'가 있고 여기에 '내'가 있으면서 서로 알지 못하는 상태라면(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사물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시력에 문제가 없다면, '안경'이 거기에 있다한들 그것은 그저 하나의 사물일 뿐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러나 어떤 일을 계기로 내가 '그'를 알게 되어 관계를 맺게 되는 순간(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의 동료 또는 친구로서 내게 의미 있는 존재로 바뀌게 됩니다.(꽃이 되었다)

안경도 그렇습니다. 내 시력이 약해져 안경을 필요로 하게 되었을 때는(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저 하나의 사물(몸짓)이었던 안경은, 이제 내게 필수불가결의 반려가 되어 버립니다.(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사람이건 사물이건 간에 모든 존재는 자신만의 자질과 특성, 쓸모(빛깔과 향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살아간다는 것은, 고유의 본성과 쓸모(빛깔과 향기)를 가지고 있는 각각의 다른 존재들을 이해하고 관계를 맺어 가면서(이름을 불러준 것), 그들을 자신의 삶속으로 끌어들이는 과정(꽃이 되고)인지도 모릅니다.

이를 바꿔 표현하면, 내가 나의 본성과 쓸모(빛깔과 향기)로서 다른 사람의 삶속(그에게로 가서)에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가고자(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노력하는(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그렇게 세상은 너와 나를 비롯한 모든 존재들(우리들은 모두)이 관계를 통해 서로에게(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의미(무엇, 잊혀지지 않는 눈짓)를 부여해 가는 곳입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하나같이 그 과정의 일부일 수밖에 없습니다.


* 이 시에서 '이름을 불러주는 일'을 글자 그대로 명명(命名), 작명(作名) 또는 호명(呼名)으로 좁게 해석하고, 주제를 '모든 사물은 언어를 통해서만 그 존재 가치를 드러낸다.'라고 어렵게 표현하는 글들이 꽤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는, 대상의 본성과 가치를 인식하고 그 대상과 관계를 형성해 가는 일로 폭 넓게 생각해도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많은 독자들이 이 작품을 '의미 있는 관계 형성의 소망'을 표현한 작품으로 이해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연애시로 해석하는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아는 것이 병입니다.



**** 지금은 '2008년 한국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조선일보)'을 해설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작품 해설들, 기존에 내가 고른 작품 해설들을 다시 보고 싶은 분들, 검색을 통해 들어 왔지만 다른 글들도 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네이버블로그를 만들어 다 모아 놓았습니다.

네이버블로그 현대시 전문 해설과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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