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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현수 Jan 21. 2024

그 책을 읽기가 두려운 까닭

오바마쪽 엘리트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엄청난 노력으로 무시무시한 경쟁 가운데 일류대학, 일류대학원에서 훈련을 받아, 지금 로펌, 금융, 첨단 기술 분야를 책임질 수 있는 거야. 혼자 아이디어를 내고 기획하고 설계하고 실행해야 하는 일들이니,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는 것은 보통이고, 푹 쉬어 본 날이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 그렇게 엄청난 성과를 내서, 수십 억, 수백 억을 벌어 들이는 것이니 너무 당연한 거 아냐? 우리도 너무 힘들고 스트레스가 쌓여서 마치 내 생명을 깎아 먹고 사는 것 같아. 그런데 너희들 살기 어려운 걸 왜 우리한테 화풀이 하는 거야. 다 너희가 무능하고 게으르기 때문인데. 

 트럼프의 무너진 중산층 추종자들은 말합니다.

예전의 귀족들이나 자본가들은 돈만 대고, 일은 우리한테 맡겼어. 우리가 기획, 설계, 생산을 다 했으니, 받는 보수도 상당했지. 지금은 중요한 일은 너희가 다 하면서 우리에게는 단순 노동이나 시키고 보수도 형편 없으니, 우리가 무너진 것은 다 너희들 때문이야. 또 너희들은 돈도 교육 경험도 풍부하니 자식들을 너희처럼 그렇게 훈련시켜서 너희처럼 만들 거잖아. 이게 말이 돼? 능력 없는 사람들 기도 살려 주고 미국인이면 무조건 편들어 주는 트럼프야말로 우리 구세주야.


내가 번안 각색해 본 ‘엘리트 세습’의 내용입니다.

필자는 능력주의가 사회를 극단적으로 양극화시키고 대립을 격화시킬 뿐 아니라, 양 쪽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능력주의의 속임수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고된 노력과 기량에 대한 합당한 보상이 이상적이고, 그 이상이 지금 정당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엘리트 세습’보다 ‘능력주의의 덫’이라는 원제가 내용을 좀더 잘 함축하고 있는 듯싶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 나가는 내 마음의 상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전환시대의 논리’나 ‘페다고지’를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그 새로운 시야와 통찰에 대한 충격은 비슷했지만, 받아들이는 마음의 상태는 그때처럼 흔쾌하지가 않습니다. 아니, 흔쾌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꽤 당혹스럽고 거부감조차 느껴집니다. 중간에 책을 덮고, 내 혼란스러운 마음의 실체를 생각해 봅니다.


비록 월급쟁이지만 조그만 기관의 장으로 일을 마칠 때까지, 능력이 부족하고 게으르다는 이유로, 내가 비난한 사람들의 수는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면서 내 위치는 내 능력과 노력에 대한 합당한 댓가라고 아무 거리낌없이 생각해 왔습니다. 이른바 성공한 엘리트들의 삶을 보면서는, 나도 그 길을 갔더라면 내 능력과 성실성으로 충분히 오를 수 있었지만, 지금 하는 일의 보람을 선택한 것이라고 자위해 왔습니다. 그러나 돈과 지위에 대한 필요와 욕구가 강했을 때는, 몰래 그들이 부럽고 내가 부끄럽기까지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애초부터 성공할 가능성이 없었던, 성공하지 못한 능력주의자였습니다. 


 나 정도 되는, 또는 나보다 아래일 수 있는 대다수의 성공할 수 없는 사람들과 성공한 아주 적은 사람들로 양분되는 지금의 능력주의 사회는 결코 합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이 책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내가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다는 것과, 비록 트럼프를 지지하지는 않지만 나를 트럼프의 ‘무능력한’ 추종자들 부류에 놓을 수 없다는 자존심으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전환시대의 논리’는 먹고사는 문제와는 거리가 있었던 기껏해야(?) 이념의 문제였고, ‘페다고지’는 나보다 한참 못살아서 비교조차 할 수 없었던 브라질 빈민의 삶을 베이스로 했던 책이었습니다. 직접적인 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고개를 끄떡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아직도 3분의 2가 남은 이 책을 다시 펼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도 성공할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 중 하나임을 기꺼이 인정하고, 그런 사회를 만든 능력주의의 불합리성을 당당히 받아들여서 내면화시킬 수 있을 때라야 다시 펼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 더 솔직하고 열린 자세를 기다려야만 할 듯합니다.


사회 구조의 커다란 불합리에 대한 문제라도, 이게 ‘나’의 못난 자존심과 관련될 때,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는, 그렇게 멀어지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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