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종 '어떤 적막' 해설과 감상

- 적막으로 이룬 내면의 연대

by 한현수

좀 쓸쓸한 시간을 견디느라고
들꽃을 따서 너는
팔찌를 만들었다.
말없이 만든 시간은 가이없고
둥근 안팎은 적막했다.


손목에 차기도 하고
탁자 위에 놓아두기도 하였는데
네가 없는 동안 나는
놓아둔 꽃팔찌를 바라본다.


그리로 우주가 수렴되고
쓸쓸함은 가이없이 퍼져나간다.
그 공기 속에 나도 즉시
적막으로 一家를 이룬다―
그걸 만든 손과 더불어.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34』(조선일보 연재, 2008)



이해를 위한 비유

시간을 보내려고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데, 옆자리의 한 사람이 흙바닥에 동그라미를 하나 그립니다. 비뚤어지면 지우고, 다시 그리고, 또 고쳐 그리기를 한참 반복하다가 그는 말없이 자리를 뜹니다.
나는 그가 남기고 간 원을 한동안 내려다봅니다. 선 하나를 따라가다 보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사람의 무료함과 적막이 서서히 전해집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 마음도 그 원 안으로 함께 들어가 버린 듯해집니다.

이 시의 꽃팔찌도 그렇습니다. 누군가 쓸쓸한 시간을 견디기 위해 만든 작은 둥근 사물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적막을 없애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적막을 고스란히 품은 채, 남겨진 사람의 마음까지 그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적막이 사물을 거쳐 다른 사람에게 옮아 오는 방식

이 작품의 화자는 어떤 사건을 크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너’가 들꽃을 따서 팔찌를 만들었고, 지금은 그 자리에 없으며, ‘나’가 그 꽃팔찌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만을 조용히 내놓습니다.
그래서 이 시를 이해하는 실마리는 단순한 그리움이나 부재의 정서에 있지 않고, 한 사람이 견디던 적막이 사물을 거쳐 다른 사람에게 옮아 오는 과정에 있습니다.

‘너’는 그냥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닙니다. 견디기 어려운 적막 속에서 손을 움직여 들꽃을 엮고, 그것을 둥근 팔찌의 모양으로 만들어 냅니다. 이때 꽃팔찌는 장식품이 아니라, 말없이 흘러가지 않던 시간을 손으로 묶어 놓은 흔적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화자가 그 사물을 바라보며 단순히 ‘너’를 그리워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그 속에 스며 있는 너의 침묵과 시간의 밀도를 감지하고, 마침내 그 적막 속으로 자신도 함께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이 시는 부재한 상대를 그리워하는 시라기보다, 적막이 사물에 남고, 그 사물이 다시 다른 사람의 내면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쓸쓸한 시간을 견디느라고

들꽃을 따서 너는
팔찌를 만들었다.
말없이 만든 시간은 가이없고
둥근 안팎은 적막했다.


무료한 시간의 응축

‘너’는 '좀 쓸쓸한 시간을 견디느라고' 들꽃을 따서 팔찌를 만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꽃의 아름다움보다도, 그것을 만들게 한 이유입니다. ‘즐거워서’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주려고’도 아닙니다. 쓸쓸한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이 팔찌는 처음부터 아름다운 장신구라기보다, 무료하고 적막한 시간을 버티는 몸짓이 굳어져 생긴 결과물입니다.

이어서 '말없이 만든 시간은 가이없고'라고 한 대목은, 그 시간이 실제로 무한하다는 뜻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체감되는 시간의 끝없음을 드러냅니다. 말이 오가면 시간은 어느 정도 흘러가지만, 혼자서 잠잠히 견디는 시간은 이상할 만큼 길고 막막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외로운 시간이 손끝에서 얼마나 더디고 무겁게 흘렀는지를 보여 줍니다.

'둥근 안팎은 적막했다'라는 표현은 특히 인상적입니다. 보통 둥근 것은 포근함이나 온전함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 시의 둥근 팔찌는 그런 안온함을 주지 않습니다. 팔찌의 안쪽도, 그 바깥도 모두 적막합니다. 다시 말해, 꽃팔찌는 적막을 끊어 주는 경계가 아니라, 적막이 응축된 중심일 뿐입니다. ‘너’가 애써 무엇을 만들어 내었어도, 그를 둘러싼 고요와 쓸쓸함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손목에 차기도 하고
탁자 위에 놓아두기도 하였는데
네가 없는 동안 나는
놓아둔 꽃팔찌를 바라본다.


부재가 불러온 응시

꽃팔찌의 쓰임이 잠깐 제시됩니다. '손목에 차기도 하고 / 탁자 위에 놓아두기도 하였는데'라는 구절은, ‘너’가 그것을 한때는 몸에 지니기도 하고, 또 한때는 몸에서 떼어 놓기도 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단순한 사용법의 설명이 아니라, 적막을 견디는 방식의 흔들림처럼 읽힙니다. 어떤 때는 꽃팔찌를 직접 차며 자신의 외로움을 몸에 붙들어 두었고, 또 어떤 때는 탁자 위에 놓아두며 조금 떨어져 바라보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네가 없는 동안 나는 / 놓아둔 꽃팔찌를 바라본다'에서 화자는 남겨진 사람이 됩니다. 꽃팔찌는 더 이상 ‘너’의 손목에 있지 않고, 탁자 위에 놓인 채 ‘나’의 시선을 받고 있습니다. 이때 꽃팔찌는 단순한 사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너의 손이 지나간 자리, 너의 말없는 시간이 굳어 있는 흔적입니다. 따라서 화자의 응시는 단순한 회상이라기보다, 그 사물에 스며 있는 적막을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화자는 꽃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꽃을 만들던 시간과 손의 움직임을 함께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부재한 ‘너’는 직접 등장하지 않아도, 그 사물 속에 여전히 남아 있게 됩니다.



그리로 우주가 수렴되고
쓸쓸함은 가이없이 퍼져나간다.


한 점으로 모이고 다시 퍼지는 역설

'그리로 우주가 수렴되고'는 아주 작은 꽃팔찌 하나가 화자의 의식 전체를 붙드는 장면입니다. 시선은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고 그 둥근 사물 하나로 몰려듭니다. 여기서 ‘우주’는 실제 천체의 세계라기보다, 화자의 관심과 감각과 생각 전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화자의 내면 세계가 그 팔찌 쪽으로 한꺼번에 끌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곧이어 '쓸쓸함은 가이없이 퍼져나간다'라고 말합니다. 한 점으로 수렴되는데 감정은 오히려 무한히 퍼져나간다는 점에서 역설이 생깁니다. 시선은 꽃팔찌 하나에 집중되지만, 그 속에 담겨 있던 쓸쓸함은 방 안의 공기와 화자의 마음 전체로 번져 갑니다. 아주 작은 사물이 아주 큰 정서를 불러내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사물 하나에 응축되어 있던 적막이 응시를 통해 공간 전체로 번져 나가는 움직임입니다. 이것은 꽃팔찌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적막을 전이시키는 매개체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 공기 속에 나도 즉시
적막으로 一家를 이룬다―
그걸 만든 손과 더불어.


적막의 동지 - '너'에서 '나'에게로

적막이 이제 화자에게까지 옮겨 오는 장면입니다. 꽃팔찌를 만든 너와 그것을 바라보는 내가 같은 적막 속에 묶이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화자는 꽃팔찌를 응시하다가, 그것을 만들던 너의 시간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지금 여기의 ‘나’와 이미 지나가 버린 ‘너’가, 혈연이 아니라 적막이라는 정서로 한 집안을 이루듯 이어집니다.

이 결말의 핵심은 그리움의 호소가 아니라 정서의 전이입니다. 한 사람이 견디던 적막이 사물에 남고, 그 사물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이 그 적막에 감염되듯 스며드는 것입니다.



적막의 전이 과정을 사물 하나로 형상화한 시

이 작품은 크고 극적인 사건 없이도, 인간의 쓸쓸함과 부재의 감각을 아주 미세한 사물 하나에 실어 내고 있습니다. 들꽃을 엮어 만든 작은 팔찌는 손쉽게 사라질 법한 물건이지만, 시인은 그 연약한 사물 속에 견디기 어려운 시간의 밀도와 침묵의 무게를 담아 냅니다. 그리하여 이 시는 감정을 직접 외치지 않고, 사물에 배어 있는 흔적으로만 전합니다.

또한 이 시는 적막을 단순한 내면의 느낌으로 처리하지 않고, 안과 밖을 채우는 공기, 손이 남긴 흔적, 응시를 통해 퍼져나가는 분위기로 구체화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현대시가 감정을 노골적으로 진술하지 않고도 얼마나 깊고 정교하게 정서를 형상화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무엇보다 이 시의 성취는 ‘너의 부재’를 슬퍼하는 데 머물지 않고, 적막이라는 정서가 한 사람에게서 사물로, 다시 다른 사람에게로 옮아 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드러낸 데 있습니다. 마지막의 '그걸 만든 손과 더불어'는 떠나 버린 사람을 직접 불러오지 않으면서도, 그 손이 남긴 흔적을 통해 현재의 공기 전체를 바꾸어 놓습니다.그 결과 화자는 혼자 외로운 사람이 아니라, 이미 누군가가 남긴 적막 속으로 들어가 그와 같은 정서의 일가를 이루는 사람이 됩니다.

바로 그 점에서 이 시는 외로움을 쉬운 위로나 단순한 그리움으로 환원하지 않고, 적막이 어떻게 전해지고 공유되는가를 조용하면서도 깊이 있게 보여 주는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평 노트]

기존 해설들이 이 시를 주로 ‘부재한 너를 향한 그리움’의 정서로 읽었다면, 나는 적막한 감정이 한 사람에게서 사물로, 다시 다른 사람에게로 옮아 가는 과정에 더 주목했습니다.

1. 그리움의 시에서 정서의 전이 과정으로 읽었습니다.

일반적인 해설은 ‘네가 없어서 내가 외롭다’는 식으로 감정의 원인을 부재에서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해설에서는 꽃팔찌를 매개로 하여, 처음에는 ‘너’가 견디던 적막이 그 사물에 스며들고, 다시 그것을 바라보는 ‘나’에게 옮아 오는 흐름을 더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2. 꽃팔찌를 추억의 소품이 아니라 적막의 매개체로 보았습니다.

기존 해설에서는 꽃팔찌를 사랑의 흔적이나 추억의 상징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을 단순한 기념물이 아니라, 쓸쓸한 시간이 응축되어 남은 사물, 그리고 그 적막을 다시 타인에게 전하는 정서의 통로로 읽었습니다.

3. ‘둥근 안팎은 적막했다’는 구절을 작품 전체의 구조로 확장했습니다.

이 표현은 팔찌의 안과 밖이 모두 적막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팔찌는 적막을 벗어나게 해 주는 장식이 아니라, 적막이 안팎으로 가득 찬 채 응축된 중심입니다. 나는 이 점을 바탕으로, 작품 전체가 적막을 지우는 방식이 아니라 적막이 머물고 번져 나가는 방식을 보여준다고 보았습니다.

4. ‘우주가 수렴되고’와 ‘쓸쓸함은 퍼져나간다’의 역설을 핵심으로 보았습니다.

시선은 꽃팔찌라는 작은 사물 하나로 모이지만, 정서는 오히려 그 한 점에서 끝없이 퍼져나갑니다. 나는 이 구절을 단순한 집중의 이미지가 아니라, 응시를 통해 적막이 확산되는 역설적 운동으로 보았습니다. 즉, 작은 사물이 거대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방식에 주목한 것입니다.

5. ‘적막으로 一家를 이룬다’를 감정의 공유 상태로 해석했습니다.

여기서 ‘일가’는 혈연이나 실제 가족이 아니라, 같은 적막 속에 함께 속하게 된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시의 결말은 사적인 상실의 호소라기보다, 한 사람의 적막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져 마침내 같은 정서의 권역을 이루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시는 단순히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작품이 아니라, 쓸쓸함이 손을 거쳐 사물에 남고, 그 사물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의 내면으로 옮아 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지금은 '2008년 한국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조선일보)'을 해설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작품 해설들, 기존에 내가 고른 작품 해설들을 다시 보고 싶은 분들, 검색을 통해 들어 왔지만 다른 글들도 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네이버블로그를 만들어 다 모아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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