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악 '전라도 가시내' 해설과 감상

- 북간도에서 만난 함경도 사내와 전라도 가시내

by 한현수

알록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뿐더러 까무스레한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두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드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히 잠거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도 외로워서 슬퍼서 초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줄게
손때 수집은 분홍 댕기 휘 쉬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 『오랭캐꽃』. 아문각. 1947 : 『이용악 시전집』. 창작과비평사. 1988) -



눈보라 치는 북간도, 유랑민들의 처연한 만남과 위로

이 시는 일제 강점기, 삶의 터전을 잃고 떠밀려난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유랑 생활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함경도 출신의 사내로,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만주 북간도의 어느 허름한 술집(술막)에 당도했습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과 불신이 가득한 이 낯선 땅에서, 화자는 자신처럼 고향을 등지고 흘러들어온 한 '전라도 가시내'를 만납니다.

한반도의 북쪽 끝(함경도) 사내와 남쪽 끝(전라도) 여인이 국경 너머 가장 추운 땅에서 마주 앉았다는 설정은, 당시 유랑의 비극이 특정 지역이 아닌 민족 전체의 아픔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시는 그 서글픈 만남의 하룻밤을 통해 유이민들의 애환과 서로를 향한 가슴 시린 연민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알록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뿐더러 까무스레한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두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사내


기구한 운명들의 만남

시는 술집 여인인 '가시내'의 이국적이면서도 슬픈 외모(바다처럼 푸른 눈, 까무스레한 얼굴)를 묘사하며 시작됩니다. 화자가 본 그녀는 알록달록한 조개를 연상시키는 바닷가의 이미지입니다. 화자는 자신이 발이 얼어 가면서(얼구며) 두만강 철로(두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라고 소개합니다. 한반도의 북쪽과 남쪽의 끝인 함경도와 전라도 사람의 이 만남은, 두 사람의 시련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민족 전체의 수난임을 암시합니다.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드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미더운 북간도 술막


불안과 공포가 지배하는 현실

화자는, 북간도의 바람도 오랑캐의 피리소리(호개)도 제법 익숙해져 이제(인전) 무섭지 않고, 침침하고(어드운 등불 밑) 자욱한 안개 같은 근심도 견딜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디서 들려올는지 모르는 끔찍한 소식(흉참한 기별)과 이웃의 감시와 밀고(두터운 벽. 이웃)는 두렵답니다(못 미더운). 생명을 위협하는 약탈에 관한 소식, 나를 감시하던 누군가의 밀고로 인해 들이닥칠 체포 소식 같은 것들일 터입니다.

국경 지역 북간도의 '술막'은 결코 안식처가 아닙니다.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히 잠거다오


동병상련의 연민과 위로

화자는 여인(가시내)에게 믿음이 가는 모양입니다. 온갖의 멸시와 모욕의 말(방자의 말)을 들으면서 눈보라를 뚫고 여기까지 오게 된 자신의 온갖 고초를 털어 놓습니다. 그리고 여인에게 가슴 어두운 곳(그늘진 숲속)에 묻어 두었던 사연들(기어간 오솔길)을 나와 나누자(나는 헤매이자)고 합니다. 남실남실 술을 따라 마시며 그 '가난한 이야기'에 고요히 잠겨 들자(고히 잠거다오)고 합니다. 같은 처지에 놓인 유랑민으로서 느끼는 동질감이자, 서로의 아픈 사연을 들어주며 위로받고 싶은 마음의 표현일 것입니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도 외로워서 슬퍼서 초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여인의 비극적인 유랑 경로

여인의 여정을 화자가 대신 말해 줍니다. 여인은 석 달 전 두만강을 건너 이곳에 왔습니다. 온 세상이 단풍으로 물든 아름다운 가을이었지만, 여인은 그 먼 길을 외로움과 슬픔에 흐르는 눈물을 치마폭(초마폭)으로 닦고 가리면서, 이틀 밤낮을 두루미처럼 울면서 기차(화차. 불슬기)로 이곳에 왔습니다.

그때 차창이 흐렸더냐고 묻는 것은, 눈물 고인 여인의 눈과 앞날을 내다볼 수 없었던 막막함의 표현일 것입니다.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줄게
손때 수집은 분홍 댕기 휘 쉬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잠시 불러보는 고향의 봄

여인의 보조개 웃음에서 그녀의 전라도 고향 바닷가 파도소리가 소환됩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싸늘하고 금방 울음이 터질 듯하면서도 터지지 않습니다. 울고 싶을 만큼 힘들지만, 울어도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래 누적된 슬픔과 피로, 자기방어적 쓸쓸함이 표정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화자는 전라도 사투리로 말해 달라고 청합니다. 조국 고향(너의 나라)의 지난 시절(봄)로 돌아가 보라는 말입니다. 손때 묻은 분홍 댕기를 휘날리던 수줍은(수집은) 모습의 어린 시절로 잠깐이나마 돌아가 보라는 말입니다.

춥고 삭막한 북간도의 겨울밤, 그녀의 사투리로나마 따뜻했던 고향의 '때아닌 봄'을 소환하여 잠시라도 고통을 잊고 고향으로 돌아간 듯한 위안을 주려는 화자의 배려가 돋보입니다.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다시 시작될 유랑과 허무

그러나 이 인연은 오늘뿐입니다. 날이 밝아 언 길 위로 날이 밝으면 화자는 다시 눈보라 치는 벌판으로 나가야 합니다. '노래도 없이', '자욱(자국)도 없이', 불안하게 머뭇거리며(우줄우줄) 사라질 것이라는 화자의 말 속에,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다 스러져야 하는 유이민의 비극적 운명과 허무가 가득합니다.



이 작품은 '북방의 정서'와 '유이민의 비애'를 가장 탁월하게 형상화한 리얼리즘 시의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아마 다음과 같은 요소가 주 이유일 것입니다.

1. 서사적 구조의 힘입니다. 화자와 청자가 술집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구성을 통해, 당시 민족의 참상을 구체적이고 생생한 이야기로 전달합니다.

2. 토속적 시어와 감각적 묘사입니다. '알록조개', '눈포래', '분홍 댕기' 등의 시어는 향토적 정감을 불러일으키며, 삭막한 만주의 현실과 대비되어 비극성을 높입니다.

3.비극적 현실 인식과 연대입니다. 단순히 슬픔을 토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토의 남과 북을 아우르는 만남을 통해 민족적 동질감을 확인하고 서로를 위무하려는 휴머니즘을 보여줍니다.

이 시는 일제 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 눈보라 치는 벌판으로 내몰린 우리 민족이 어떻게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그 겨울을 견뎌냈는지를 잘 보여주는 뼈아픈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지금은 '2008년 한국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조선일보)'을 해설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작품 해설들, 기존에 내가 고른 작품 해설들을 다시 보고 싶은 분들, 검색을 통해 들어 왔지만 다른 글들도 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네이버블로그를 만들어 다 모아 놓았습니다.

네이버블로그 현대시 전문 해설과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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