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이란 언어는 결코 뜨겁지 않다
첫번째는 나
2는 자동차
3은 늑대, 4는 잠수함
5는 악어, 6은 나무, 7은 돌고래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열번째는 전화기
첫번째의 내가
열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2는 자동차, 3은 늑대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마지막은 전화기
숫자놀이 장난감
아홉까지 배운 날
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고
첫번째는 나
열번째는 전화기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41』(조선일보 연재, 2008) -
이해를 위힌 비유 : 꽃과 시인
이 난해한 시를 이해하기 위해, 시 쓰기의 과정을 하나의 비유로 풀어 보겠습니다.
1. 실존의 만남 나는 들판에서 빨간 꽃을 봅니다. 눈으로 색을 보고, 향기를 맡고, 꽃잎의 질감까지 느끼며 가슴이 뜁니다.
- '실제의 나'가 '실제의 꽃(실존)'을 만나는 살아있는 순간입니다.
2. 시인의 자리로 전환 그 꽃에 대해 시를 쓰려고 책상에 앉아 펜을 듭니다.
- 이때부터 나는 현장의 ‘나’ 그대로가 아니라, 대상을 고르고 판단하고 정리해 말로 바꾸는 ‘쓰는 나(시인의 자리)’로 전환됩니다.
3. 기호의 한계 '쓰는 나'는 '꽃이 빨갛다'라고 씁니다. 그러나 종이 위의 '빨갛다'는 언어는 내가 본 그 빨강의 온도와 결, 빛의 흔들림까지 다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 미묘한 색을 표현하기에는 언어가 너무 부족한 것입니다.
- 그러므로 '빨갛다'라는 언어는 실제 꽃의 색이 아니라, 그런 색 비슷한 것들을 가리키는 ‘기호’가 되어 버립니다.
4. 기호 붙이기 놀이 그렇게 시를 쓰는 것(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실제의 사물을 표현하는 일이 아니라, 실제의 사물에 '기호를 붙이는 일'이 되어 버립니다.
5. 주체의 함몰 1에서 실제 꽃을 보았던 나도, 2에서 '쓰는 나'로 바뀌었으므로, 나도 이 '기호 붙이기' 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6. 기호의 출판 완성된 시를 시집으로 발표합니다. 이 시집의 내용은 현장의 꽃 색깔이 아니라 기호들입니다. 시집도 '기호 붙이기'의 일부가 된 것입니다.
이런 예시를 바탕으로 이 시를 읽어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나
2는 자동차
3은 늑대, 4는 잠수함
5는 악어, 6은 나무, 7은 돌고래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열번째는 전화기
기호로 바뀌는 실체
사물마다 번호가 붙습니다. 이 번호는 실제의 사물이 아닙니다. 번호를 아무리 들여다보아야 그 사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일종의 '기호 붙이기' 놀이입니다. 위의 예시로 보면, '꽃이 빨갛다'에서 '빨갛다'가 실제의 꽃 색깔을 표현하지 못하고, 그런 종류의 색에 붙인 기호가 되어 버린 것과 같습니다.
'나'는 이 '기호 붙이기'를 하는 사람이니, 나도 이 놀이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이 기호들을 외부에 발표하는 '전화기'도 이 놀이의 일부가 됩니다. 위에서 실제 꽃을 본 현장의 사람이 '쓰는 나'가 되어 실제로 본 것을 정리하면서 '기호 붙이기'의 일원이 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1연의 '기호(숫자) 붙이기'에는 차이가 보입니다. 2부터 9까지는 ‘2, 3, 4…’라는 숫자(기수)로 부르지만, 유독 ‘나’와 ‘전화기’만 ‘첫번째’, ‘열번째’라는 순서(서수)로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2~9가 '기호 붙이기'의 대상이 되는 항목들(내용물)인데, ‘첫번째(나)’와 ‘열번째(전화기)’는 이 세계를 앞뒤로 닫고 있는 틀(구조)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기호를 붙이는 사람이고 '전화기'는 그 기호들을 알리는 수단입니다. 이 구조를 보여주기 위해 ‘첫번째’라는 시작점과 ‘열번째’라는 끝점을 별도로 표시한 것입니다.
첫번째의 내가
열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기존 언어의 암기와 답습
화자는 전화기를 들고 목록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여기서 ‘반복’은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라, 기존의 언어 용법을 그대로 암기하고 답습하는 과정입니다. 마치 외국어를 배울 때 영혼 없이 단어를 따라 하며 외우듯, 화자는 '2는 자동차'라는 정해진 규칙(관습)을 끊임없이 읊조리며 내면화합니다. 이 과정에서 실제의 체험이나 그와 관련된 고민은 끼어들 틈이 없고, 오직 사회적으로 약속된 기호의 사용법을 기계적으로 학습할 뿐입니다.
위의 비유에서 시인이 자신이 본 꽃의 느낌을 제대로 표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남들이 다 쓰는 상투적인 언어와 표현을 교과서 외우듯 반복해서 연습하고 사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꽃은 붉다, 꽃은 붉다'를 수없이 반복하여 사용하면서 그 고정된 문법은 뇌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2는 자동차, 3은 늑대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마지막은 전화기
습관이 된 기호와 공허한 양산
기계적인 암기와 반복은 곧 습관이 됩니다. 화자가 전화기를 들고 기호들을 계속 말하는 동안, 이 연결은 점차 익숙해지고 기술적으로도 능숙해집니다.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는 바로 그런 습관적 양산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내면의 깊이가 깊어지는 성장이 아니라, 익숙해진 기호들을 겉잡을 수 없이 쌓아 나가는 양적 팽창입니다. 고민 없이 뱉어낸 말들이 쌓여 몸집은 거대해지지만, 그 안에는 실존의 무게가 없습니다.
위의 비유에서 상투적인 표현에 완전히 길들여진 시인이, 익숙해진 기호로 영혼이 없는 시를 기계적으로 마구 써서 발표하는 상황입니다. 작품의 양은 늘어나고 시인으로서의 겉모습(몸통)은 비대해지지만, 그것은 건강한 살이 아니라 ‘거품’처럼 부풀어 오른 상태일 뿐입니다.
숫자놀이 장난감
아홉까지 배운 날
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고
첫번째는 나
열번째는 전화기
자만의 끝에서 만나는 무한 회로
'아홉까지 배운 날'은 화자가 기존의 언어 기호 체계를 완벽히 암기하고 통달했다고 믿는, 자만의 순간입니다. 숫자 9는 한 자리 숫자의 완성을 뜻합니다. 그런데 완성이란 동시에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들어올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화자는 자신이 이 기호 놀이의 규칙을 다 배웠다고 느끼는 순간, 사실은 그 규칙 바깥에 있는 실존을 완전히 차단해 버린 것입니다. 열림이 아니라 닫힘입니다. 배움이 끝난 자리에서 세계와의 접촉도 함께 끝납니다.
외부의 양분 공급이 끊긴 상태에서 기계를 계속 돌리려면 연료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화자는 '불어난 제 살', 즉 자신이 기계적으로 쏟아내어 덕지덕지 쌓인 잉여 기호(말들의 군살)를 다시 뜯어먹습니다. 이것은 불어난 기호를 소비하여 다시 ‘첫번째’ 자리를 만들고 시스템을 재가동하는 초기화 과정입니다. 결국 시는 다시 '첫번째는 나 / 열번째는 전화기'로 돌아가며, 출구 없는 무한 회로를 완성합니다.
이는 위의 비유에서 더 이상 쓸 거리, 능력이 없는데도 자신을 대가라고 믿은 시인이, 예전에 썼던 자신의 상투적인 말들을 재탕하고 삼탕하며(제 살을 뜯어먹으며) 억지로 시를 써 나가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비워낸 자리에 또다시 ‘1번(나)’을 세우고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지옥 같은 순환이 이루어집니다.
내용은 사라지고 주체와 도구만 남다
이 시는 겉으로는 숫자와 사물의 나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해설이 읽어낸 것은 그 나열 안에 숨어 있는 하나의 서사입니다. 언어를 배우고, 익히고, 능숙해지고, 통달했다고 믿는 순간 오히려 실존과 단절되어 버리는 과정입니다. 화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첫번째'의 자리에 있지만, 그 자리는 주인의 자리가 아니라 회로의 출발점일 뿐입니다. 내용은 사라지고 주체와 도구만 남는 이 서늘한 결말은, 우리가 쓰는 언어가 과연 실존을 담고 있는지 아니면 실존을 대신하는 기호에 불과한지를 뼈아프게 묻습니다. 그 질문은 시인에게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비평 노트]
기존 해설들이 이 작품을 난해한 이미지를 동원해서 ‘현대인의 소외’나 ‘의미의 파괴’를 보여주는 시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입식 암기 교육에 대한 비판'이라는 해설까지 있습니다. 나는 화자가 언어라는 시스템에 갇혀서 세계의 실존을 상실해가는 과정의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보았습니다.
1. ‘1과 10’을 단순 나열이 아닌 세계를 가두는 ‘구조적 틀’로 재해석했습니다.
다른 해설들이 1부터 10까지를 파편화된 사물의 대등한 나열로 보는 데 비해, 나는 이를 ‘기수(내용물)’와 ‘서수(틀)’로 엄격히 분리했습니다. 2~9가 채워지는 내용이라면, ‘첫 번째(나)’와 ‘열 번째(전화기)’는 이 놀이를 작동시키는 주체와 도구입니다. 따라서 이 시는 단순한 사물의 나열이 아니라, 화자가 놀이의 주인처럼 보이다가 결국 그 구조의 부속품(1번 타자)으로 편입되는 ‘주객전도’의 비극이 됩니다.
2. ‘반복’과 ‘팽창’을 무의미한 몸짓이 아닌 ‘학습된 기호의 양산’으로 보았습니다.
다른 해설들은 화자의 반복 행위를 권태로운 삶이나 물질문명의 비대화 정도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홉까지 배운 날’이라는 표현에 주목해, 이를 기성 언어의 관습을 맹목적으로 암기하고 답습하는 ‘숙련 과정’으로 읽었습니다. 그러므로 ‘몸통의 팽창’은 단순한 비만이 아니라, 실존적 고민 없이 상투어만을 기계적으로 찍어내어 생긴 ‘언어의 거품(허상)’이 됩니다.
3. ‘살을 뜯어먹음’을 자학적 고통이 아닌 시스템 유지를 위한 ‘연료 소비’로 정의했습니다.
다른 해설들은 ‘제 살을 뜯어먹는’ 행위를 현대인의 극한적 고통이나 자기 파괴 충동으로 풀이하곤 합니다. 나는 오히려 그것을 외부(실존)와 단절된 폐쇄 회로 안에서, 시스템을 멈추지 않기 위해 잉여 생산물(불어난 기호)을 다시 삼키는 ‘단순 재순환의 과정’으로 판단했습니다. 즉, 이것은 감상적인 자학이 아니라, 자기 소비를 통해 다시 1번으로 돌아가 기계를 돌리는 순환의 과정인 것입니다.
4. 난해한 숫자 놀이를 ‘언어 실험’이 아닌 ‘시인의 매너리즘’이라는 구체적 ‘서사’로 해석했습니다.
다른 해설들이 이 시를 포스트모더니즘적 언어 실험이라 부르며 ‘의미 없음’ 자체를 강조하는 데 비해, 나는 이를 ‘꽃의 본 색깔(실존)’을 잃어버리고 ‘시(기호)’만 남은 시인의 이야기로 재구성했습니다. 타성에 젖어 상투적인 시를 양산하다가 결국 자기 복제의 늪에 빠지는 구체적인 ‘이야기’로 읽어냄으로써, 난해하기만 했던 시를 실존과 언어의 대립을 다룬 선명한 드라마로 풀었습니다.
나는 이 작품을 ‘언어와 실존의 불화’라는 철학적이고 근원적인 주제를 다루는 시로 읽었습니다. 시대나 사회를 넘어,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딜레마일 것입니다.
**** 지금은 '2008년 한국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조선일보)'을 해설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작품 해설들, 기존에 내가 고른 작품 해설들을 다시 보고 싶은 분들, 검색을 통해 들어 왔지만 다른 글들도 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네이버블로그를 만들어 다 모아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