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컨테이너선 타고 수에즈 운하 지나기
여자 항해사부터 선박교통관제사까지
나의 마지막 배는 6,800TEU에 길이 300미터 정도 되는 컨테이너선이었다.
2007년 첫 배가 2,200TEU,
2008년 세번째 배가 4,700TEU,
2009년 네번째 배가 6,800TEU.
컨테이너선의 대형화를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2023년 지금은 24,116TEU가 제일 큰 컨테이너선이다.
우리나라에는 2020년에 취항한 HMM ALGECIRAS호가 23,964TEU로 가장 크다.
진짜 엄청나게 크다.
거대한 요새 하나가 바다에 떠다니는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배가 엄청나게 커져도 선원 숫자는 더 늘어나지 않았다.
20명에서 많아야 24명.
점검해야 할 구역도 넓어지고 관리해야 할 화물도 늘어나고 엔진 규모도 커졌는데 선원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
그만큼 자동화도 많이 되고 있고 문제가 발생하면 육상에서 서비스팀을 파견하는 등 선원들이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일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추세인 것 같다.
규모의 경제를 추구해 세계 경쟁력을 확보한다고 하던가.
더 효율적으로 더 저비용으로 더 많이.
마지막 배는 2항사 진급을 하고 타서 3항사 때와는 업무가 달랐다.
항해장비와 항로계획 등을 담당했다.
당직근무 시간이 00~04시 (낮에는 12~16시) 사이라 2항사는 좀 치외법권 느낌이었다.
새벽 당직을 서려면 피곤하니까 그냥 두라는 느낌?
확실히 낮밤이 바뀐다는 것만 빼면 업무 자체는 좋았다.
나만의 고유 업무가 있으니 인정받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 정도면 배를 좀 더 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유럽 항로를 다니는 배였다.
동남아에서 웬만한 항구는 다 돌고 인도양을 지나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면 지중해가 나왔다.
그렇게 유럽에서 또 바쁘게 항구를 돌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면 2달 정도 걸리는 일정이었다.
배 타고 유럽도 처음 가보지만 수에즈 운하를 지난다는 거에 가슴이 뛰었다.
뱃사람이라면 운하 한 번쯤은 건너봐야 하지 않겠는가.
인도양과 소말리아 해적이 득시글대는 아덴만, 그리고 홍해를 지나면 수에즈 운하가 나왔다.
수에즈 운하는 사막을 파서 물길을 만든 곳이었는데 확장 공사를 하고 있지만 여전히 일방통행이다.
그게 뭐 생각처럼 그냥 막 땅 파면 되는 게 아니가 보더라.
그래서 운하 입구에 도착하면 관할 당국에 보고를 해야 하고 미리 서류도 제출해야 한다.
그렇게 앵카를 놓고 대기하면 우리 배의 순번이 나온다.
선두 그룹은 여객선, 자동차 운반선, 컨테이너선 등 빠른 선박으로 배치되고, 후미 그룹은 유조선, LNG선 등 느린 선박으로 배치된다.
대략 20척 정도가 한 그룹으로 순서대로 쪼로로 일렬로 통과한다.
하루에 한 번 출발을 하는데 북쪽에서 출발한 선박 그룹과 남쪽에서 출발한 선박 그룹이 마주치게 되면 안 되니까 중간에 선박들이 대기하는 장소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 중간 지점에서 바로 이집트 상인들이 올라왔다.
보따리를 짊어지고 올라와 선박에 좌판을 펼쳐놓았다.
각 배들마다 상인들이 지정되어 있는지 다른 배에도 올라간 모습이 보였다.
대부분이 이집트 관광용품들로 기념은 되겠지만 싸구려라 별 쓸모가 없는 것들이었다.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올라왔던 상인들이 파는 보석이 훨씬 나아 보일 정도였다.
그때는 혹해서 진짜 보석을 살 뻔했는데 1항사님이 말려주었다.
상인들이 나보고 아름답다며 호객행위를 열심히 했지만 이런 거에 흔들릴 내가 아니었기에 구경만 실컷 하고 아무것도 사진 않았다.
처음에나 이집트 사막에서 피라미드가 보일까 봐 열심히 망원경을 보고 신기해했지 두번째부터는 귀찮아졌다.
그저 빨리 수에즈 운하를 지나고 싶었다.
왜 수에즈 운하는 이런 방식인 건지 빨리빨리 공사해서 확장하면 돈도 더 벌 수 있을 거 같은데 한국인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갔다.
운하 통항에 크게 위험할 건 없기도 하고 이집트인 도선사도 승선해 있어서 직접 조종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긴장이 됐다.
12~16시간 동안 앞 배의 속도를 신경 쓰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따라오는 뒷 배는 실수 안 하고 잘 오고 있는지 보는 일이 은근히 스트레스였다.
혹시라도 우리 배나 다른 배가 고장 나거나 하면 큰일이니까 말이다.
그냥 쭈욱 가기만 하면 되는 수에즈 운하를 몇 번 통과해보고 나니 파나마 운하를 지나고 싶단 생각은 깡그리 사라졌다.
파나마는 수에즈보다 훨씬 항해하기 복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정말 정글의 악어를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다고 했다.
아무리 그렇게 흥미로워도 직장인인 선원에게는 그냥 피곤한 일인 것이다.
여객선이나 요트 타고 놀러 가면 재밌으려나?
수에즈 운하 통과 감상을 말하자면 드래곤 볼 만화에 나오는 '시간의 방'이 이곳과 비슷할 것 같았다.
다 똑같아 보이는 사막 배경이 무한 반복되어 시간이 엄청 느리게 가는 것 같았다.
이집트인 도선사가 하루에 5번 기도 시간에 맞추어 메카 방향을 향해 진지하게 기도하고 절하는 모습만이 시간의 흐름을 실감 나게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