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몰아쓴 일기

망한 마흔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록한다

by 이혜아

1.

스물을 꿈꾸고 서른을 두려워했던 시절은 지나가고 간신히 하루하루를 버티다가 결국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처럼 마흔을 마주했다. 계단처럼 한칸 한칸 오르듯 나이를 먹었을 텐데, 돌아보면 낭떠러지 같은 위태로움의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다가 나는 마흔이 되었나. 최승자 시인은 ‘이렇게 죽을 수도, 이렇게 살 수도 없을 때, 서른이 온다’고 말했다. 마흔이야말로 이렇게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위기감에 휩싸인다.


누구나 마흔이 된다. 그럼에도 나는 왜 마흔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걸까.


모두가 같은 강도와 무게로 마흔을 견디지 않을 것이다. 인생의 성취감을 느끼거나 때 이른 허무감에 휩싸일지도 모른다. 나는 둘 다 아니다. 성취감을 느낄 만큼 이룬 것이 없고, 허무를 말할 만큼 삶의 무게를 고민한 적도 없다. 일상의 좌절은 나에 대한 원망이 되고, 반복된 원망은 삶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두려움이 밀려오면 근거 없는 낙관으로 방어해 간신히 하루를 버텼다. 그 결과 마흔이 되었다. 정확히 하자면 ‘망한 마흔’인 것이다.


나는 마흔이고, 망했다.


서른 아홉 다음에는 마흔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마흔에 망할 줄은 몰랐다. 나는 마흔에 직업과 자산과 보험이 없었고, 빚과 병과 부양가족이 있었다. 없는 것과 있는 것이 균형을 이루는 것 같지만 계산을 해보자. (빚+병+부양가족)-(직업+자산+보험). 답이 나오지 않지만 엄청난 마이너스, 음수값이 나올 것이다. 더는 생각하고 싶지가 않다. 생각을 했어야하는 절박한 상황이었지만.


‘그래, 잘 될 거야.’라며 근거 없는 희망을 주입한다.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태도는 성공의 기본이니까. 과거의 고난을 가볍게 극복하고 최고의 위치에 서 있는 나를 상상한다. 미래 혹은 허구의 나를 스크린에 세워놓고 현재의 초라한 관객석에서 무심히 바라보는 것이다.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 사이에 어떤 인과도 없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래가 아니라 공상 속의 나가 된다.


미래로 가지 못한 다면 과거는? 영화 <박하사탕>에서 주인공 김영호가 ‘나 돌아갈래!’ 외쳤던 것은 기억나지만 정작 내가 돌아가고 싶은 과거는 생각나지 않는다. 누구나 그렇듯이 인생에서 결정적 순간이 있었겠지만 정리되지 않은 앨범의 사진처럼 쌓여있을 뿐이다. 그래서 예상치 못한 행운처럼 혹은 갑작스러운 불행처럼 느껴진다. 나에 의한 계기와 원인이 분명할 텐데 말이다. 맥락을 놓친 채로 타인과 비교까지 한다면 그날은 술 한잔을 하거나 이불속에서 울면서 잠들어야 한다.


좋은 기억을 떠올린다고 해도 지금의 현실과의 낙차가 있다. 그렇게 잘 나갔는데 대체 왜 이렇게 사는 것인가. 나쁜 기억은 오늘이라는 시간에도 쉽게 스며든다. 그때와 다를 바 없이 오늘도 이렇게 살고 있구나. 의문이든 체념이든 하루하루 어쩔 수 없이 마침표를 찍고 여기까지 왔다. 마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이력과 통장 잔고로 쉽게 확인이 된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 것 같은 느낌. 내 안에서 갈등의 목소리가 들린다. ‘인생 사십 년을 살고도 또 뭐가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거야?’ ‘아냐, 분명히 뭔가가 있어.’ 이런 싸움은 익숙하다. 수십 년을 메아리처럼 울려왔기 때문이다. 오늘만큼은 후자의 목소리가 한마디를 더한다. ‘이럴 때 증거가 있다면.’ 증거. 나에 대한 기록. 지키지 못한 다짐도, 지나친 낙관에 기운 덕담도 아닌, 일상을 살아가는 나에 대한 기록.


일기.


안 썼는데 어쩌지. 지금까지 하루도. ‘참 재미있었다’로 끝나는 일기를 삼십여 년 전에 쓴 적은 있지만. 하루를 진실하게 기록한 적은 없었다. 다음날 해야 할 일 혹은 일어났으면 좋을 일을 쓰고 엑스표로 지운 적은 많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일기를 써야 한다. 그래야 망한 마흔이 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평균수명을 반으로 접은 그 가운데인 마흔. 일기를 몰아 쓰려고 한다. 과거의 하루 그리고 오늘. 마흔, 몰아 쓴 일기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