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에서 삭제

관계에서 소외된 것이 아니라 해방된 것

by 이혜아


내 마음속에 저장, 이라는 멘트로 관심과 인기를 받은 아이돌 멤버가 있었다. 보기 좋은 것, 다시 생각하고 싶은 것들은 저장한다. 용량이 부족할 정도로 쌓여있다면 나름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원치 않게 저장된 관계와 기억은 어떻게 해야 할까. 관계는 ‘차단’하고 기억은 ‘삭제’하면 되겠지만 파일 정리나 휴지통 비우기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고민 끝에 시도한 것은 ‘상상의 복수’였다. 미워하는 사람을 나만의 서사에 세워두고 상상력을 발휘해 경제적, 법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몰아넣고 비굴한 악역으로 만드는 것이다. 상상이 지속될 때는 나름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내 앞에 무릎을 꿇리고 그를 궁지에 몰아 용서를 빌게 하는 것. 나에게 쾌감을 주면서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나의 복수에 대한 현실적 부담은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상상에서 현실로 돌아올 때, 마치 스위치 on/off를 하듯 단순하기에 현실과의 낙차가 클수록 괴로웠다. 내 머릿속에서 그가 비참해지든, 병들든, 죽든 간에 그게 그에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는 여전히 현실에서 잘 살고 있다. 그리고 내가 이런 분노를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안에 독화살을 그에게 쏘지도 못하고 독만 남아 내 안을 병들게 하는 것 같았다. 결국 내가 느끼는 자책감이 더 컸다. 상상의 복수는 실패였다.


두 번째 방법은 ‘사고의 전환’이었다. 사고를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단어를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과거에 어떤 집단에 들어갔을 때, 나만 제외하고 출신 지역이 모두 같았다. 나만 인천이었는데 그 자리에 있는 모두 특정 지역인 것이다. 그들의 지역 방언부터 과거 이야기 혹은 정치 성향까지 나와 같거나 맞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가입과 탈퇴가 가능한 집단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서 일단 맞춰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낯선 소외감을 느꼈다.(혼인으로 인한 법적 가족관계) 소외감. 나만 다르고 나만 멀리에 있는 느낌.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쁘지 않았다. 이들과 다르다는 것이. 무게중심이 그들에게 있을 때는 내가 소외된 것일 수도 있지만 그 무게중심을 나로 옮기면 내가 자유로워졌다. ‘소외감’이 아니라 ‘해방감’이었다.


소외감에서 해방감을 느끼고 나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래서 마음에서 지워버리는데 어떤 가책이 있지 않았다. 결국 내 마음속에서 삭제된 데는 긴 시간이 걸렸지만 그 과정이 나의 마음을 단단하게 해주고 앞으로 삶의 태도를 편안하게 해준 것 같다. 언젠가 ‘휴지통 비우기’를 할 때 다시 떠올릴 수 있겠지만 그때는 분노를 마주했을 때, 좀더 편안한 마음이리라 믿는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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