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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로빈 Feb 28. 2021

클럽하우스

클럽하우스의 유행 현상에 대하여


  언어가 탄생한 이후, 책이 등장하기 전까지 지식의 축적은 인간의 기억력에 크게 의존해야만 했다. 남들보다 더 삶과 세상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한 사람이 멘토가 되고, 그 지식을 이어받아 후대로 내려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멘티가 되었다. 멘토가 모임을 열어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외우기 시작하면, 멘티들은 그것을 들으며 열심히 머릿속에 새겼다. 그것을 더 잘 기억하려는 과정 속에서 시가 탄생했고, 음악이 탄생했다. 그리고 글씨와 책이 탄생한 뒤로, 지식과 생각의 구비전승은 낡은 것이 되었다. 그리고 사진과 비디오가 탄생한 뒤로는 텍스트와 종이 책이 낡은 것이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소위 유튜브 세대라고 불리는 지금의 10~20대는 다시 그들이 익숙하게 느꼈던 비디오 매체를 과감하게 뒤로 하고 귀로 듣는 오디오를 선택했다. 바로 남의 대화를 청취하는 애플리케이션인 클럽하우스 말이다. 애써서 머릿속으로 기억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정보가 영원에 가깝게 저장되는 시대에, 사람들은 어째서 다시 소리로 듣는 정보의 공유를 택하게 된 것일까.



   너무 많은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는 것과도 같다. 우리는 수천 개가 넘는 뉴스 채널과 수천 개가 넘는 요리방법 소개 채널, 수천 개가 넘는 음악 추천 채널과 초 단위로 바뀌는 비디오들로 수놓은 인터넷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그것들은 철저히 우리들이 원하는 '취향'에 기반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가 '선택'해서 우리가 인지적인 노력을 기울여 청취하려는 의도가 있는 콘텐츠들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자동적으로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일 뿐이고, 우리는 최근 몇 년 사이에 그것들을 그저 클릭하고 시간을 소비하는 식으로 살아왔다.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영상은 마르지 않는 샘물과도 같다. 따라서 비디오 세계 속에 존재하는 한, 우리가 우리의 의지로 콘텐츠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고민하고, 선택해서 그것으로부터 제대로 된 정보를 얻는 경험은 점점 하기 힘들어진다. 알고리즘이 알아서 계속 새로운 영상을 우리에게 추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바보상자'라고 불렸던 TV의 진보한 버전인 '스마트폰'은 그 기계 자체는 스마트해졌는지 몰라도 정작 그것을 사용하는 사용자들은 바보스럽게 만들기 일쑤다. 그것을 접하기 전에 겪었던 '불편함'이라는 것이 완전히 거세된 세상 속에서, 자신이 원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만 계속 주입받으면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귀찮게 이것저것 선택할 필요가 없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표류하는 비디오 세상 속의 삶은 편리하지만 그 자체로 너무 많은 과정이 생략되어 너무 단조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눈 앞의 이 비디오를 시청하지 않는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이따 볼일을 보고 유튜브를 켜도 그 영상은 다시 내 눈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클럽하우스는 어떤가? 남의 대화를 청취하는 것은 남의 일상이 편집되어 올라온 브이로그를 보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왜냐하면 편집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먼 옛날 멘토와 멘티가 주고받았던 지식의 인수인계 과정처럼, 떠드는 주체와 그것을 가만히 듣는 주체가 있을 뿐인 클럽하우스. 그 대화는 일시적으로 사람들의 뇌리에서 생각이 다른 방식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영감을 주고 그 자리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누군가 애써 녹음하지 않는 한, 그 대화는 마치 연극이 그러하듯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기억의 영역으로 사라진다. 비디오에 비해 정확한 이미지도 아니고(물론 이미지도 정확함과는 거리가 멀다), 각자가 해석하기에 따라 내용이 달라질 수 있으며, 한번 방송이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같은 대화를 들을 수 없게 된다는 '불편함'이 있지만, 오히려 그 불편함으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콘텐츠에 기꺼이 더 집중력을 기울이고 더 많은 시간을 내어준다. 요컨대 편리함이 강점이었던 유튜브와 넷플릭스와 달리, 클럽하우스는 지금 대세를 잡고 있는 스트리밍 시장보다 '불편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이다.



   생각의 방향, 가치관의 변화, 소통 가능성, 토의와 토론... 인지와 사고의 주체권이 우리 자신이 아닌 SNS와 스트리밍 채널에 빼앗겼다는 생각이 자주 들곤 했었던 요즘, 인간들이 다시 자신의 의지로 불편함을 무릅쓰고 '듣는 존재'로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은 좋은 소식이 없었던 2020, 2021년 두 해 중 가장 즐거운 소식으로 다가왔다. 굿 스피커도 좋지만, 굿 리스너는 더 좋은 세상에서 사람들이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받아들이려고 하는 시대가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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