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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로빈 Jan 08. 2021

언팔과 자기 주도권

언팔을 경험하고 내가 생각한 것들

언팔 사건의 전말

  사건이란 그 일의 당사자가 인지하는 상황 밖에서부터 일상이라는 창문에 돌을 던지며 안으로 침범해오는 것인 것 같다. 어제 내가 한 친구로부터 SNS 상의 '언팔'을 당했음을 알아차렸을 때 떠오른 문장이었다. '언팔'이란 팔로우 취소, 즉 그 친구 입장에서 내가 SNS에 올리는 정보를 더는 받아보지 않겠다는 구독취소 조치를 한 것을 말한다. 내 입장에서는 나를 팔로우하는 사람의 '언팔' 행위는 따로 알림이 오지 않아 친한 사이가 아니면 바로 알아차리기 어렵다. 매일 같이 일상의 편린을 공유하는 그 친구의 이야기가 어쩐지 보이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어, 혹시 아이디를 바꾼 것을 내가 모르고 있나 하고 확인차 그 친구의 계정을 검색해보고서야 알았다. 그 친구와 나는 소리 소문도 없이 단절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 친구로 말할 것 같으면 같은 학과는 아니었지만 같은 과 후배의 지인이자 여러 다리에 걸쳐 알고 있는 지인들과 맥이 닿아있는 친구라서 금방 친분이 생긴, 나랑은 연령 터울이 조금은 있는 아이였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 친구와 함께 소속된 그룹 채팅방이 서너 개는 되는 정도로, 이따금씩은 둘이서 따로 만나 가족에 대한 고민도 나누고 진로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는, 대학 생활에서 만난 친구들 중에서는 그래도 친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런 친구가 갑자기 나를 향한 소통을 끊어냈다고 생각하니, 섭섭함이나 분노의 감정보다는 오히려 얼얼함에 가까운 놀라움이 뺨을 붉게 만들었다.


  나 스스로 나를 판단하기에 완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말없이 친구관계를 없었던 일로 만들고 싶어 질 정도로 내가 그 친구에게 밉보인 적이 있었을까. '네가 뭘 잘못한 것 같니?' 갑자기 회초리를 들고 내 앞을 막아섰던 초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나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겨우 기억해낼 수 있는 과거의 편린들을 조약돌 살펴보듯 면밀하게 돌아봐야만 했다. 하지만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코로나 시국으로 모임을 가지지 않게 된 지 몇 개월은 족히 된 사이였고 안부라고 해봐야 SNS 상 내지는 채팅방에서 독서모임이나 필름 카메라 모임에 대한 대화를 나눈 것이 고작이었기 때문이었다.


  용기를 내어 그 친구에게 '혹시 나에 대한 팔로우를 끊었냐'는 메시지를 보냈고, 그 친구는 '그렇다'라고 대답해왔다. 일상에 지쳐 휴식을 하기 위한 대안 공간으로서 SNS를 택하는 스타일이었던 그 친구는 연말연시를 맞이해 자신이 보고 싶지 않은 정보를 솎아내어 차단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운을 뗐다. 그리고 끝내 그 보고 싶지 않은 정보에 내가 올리는 일부 정보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말도 건넸다. 그 '보고 싶지 않은' 정보라는 것은 내가 작년에 가장 많이 들은 음악의 가창자였던 모 걸그룹에 대한 내용이었다. 프로젝트성 프로그램을 통해 선발된 그 그룹은 재작년 말 그녀들이 등장한 프로그램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후 그 그룹의 활동 자체에 대한 논란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이 친구와 내가 그 그룹의 논란 문제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던 터라, 내가 그 그룹의 음악을 소비하고 그 음악을 듣는 것을 개인적인 공간에 전시하는 것이 그에게 불쾌함을 줄 수 있는 행동이라는 사실을 나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듣는 음악 정보에 대한 전시가 그 자체로 너무 받아들이기 힘든 정보로 누군가에게 전달될 수 있고, 그것이 그 사람과의 나 사이의 온라인 소통을 끊게 만드는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 자체를 나는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 친구의 그러한 입장을 받아보고서 나는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우리는 여전히 친구일까?' '내가 지금 이 친구에게 느끼는 감정은 뭘까? 지금 섭섭한가? 아니면 화가 나나?' '오프라인 소통과 온라인 소통은 이어져 있는 개념이 맞을까? 이 친구는 지금 나를 온라인 상에서 차단한 것일까, 오프라인에서도 연을 끊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이 친구에게 나를 왜 언팔했냐고 물어본 것이 과연 예의에 맞는 행동이었을까?'... 2020 코로나 사태 이후 개인의 자아의 거대한 부분을 책임지게 된 SNS 세상, 그리고 상대적으로 그 영역이 작아진 현실 세상. 두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입장에서 이러한 문제는 사실 결코 가벼운 생각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래서 내가 느끼는 거대한 의문점을 아래와 같이 세 가지 키워드로 나누어 생각해보았다.


1) 자기 전시와 사실성

   SNS 상의 소통에서는 그곳에 놓인 텍스트만 가지고 소통을 할 뿐, 그 콘텐츠가 가진 내면적 의미가 뭔지까지는 소통하지 않는다.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이 공간의 가장 큰 특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보여주고 싶은 정보가 늘 '사실'성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이는 비대면 텍스트 소통이 지니고 있는 중요한 맹점이다. 그 콘텐츠가 어떤 진심을 담고 있는지, 그 정보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결코 확인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 걸그룹의 음악을 들은 것이지, 그 걸그룹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그들의 음악을 즐겨 듣고 있음을 전후 맥락 설명 없이, 그들의 앨범 재킷 사진 한 장을 올리는 행동으로 전시했다면, 그것에 대한 해석 결정권은 그대로 나를 팔로우하는 사람에게 넘어가게 된다. 그 그룹에 대해 지니고 있는 자체적인 입장이 뚜렷한 사람에게는 나의 그러한 사진 전시가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의 추측이 곧 사실로 인지되기 쉽다. 그리고 그러한 기호성에 따른 자의적인 해석은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일일이 해명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사진을 전시하는 입장에서 타인의 응시를 감안해 자신이 전시하려고 하는 콘텐츠를 재단하고 편집해야 할까? 그것은 또 아니다. 자신이 올리는 정보와 그것이 올라가는 공간은 전적으로 게시자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SNS는 자신이 꾸민 방의 문을 열어놓고, 자신을 팔로우한 사람들이 들여다보고 갈 수 있게 만들어놓은 집과도 같다. 자신이 꾸민 방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방의 주인이 자신의 방을 눈치 보며 꾸밀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내가 무심코 올린 이미지 속 가수가 논란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었다고 해서, 내가 그 사람의 음악을 들은 사실을 숨겨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 음악과 그 가수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입장이 아예 없다면 더더욱.


2) 언팔의 자기 결정권

  나에게 내가 눈치 보지 않고 나의 일상을 공유할 자유가 있다면, 그 친구에게도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이 보고 싶은 정보만 받아볼 자유가 있는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 친구가 가진 언팔의 자유는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그 친구와 친구라는 사실이었고, 나는 그것에 기반해서 '우린 친구인데, 왜 너는 내 정보를 받아보고 싶지 않아 하는 거야'라고 생각한 점이었다. 우리가 친분으로 맺어진 사이라고 해서, 온라인 상에 올리는 자아의 형태까지 인정해달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친구가 나의 온라인 상의 모습이, 온라인에서만 보여주는 자아의 형상이 보기 싫다면, 그것을 구독 취소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마음이다. 그 사람은 나와 인연을 끊을 의도가 아니라, 그냥 SNS라는 소통방법을 통해서는 나와 소통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문제는 남는다. 언팔을 경험하는 입장에서는 상대방이 온라인 상에서만 나와 소통하지 않기로 한 것인지, 아니면 오프라인에서도 나와 아예 인연을 정리하겠다는 의도로 언팔을 택한 것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팔이라는 방식을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일방적으로 종료하게 되면, 한쪽이 불충분한 정보를 지니게 되어서 결국은 어느 한쪽이 가벼운 소통이라는 SNS의 원칙을 깨고 '깊은'대화를 시도할 수밖에 없게 되어버린다. 나에 대한 정보를 보지 않기 위해 나를 차단한 사람이 결국 나로부터 왜 나를 차단했는지를 물어보게 만드는 방법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3) 팔로우는 인간관계를 대변하는가

   팔로우 관계는 현실 속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동일한 것일까? 이것은 우리 사회가 아직 제대로 논의해본 적 없는 주제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팔로우 관계는 타인과 타인끼리의 관계, 그리고 친구와 친구끼리의 관계가 동일하게 대우받는 관계망이다. 하지만 오프라인 상에서 각각의 개인들이 팔로우 개념을 인지하는 방식은 다르다. SNS는 온라인 상의 소통일 뿐이며 타인과의 연결이나 친구와의 연결이나 그냥 소식을 받아보는 용도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언팔 행위는 그저 온라인상의 소통 단절만을 의미할 뿐이다. 이 사람들의 경우는 온라인 자아와 오프라인 자아가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고, 그것을 분리해서 생활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SNS 상의 팔로우 관계더라도 친구끼리의 팔로우 관계라면 보통의 팔로우보다는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언팔 행위는 곧 오프라인에서의 친분도 정리하겠다는 텍스트로 읽히기 쉽다. 이 사람들에게는 온라인 자아와 오프라인 자아의 연결성이 더 깊기 때문이다.


    나는 이 친구의 언팔 상황을 이렇게 이해하기로 했다. 이 친구는 온라인 자아와 오프라인 자아가 뚜렷하게 분리된 사람으로, 타인의 정보가 보기 싫어지면 차단하듯이 나를 온라인 상에서만 차단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친구의 '언팔 결정권'(내가 새로 명명한 인간의 새로운 권리 이름이다)이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내가 기분이 상했던 것은 나는 온라인 자아와 오프라인 자아를 연결 지어서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며, 그 친구의 언팔로부터 그 친구가 두서없이 오프라인에서의 나까지 끊어낸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친구가 나와 전산망을 통해 소통하기를 거부했다고 해서 그 친구가 나 자체를 거부했다고 받아들인 것은 내 자의식이며, 그 친구가 내 정보를 구독 취소했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자기 전시의 방향성을 바꿀 필요는 없다. 그것은 나의 '피드 결정권' (또 새로운 권리명)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오프라인 상에서는 예전과 같은 사이이며, 온라인 상에서는 왕래하지 않는 사이가 된 것일 뿐이다.


결말

      나는 내가 인지한 내용을 기반으로 그 친구에게 그동안 의도치 않게 불쾌감을 주었던 부분에 사과하였고 그의 선택으로 인해 그의 시야가 더욱 깨끗해지고 행복해진다면 그의 선택을 존중하겠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답변에 대해, 그는 다시 나의 입장을 생각해보고 내가 받았을 감정들에 대해서 걱정해주었다. 얼마간의 대화를 통해 감정을 소통한 우리는 다시 서로를 향한 팔로우를 시작했다. SNS의 정보 전달 메커니즘을 흉내 내서 단적으로 보자면 우리의 사이는 팔로우-언팔로우-팔로우로 이어져 결국엔 전과 똑같아 보이는 연결 상태로 돌아온 것일 뿐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하루 사이에 일어난 해프닝 속 진심을 들여다보면, 위에 적은 글처럼 많은 텍스트가 있다. 어쩌면 인간관계라는 것은 이처럼 팔로우와 언팔로우 사이에 끼인 텍스트의 층위가 아닐까?


     온라인의 인간관계, 오프라인의 인간관계, 온라인 정체성과 오프라인 정체성, 온라인 우정과 오프라인 우정,.. 2021년쯤 되면 꽤나 다각도로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저런 이분법적 인간관계가 혼재하는 세상 속에서 그 모든 것을 포용하는 유비쿼터스 우정을 나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온라인에도 있고 오프라인에도 있고 아르카디아에도 있는 그런 우정, 그런 관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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