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토리 Dec 05. 2022

기록의 시대

실수로 초기화된 갤러리 덕분에 해 본 이런저런 생각들.

구글 용량이 꽉 차서 공유문서가 안 만들어지길래, 구글포토를 정리하려고 이리저리 만졌다. 그러다가 "용량 정리" 버튼 클릭 한번에 내 갤러리 사진이 싹 날아가버렸다. 카카오톡 다운로드 등 다른 경로로 얻은 이미지는 그대로였는데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당연히 앨범의 대부분)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휴지통에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검색해보니 나와 같은 문제를 겪은 사람들이 더 있었다. 이쯤되면 구글의 문제 아닐까?



처음엔 망연자실하여 해결방법을 다급하게 검색했다. 그러나 사진 복원에 힘 쏟기엔 다른 할 일이 많았다. 우선 사진 건은 한구석으로 밀어두고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러다가 까먹었다. 일상은 잘 흘러갔다. 앨범 초기화는 생각보다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게 별 타격이 없었던 것이다.



기록의 시대이다. 사진과 동영상으로 일상의 작은 순간까지도 모두 포착하고 기록하는 것은 우리 세대의 문화이다. 인스타그램 스토리에는 그날 먹은 것, 입은 것, 누군가와 만난 것(태그 필수) 등 가짓수를 셀 수도 없이 다양한 종류의 일상이 실시간으로 올라온다. 누군가는 나한테 "난 스토리를 위해 사는 것 같아."라고 말했다. 스토리에 올리기 위해 평소 같으면 지나칠 것들도 일일이 사진으로 남긴다. 덕분에 앨범 용량은 급속도로 비대해진다. 이렇게 자세하게 쓸 수 있는 것은 나 또한, 스토리를 위해 사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스토리를 통한 일상 공유의 문화를 매우 적극적으로 영위하는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단지 사진으로 찍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멘트를 덧붙여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지인들에게 편리하게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모른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사진을 찍고 포스팅하고 보관함에 들어가 다시 보며 내 일상을 복습하기도 한다.



기록을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기록에 집착하는 순간부터는 주객전도가 된다. 일상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기록이 일상이 되는 것. 전시회에 다녀와 인스타에 올리는 것을 넘어 인스타용 전시회가 생기는 것. 이를 바라보는 관점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인스타그램 맞춤형으로 디자인된 것들을 즐기는 사람들은 거부감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 또한 하나의 문화라고 볼 수 있다. 나는 개인적인 감정으로는 인스타용 무언가를 좋아하지 않는다. 인스타 기능을 활용하여 소소한 일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아무 의미도 없는 것에 억지로 인스타용 의미를 갖다붙이는 건 싫다. 지금의 나는 딱 내가 추구하는 가치대로 인스타를 활용하고 있어 만족스럽다.



초기화된 갤러리는 내 과거를 나타낸 거대한 무언가였다. 초기화되어도 내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대한 기록이 사라졌을 뿐. (심지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다. 구글포토에는 그 사진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휴대폰 갤러리에서만 사라진 것이다.) 또한 기록을 꼭 이미지 파일로 남길 필요도 없다. 다이어리에 일기를 써서 남길 수도 있고, 아니면 현재를 충분히 즐기고 내면화하여 마음 깊이 남길 수도 있다. 사실 진정으로 유의미한 기록은 마음에 남기는 기록이리라.



구글포토 사고(?) 덕에 나에게 정말 의미있고 진정으로 오래 남는 기록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유형의 기록으로 남길 필요는 없으며, 남기는 과정을 즐기면 그만인 것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렇게 기록하고 내면화한 결과로서의 내 모습이다. 기록이 나는 아니지만, 내가 기록이다.

작가의 이전글 감사한 순간의 속기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