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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근육쭈꾸미 Mar 24. 2022

03. 코로나 투병 일지

무증상? 가벼운 감기? 아니, 너무 아픈 바이러스

 나는 백신 2차 접종자이다. 백신을 맞으면 덜 아프다고 한다.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고 약국에서 약을 타왔을 때 (무료였다. 우리나라 의료보험 만세!) 과연 내가 그렇게 아플까? 시덥잖은 생각을 했다. 고작해도 인후통, 두통이 전부겠지.


 하지만 내 예상대로 증상이 끝났다면, 이런 거창한 후기를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얼마나 아팠는지 여러분께 생생히 들려주겠다.


코로나 증상


 첫째 날.


 아래의 사진은 약국에서 받은 약이다.   


 나는 병에 잘 걸리지 않는 무식하게 건강한 체질이라, 약국에서 약을 처방받는 것 자체가 어색했다. 내가 비실비실대며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들어가니 약사가 대충 뭔지 알겠다는 눈빛을 지었다. 후다닥 약을 마련하고 나는 집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식후 30분. 약봉지를 꺼냈는데 약의 종류가 엄청 많았다. 


 이걸 입에 한번에 다 넣는다고?


 넣었다. 의외로 맛있는 알약도 있었다.


 나는 약을 먹고 비대면 수업을 시작했다. 인후통으로 인해 목이 까끌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느덧 대면보다 익숙해진 줌(ZOOM)을 켜고 필기를 하는데, 갑자기 모니터 주변이 휘청거렸다. 흔들린 것은 내 시야였다. 갑작스레 고층 빌딩을 올라간 것처럼 멀미가 나고 속이 울렁였다. 


 누가 내 머리를 잡고 악의적으로 손바닥을 강하게 문지르는 감각이었다. 어지럼증 때문에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결국 (교수님께 죄송하지만) 수업을 튼 채 이불에 가서 누웠다. 단순히 어지럼증이라고 생각했는데, 점차 두통도 밀려왔다. 전두엽이 골치 아픈 일을 떠맡은 것처럼 지끈거렸다. 도저히 일상 생활이 불가능했다. 


 목은 침을 삼킬 때마다 사포로 벅벅 긁은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가래가 끓어서 목소리도 형편없이 변했다. 어지러움, 두통까지는 견딜 만 했는데 인후통만큼은 짜증날 만큼 힘들었다. 괜히 나에게 코로나를 옮긴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그때 마침 아빠가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많이 아프나"


 무뚝뚝한 문자에 솔직한 내 증상을 설명했다.


 "목이 너무 아프고, 머리가 어지럽고 지끈거려요"

 "나도 그랬다. 나는 기침도 더 많이 나고 몸도 아팠다."

 

 나에게 어떤 반응을 기대해서 그런 문자를 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알겠다고 했더니, 병원으로 가서 자기 약 좀 타오라고 말했다. 


 "저도 코로나 양성인데요."


 그러자 문자가 뚝 끊겼다. 본인이 아픈 걸 자랑하고 싶어서 그런 문자를 한 것은 아닐테고, 내가 양성인 걸 알았을 텐데 웬 병원가서 약을 타오라니...? 나도 격리 상태라는 사실을 몰랐던 걸까.


 첫날은 머리와 목이 많이 아팠다. 




 진짜는 둘째 날부터였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낌새. 


 목을 만졌는데 가만히 있어도 통증이 느껴졌다. 사포로 문지른 수준이 아니라 송곳으로 찢은 듯한 고통이었다. 얼른 물을 마셨다. 저혈압 환자가 갑자기 일어서면 눈앞이 까맣게 변하며 움직일 수 없다고 한다. 나도 그런 느낌으로 머리가 아파오고 시야가 메스껍게 덜컹였다. 물을 마셨더니 위장에서 요동쳤다. 헛구역질이 나왔다. 뭔가를 뱉을 것 같은 구토감이 꺽꺽 밀려와서 책상을 부여잡고 한동안 엎드려 있었다.


 몸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방이 따뜻한데도 불구하고 눈 한복판에 있는 것처럼 추웠다. 솜이불로 기어들어가 아무리 보온을 해봐도 뼈가 시린 느낌을 치울 수 없었다. 관절 사이로 바람이 드는 것 같았다. 손가락을 살짝 움직였는데 어긋난 톱니바퀴가 끼릭끼릭거리는 것처럼 손등부터 마디까지 파랗게 쑤셨다. 몸을 움직이기만 해도 천 개의 바늘이 등을 쿡쿡 찌르는 미약하고도 예민한 고통이 느껴졌다. 어깨죽지와 척추, 그리고 손이 유독 아팠다. 나는 얼마 못가 다시 이불에 눕고는 완전히 항복했다.


 코로나는 더럽게 아팠다.


 내가 게으른 탓인지 모르지만 자꾸만 잠이 왔다. 누워서 자고 싶어도 두통과 메스꺼움, 인후통으로 인해 편히 있을 수 없었다. 이 와중에 비대면 수업이 있었다. 노트북을 이불 위로 들고와 꾸역꾸역 출석을 했는데 몸이 너무 아파서 차라리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이크를 켜고 출석 대답을 했는데 내 목소리가 변성기 온 남학생처럼 거칠었다. 아, 정말 싫었다.


 코로나에 걸려본 오빠에게 연락했다. 너무 아프다고.


 오빠는 코로나를 경미하게 앓고 넘어갔다. 나에게 따뜻한 물을 마시고 관리를 잘 하라고 했다. 엄마도 날 걱정하여 유자차를 타줘서 줬다. 유자차의 목넘김은 끔찍했다. 무언가 식도에 걸려 까끌까끌한 부분을 한계까지 긁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엄마의 정성을 모른 척 할 수 없어 마시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나보고 면역이라며 깍두기와 삼겹살을 구워줬는데... 여기서 말을 말겠다.


 이튿 날을 견디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코로나의 약한 맛, 오미크론에 걸려도 이토록 아픈데 '찐' 코로나에 걸렸던 사람들은 얼마나 아팠을까. 


 무엇보다 힘든 것은 인후통이었다. 물을 마시면, 물이 마치 수천 개의 가시가 되어 식도를 찢어내리는 느낌이었다. 물을 마시지 않아도 아팠다.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고 정신이 진공 상태처럼 울려서, 아예 하루를 삭제해버리고 싶었다. 또한 여기에 월경도 겹쳤기 때문에 무척 스트레스를 받았다. 




 셋째 날.


 아침에 일어나니 목이 "일어났구나?"하며 반겨주는 기분이었다. 목젖에 피가 나는 듯한 통증에 당장 물을 들이켰다. 몸이 시리고 욱신거리는 것도 여전했다. 어제의 아픔이 10이었다면 셋째 날은 7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배가 고프지 않고 입맛도 없어서 밥을 굶으려 했지만, 엄마가 억지로 끼니를 챙겨줬다.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 내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객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카톡으로 코로나 증상을 묻는 친구들에게


 "개아파"

 "어떻게 아픈데?"

 "그냥 죽을 것 같아"


 라고 겁을 심겨주었다. 친구들은 덜덜 떨면서 조심하겠다며 다짐을 했다. 그 모습이 조금 귀여웠다. 하지만 요단강까지는 아니지만 정신 나갈 정도로 아픈 것은 맞았기에


 "조심해"


 덕담을 했다.


 자가격리 3일차. 방이 조금씩 더러워졌다.


 조금은 살만해졌는지 물티슈로 방 전체를 닦고 청소를 했다. 방안에만 갇혀 있는 생활이 그리 답답하지 않았다. 비대면 수업을 듣다가 앓아눕고, 책이나 휴대폰을 보다가 글을 적는 삶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자가격리는 내 천직에 맞아보였다. 다만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외로웠다.


 예전에 이런 질문을 받은 적 있다. 


 1년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고 살아서 10억 VS 그냥 이대로 살기


 나는 전자를 선택했다. 원체 외로움을 덜 타는 성향이라 1년 정도는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경험을 하지 못한 무지에서 기인한 선택이었다. 자가격리 3일 동안 사람을 만나지 못했는데, 만약 이것이 1년 동안 이어진다면 언어도 까먹고 완전히 미치거나 우울증에 걸렸을 것 같다. 좋으나 싫으나, 인간은 밥알맹이처럼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것이 우리는 설명하는 말처럼 느껴져 웃음이 났다.



 넷째 날.


 목을 제외한 모든 상태가 괜찮아졌다. 오로지 인후통만이 증세가 더욱 심각해졌다. 목소리가 딴사람처럼 완전히 가라앉고 숨만 쉬어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느껴졌다. 나를 불쌍히 여긴 엄마가 새로 약을 지어왔다. 이번에도 약값은 0원! 대한민국 의료보험 만만세!!


 하지만 새 약을 먹어도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기침도 많아졌다. 안그래도 인후통으로 상처가 난 편도에 기침이 소금을 뿌리는 기분이었다. 전화를 할 때도 목소리가 쇳소리처럼 났다.


 어릴 때부터 나는 목이 약했다. 이번에 코로나가 내 목을 제대로 공략한 모양이었다. 아빠는 상태가 나아지고 있었는데, 나만 악화되는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아픈데도 일상은 멈추지 않고 흘러갔다.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고, 글을 쓰고, 프로젝트에 지원하고, 동아리 면접을 보며, 학생회 일을 하고, 공부를 해야 한다며 스트레스 받는다. 



 '위드 코로나'



 우리 아빠가 그랬듯, 증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검사를 받지 않은 채 일상을 지속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 코로나는 너무나 일상적인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코로나로 인해 경제와 산업이 멈추는 것은 그만두어야 한다.


 그 말을 인정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위드 코로나'가 뼈 아프게 들린다. 코로나에 걸린 대한민국 20%의 확진자 중 한 사람으로서 말한다. 나는 코로나와 함께 살고 싶지 않다. 코로나는 치료해도 다시 걸릴 수 있는 바이러스이다. 나는 4일 내내 너무 아팠다. '위드 코로나'로 인해 보고되지 않은 확진자와 밀접접촉자가 대중에게 섞여든다면,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고통에 시달린다는 뜻이겠지. 내가 두 번 세 번이고 코로나에 더 확진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위드 코로나'와 함께 방역을 더 철저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가검사키트가 시중에 풀리면서, 자신이 양성인걸 알아도 공식 검사를 받지 않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또한 격리 중인 확진자가 자리를 이탈해도 신고만 안 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직 개인의 양심에 맡기는 방역인 것이다. '위드 코로나'는 코로나와 산다는 뜻과 함께 코로나를 일절 해방시킨다는 뜻과 동일하게 보인다. 


 우리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하지만 이것이 방역을 아예 포기한다는 것으로 이어져선 안 된다. 스스로 더 조심하며 배려하는 삶을 나아가도록 하자. 코로나가 가벼운 감기라고 여겼던 분들은 내 글을 읽고 생각을 바꿔주길 바란다.


 '위드 코로나'도 이제 그만.


 나는 코로나로 더 이상 아프지 않은 세상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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