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것이냐를 설명하기 위해서는이것을 미리 고백할 필요가 있겠다. 사실 나는 꽤 오래전부터 피어싱에 대한 갈망을 품고 살았다. 학생 시절 밴드 활동을 하며 일본 인디밴드의 스타일을 동경했으니뻔한 취향일지도 모르겠다. 왼쪽에 세 개 오른쪽에 하나. 양쪽 귓불을 포함해서 고작 네 개의 피어싱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매니악한 갈망을 품은 사람치고는 꽤나 소극적이긴 했지만.
처음 귓불을 뚫은 것은 스무 살 때였다. (사실 그보다 훨씬 전에 호기롭게 다른 부위에 피어싱을 해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생각보다 너무 아프고 불편해서 바로 빼버렸다. 부위는 비밀. ) 처음 귀를 뚫은 장소가 주안이었는지 부평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귓가에 울리던 '탕!!' 하는 총소리와 아릿한 감각만큼은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러고 반년쯤 지나서였나, 난데없이 귓바퀴를 뚫고 싶어졌다. 원래 연골 피어싱으로 할 생각이었는데, 막상 숍에 도착하니 아무리 연골이라고 해도 뼈를 뚫기는 무서워서 귓바퀴의 살을 뚫었다. 그쪽은 살이 많이 얇은가 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어싱과 함께 살점이 떨어져 버렸다. 조금 아래쪽을 한번 더 뚫었는데 또 떨어져 나갔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로 살 뚫기도 무서워졌다.
다시는 귀를 뚫지 않겠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이너컨츠가 유행하기 시작해서 따라 뚫었다. 간 김에 귓바퀴도 뚫고 싶었는데 안경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말에 또 멈칫했다. 이너컨츠는 생각보다 아프지도 않았고, 결과물이 꽤 마음에 들었지만 내가 처음부터 뚫고 싶은 자리는 아니었다.
그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민아언니 / 귀 한가운데 저 피어시이 이너컨츠다
연골이 아무는 데까지의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린다는 것을 깨달아갈 때 즈음 대학교를 졸업했다. 사회인이 된 이후로는 정신이 없어서 피어싱에 대한 것은 까맣게 잊었다.
진짜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니 무섭기보다 허무했다.
그러다 덜컥 유방암 진단을 받은 것이 스물여덟 살.
수술 전 MRI 검사를 위해서는 금속으로 된 장신구를 모두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반지부터 하나씩 빼며 오랜만에 내 귀에 피어싱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몇 개 안 되니 빼는 것도 금방이었다. 항상 겁이 많은 나였는데 진짜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니 무섭기보다는 허무해졌다.
손바닥에 놓인 귀걸이 네 개.
그동안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까지 겁을 잔뜩 집어먹은 결과물이 이것이구나.
근데 내가 피어싱 일기에 이런 얘기까지 왜 쓰고 있지? 아이고. 이러다 우리 까비 처음 집에 온 날이나, 눈 온 날 구두 신고 나가다가 미끄러져서 넘어진 날이나, 집에 귀뚜라미가 들어와서 근처에 사는 사촌 동생에게 SOS를 했던 날(TMI지만 그 동생은 이른 나이에 청약 당첨이 되어 누나는 30대 중반까지도 이루지 못한 내 집 마련의 꿈을 달성하고 최근 벤츠를 계약했다. 부러운 녀석. 차 나오면 한 번만 태워주라...)의 이야기까지 다 쓰겠다. 이미 썼군. 의식의 흐름대로 쓰는 글은 이래서 문제라니까?
현재 시점으로 돌아오자. 나는 연말에 암 완치 판정을 받고, 새해가 밝으며 34살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너컨츠에 피어싱을 한 것이 23살이었으니 꼬박 11년이 흘렀구나. 우와 세월 졸라 빨라... 솔직히 코로나 시국에 지하상가에 가는 것도 썩 내키지 않고 귀찮고 너무 추웠지만 미루고 싶지는 않았다. 그간 귓바퀴에 피어싱을 하겠다 생각만 하고 차일피일 미룬 것이 무려 11년이다. 여태까지 한 것처럼 또 미루면 45살이겠군. 그 생각을 하니 정신이 번쩍 든다. 롱 패딩을 걸치고 부평 지하상가로 향했다. 오늘은 1월 2일이다. 사실 1월 1일만큼 의미가 있어 보이는 날짜는 아니지만, 연초의 들뜬 분위기가 남아있는 점에서는 합격이다. 여기에는 혹시 점찍어둔 피어싱 숍이 1일에 쉬면 곤란하니까-라는 나름의 전략적인 이유를 하나 더 대 본다.
지하철 1호선과 인천지하철 1호선이 교차하는 부평역은 전국에서 출구가 가장 많은 역이라고 한다. 인천시 부평구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한때 눈을 감고도 원하는 곳을 찾아가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 적도 있지만, 그것도 다 옛날 일이다. 핸드폰에 시선이 고정된 채로도 복잡한 지하상가 길을 쏙쏙 찾아가는 어린 친구들이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분수대 양 옆의 넓은 기둥에 두리번거리는 어리숙한 언니 하나가 비친다. 세월 뭐냐 진짜.
세월이 무엇인지 아픔이 무엇인지 아직 알 순 없지만~
세월이라는 단어가 떠오른 나의 머릿속에는 꼭 이 노래가 함께 재생된다. 걸으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건 너무 촌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나오는걸 어떡해?지금 나의 모습이 딱, 내가 절대로 되고 싶지 않았던 어른의 모습인 것만 같다. 그래도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