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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 Aug 02. 2020

탁발의 추억

20대 유방암환자의 여행과 삶_라오스 여행_루앙프라방

눈을 다 뜨지도 못하고 숙소를 나섰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새벽이었다.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시골길이지만 별로 무섭지는 않았다. 내가 용감해진 것은 아니고, 아마 루앙프라방 전체에 깔린 경건한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라오스는 전 국민의 95%에 달하는 인구가 불교를 믿는 나라이다. 그리고 라오스 남자들은 약 1년 정도 스님으로 절에서 생활할 의무가 있다고 한다. 어딜 가나 절도 많고 스님도 많다.


불교 국가에 온 김에 탁발을 직접 보고 싶었다. 탁발은 스님들의 행렬에 음식 등을 공양하는 것이다. 라오스 뿐 아니라 미얀마, 태국 등 불교문화가 뿌리 깊은 국가에서는 드문 문화가 아니라고 한다. 시주할 것을 미리 준비하지 않았으므로 길거리 노점에서 대나무 통에 담긴 찰밥을 샀다.

 

"하우머치?"
"사만 낍"


라오스에 머문 열흘간 수많은 사원과 순박한 미소들을 만나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불교적인 도시인 루앙프라방에서 가장 세속적인 상인을 만났다. 상인은 찰밥 두 통을 내밀며 4만 킵이라고 했다. 이게 비싼 건지 싼 건지 감이 안 잡힌다. 비싸다고 해도 부처님에게 시주할 것을 흥정해서는 안 되겠지? 어떻게 할지 조금 고민하고 있자니 상인은 1개에 2만 킵에 주겠다고 선심을 썼다. 잠깐만, 내가 바보야?

슬쩍 기분이 나빠진 나는 대답도 않고 돌아섰다. 세 걸음 떨어진 옆 노점으로 가서 얼마냐고 물어보니 1개에 1만 5천 킵이라고 했다. 찰밥 통의 모양도 똑같았기에 더 저렴한 옆 노점에서 두 개 사기로 했다.


돈을 꺼내는데 저 뒤에서 “퉤퉤!”하고 침 뱉는 소리가 났다. 그는 나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몇 번 더 침 뱉는 소리를 냈다. 어이가 없었다. 만 킵은 우리 돈으로 천 원이 조금 넘는다. 심지어 나는 깎아 달라고 흥정을 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사람을 바보 취급하고 침까지 뱉다니. 불경하!

 

문제의 찰밥과 시주하는 자리

둥근 대나무 통을 여니 찰밥에서 따뜻한 김이 올라왔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기다리니 저 멀리서 주황색 승복을 입은 탁발 행렬이 다가왔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찰밥을 뜯어 일렬로 걸어오는 스님들의 시주 바구니에 넣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한 탁발은, 공양을 하는 사람이나 스님이나 서로 경건한 자세로 천천히 진행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해 보니 무척 빠르게 지나갔다. 라오스의 스님들은 결혼은 하지만, 다른 이성과는 옷깃조차 스쳐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 시주할 때도 서로 닿지 않도록 신경 쓰며 빨리 지나간다. 나도 혹시라도 손이 닿을까 봐 시주 바구니에 밥을 던지다시피 넣었다. 떼고 넣고 떼고 넣고.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이고 있는데 키가 작은 동자승의 시주 바구니 속이 보였다. 바구니에는 다양한 물건이 들어있었다. 캔 음료와 과자, 사탕, 심지어 현금까지. 분명 정성스럽게 준비한 시주일 텐데, 보고 나서 마음이 따뜻해지기는커녕 걱정이 앞섰다. 밥과 돈이 함께 들어있다니, 이거 위생적으로 괜찮은 걸까?

분명 경건한 마음으로 탁발 시주를 하러 왔다. 하지만 찰밥을 사는 것부터 시주하는 것까지, 어쩐지 번뇌만 한가득하다.

 



찰밥이 다 떨어지면 앉아있던 자리에 밥통을 두고 돌아가면 된다. 어느새 내 밥통도 텅 비었다. 밥통을 두고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구석에 서서 탁발 행렬을 마저 바라보았다. 어둡던 하늘이 서서히 파랗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찰밥을 팔던 상인들은 하나둘 노점을 접고 돌아갈 준비를 했다. 선선한 새벽바람에도 불구하고 그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다.


문득 아까 내게 찰밥을 비싸게 팔려고 한 상인은 오늘 준비한 것을 다 팔았을지 궁금해졌다. 나는 단돈 천 원을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 굳이 옆 사람에게 물건을 사야 했을까? 어쩌면 천 원 더 쓰고 기분 좋게 상인의 그 날 장사를 ‘개시’ 해 줄 수도 있었던 것 아닐까? 스님에게 밥을 나눠 주는 것은 신성한 것으로 생각하고, 생계를 위해 이른 새벽부터 밥을 지었을 상인에게는 흥정할 생각부터 한다니. 불경한 것은 침을 뱉은 그였을까, 아니면 나보다 적게 가진 사람에게 조금도 손해 보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친 나였을까.



더는 스님들의 행렬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바라보다가 숙소에 돌아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리고 낮잠을 실컷 잤다. 새벽에 생각을 많이 한 덕분인지 아무 꿈도 꾸지 않았다. 오후에 일어나서는 스쿠터를 타고 꽝시 폭포까지 달렸다. 속도를 좀 내보고 싶은데 자꾸 길 한가운데에 소가 서 있는 바람에 실컷 달릴 수가 없었다. 도로에서 휴식을 취하는 송아지도, 느리게 가까워지는 염소 떼도 모두 평화로워 보였다. 내일 아침에도 이 길에는 또다시 탁발 행렬이 지나겠지.


다음 날 일정을 생각하며 여비를 계산하다가 봉투에서 돈을 조금 더 꺼냈다. 내일은 그 노점을 다시 찾아가서 찰밥을 살 작정이다. 두 개 사만 킵을 다 내고.


*20대 젊은 암환자의 삶과 여행을 담은 신간도서 

<낙타의 관절은 두 번 꺾인다>

알라딘 등 인터넷 서점에서 만나보실 수있습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47403268


*네이버 블로그에 여행기/ 에세이 출판 일기/20대 유방암 투병일기를 연재 중입니다. 놀러 오세요~

https://effy0424.blog.me/222046256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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