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슬 Dec 31. 2020

나는 이런 탐정이 보고 싶었다

영화 <에놀라 홈즈> 

 


내게 탐정은 언제나 셜록 홈즈였다. 소설, 책, 드라마, 영화 모든 장르의 셜록 홈즈를 보며 자랐다. 셜록 홈즈의 뛰어난 추리에 반해, 그를 닮기를 원했다. 셜록을 떠올리면, 무표정의 시니컬한 웃음이 생각났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똑똑한 셜록의 차가운 아우라가 멋있어보였다. 이성과 친절함은 대립되는 게 아닌데, 양자택일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 오류를 나는 많은 후회를 남기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에놀라 홈즈'는 셜록 홈즈의 여동생 '에놀라 홈즈'의 이야기다. 에놀라는 어느 날 사라진 엄마를 찾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그 과정에서 시대의 문제를 알게 되며, 사건을 해결해나간다.


영화는 메시지를 에둘러 빙빙 표현하지 않는다. 대놓고 문제를 꼬집는다.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인 서프러제트를 설명하고, 가부장제를 비판한다. 에놀라 홈즈는 직설적이지만, 사실 꽤 친절하고 다정한 영화다.



에놀라는 움직이는 여성이다. 에놀라는 자신의 의지로, 움직인다. 에놀라의 엄마 '유도리아'는 에놀라를 '여성'이 아닌 '사람'으로 키웠기 때문이다. 서프러제트를 이끌며 다이너마이트를 제조한 유도리아는 진취적인 여성이다.


유도리아가 키워낸 에놀라도 주체적인 여성이다. 에놀라의 삶에 십자수는 없다. 대신 주짓수, 사격, 암호 해독, 철학이 있다. 덕분에 에놀라는 신부가 아닌 탐정이 됐다. 유도리아의 강인함과 당당함은 에놀라에게, 그리고 화면 밖 내게 전해졌다.


에놀라는 전형적인 탐정이 아니다. 사회성이 부족해, 인간관계에 서툰 냉혹한 탐정이 아니다. 밝게 웃으며 카메라 넘어 관객에게 말을 건다. 셜록처럼 감탄이 나오는 치밀한 추리가 아닌, 에너지에 반하게 된다. 친절하고 다정한 탐정에 반해, 에놀라를 응원하게 된다.


옷을 갈아입으며, 젠더 관념을 꼬집는 것도 짜릿하다. 에놀라에게 중요한 것은 외면이 아닌, 탐정이라는 정체성이다. 자전거가 에놀라에게 이동의 자유를 준 것처럼, 코르셋은 이동과 생존의 자유를 줬다. 코르셋을 착용해 추적을 피하고, 탐정의 칼을 막아줬으니까.



에놀라의 이동을 멈추게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튜크스베리다. 꽃을 좋아하는 잘생긴 튜크스베리는 문젯거리다. 하지만 에놀라는 튜크스베리를 돕는다. 그에게 연애 감정을 느껴서가 아니다. 단지 그것이 옳기 때문이다. 에놀라는 자신이 튜크스베리보다 파워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에게 힘이 있는 자가 힘이 없는 자를 돕는다는 정의는 당연하다. 그래서 자신의 이동을 잠깐 멈춘다. 에놀라는 타인을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자신과 타인을 위한 일이 분리된 게 아님을 알고 있다.


모든 사건이 해결된 후, 그는 에놀라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우리의 에놀라는 웃으며, 제안을 거절한다. 그와의 로맨스를 선택했다면, 그저 그런 탐정 영화가 됐을 거다. 그러나 에놀라는 건물 안에 그를 남겨둔 채, 거리로 나간다. 탐정 데뷔전을 멋지게 치렀으니, 이제 탐정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니까. 다정한 이별 인사를 했을 뿐, 에놀라의 이동은 멈추지 않았다.



평평한 서사라고 생각할 때쯤이면, 약간의 반전이 나타난다. 셜록 홈즈는 자신의 여동생을 탐정으로 존중한다. 탐정으로서의 가이드라인을 던져주며, 에놀라를 지지한다. 자신보다 먼저 사건을 해결한 에놀라를 떠올리며, 호쾌하게 웃는다. 튜크스베리 또한 진보적인 남성이다. 남녀의 평평한 대립만이 영화의 전부가 아니다. 이 영화는 처벌이 아닌, 이해로 나아간다.


여성 간의 갈등도 구석구석 심어져 있다. 최고의 신부를 길러내는 기숙학교의 선생, 여성 참정권을 영국의 위기로 생각하는 튜크스베리의 할머니, 엄마의 다이너마이트를 발견했을 때 혼란을 겪는 에놀라, 숨어있는 유도리아를 신고하는 숙소 주인까지. 영화는 여성 간의 차이와 갈등을 보여준다. '여성은 도덕적이고, 지적이야. 서로를 돕는 성숙한 사람이지.'라는 단순한 젠더 관념을 깬다.



이제 탐정을 떠올리면, 에놀라 홈즈가 함께 생각난다. 누구보다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타인을 생각할 줄 아는 탐정. 셜록을 반전시킨 게 아니라,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 여성 탐정이다. 다정함이 묻어난 똑똑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 어딘가에 스며들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변화시킨다. 에놀라를 생각하면, 자연스레 미소가 피어난다. 탐정으로서의 첫걸음을 멋있게 띈 에놀라의 다음 사건이 기다려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도 프롬에 갈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