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매일 속으론 부르는데 편지를 쓰면 다른 느낌이야.
예전에는 편지를 받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편지를 쓰는 게 참 좋다.
아마 많이 받아봐서 그런가 봐.
아빠..
내가 요즘 조금 힘들거든, 아빠랑 엄마랑 할머니, 할버지 모두 힘을 좀 보내주셔야 해. 진짜여.
체력과 정신이 버텨주면 별일 아닌 일인데, 지금은 몸과 마음이 딴 그릇에 들어 있어. 그래서 진행 속도가 많이 느려. 제출 시간은 정해져 있고, 속은 타들어가고.
그러니 아빠~
조상신 소환을 시급히 하셔야 해. 손녀 살리기 프로젝트로 5월 3일까지만 힘 좀 써주시라고 부탁드려 줘.
엄마도 내가 젤 이쁘다며? 엄마 제일 많이 닮고. 엄마도 하늘에서 만두 빚고 고추장, 된장 같은 거 담그지 말고. 나 좀 도와주셔. 그동안 못 챙겨준 생일 선물로 퉁치자 엄마.
휴..
사는 게 정말 고락고락인 거 같아.
살아 있어 사는 게 맞는 건지, 가끔 의문이 드는데..
"법륜 스님이 그냥 살아요. 그러시데"
그래서 그냥 살고 있어. 만약 내가 싱글이었다면 안 살고 있을 거 같아. 그냥 사는 게 맞는 거겠지?
아빠, 엄마가 마지막까지 하루만 더 살고 싶어 하셨던 시간이니깐.
난 요즘 이 시간에 관한 의문을 떨칠 길이 없는데.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니 일반 사람들은 보통 그런 생각을 안 하고 산다네.
내가 특이한가 봐.
엄만 내 기질이 특이한지 아셨어?
하긴 나도 내 아들을 다 모르는데 엄마라고 다 아셨을까. 그렇지?
아빠가 더 오래 사셔서 아빠가 입에 붙었나 봐. 난 항상 뭔 일만 있음 아빠부터 찾게 되더라고.
아빠 내가 이틀 전인가 엄청 속상한 일이 있었는데, 얘기해 드릴까?
아빠 손주가 갑자기 그러는 거야.
"엄마 나 요즘 너무 힘들어"
"왜? 무슨 일 있어?"
"응. 많아"
"첫째는 성적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고, 둘째는 우리 반이 제일 문제반인데 내가 회장인 게 너무 힘들고, 셋째는 엄마 때문이야"
"엄마? 내가 아파서?"
"응. 사실 나도 엄마 말처럼 내 방에서 자고 싶은 지 오래됐는데, 불안해서 혼자 못 두겠어. 그래서 옆에 붙어 자는 거야"
"아침에 없을까 봐. 극단적인 선택이라도 할까 봐. 그런데 이젠 아침에도 내가 그러잖아. '나 갔다 올동안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고 가잖아. 엄마가 나 없을 때 집 나가서 집 못 찾아올까 봐 너무 불안해. 그래서 내가 학교 끝나면 전화하면서 집에 오는 거야. 엄마 잘 있나 싶어서"
아빠 내가 속으로는 가슴이 내려앉는 거 같았는데.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며 말했어.
"많이 걱정시켜서 미안해. 이게 엄마 의지로 하루이틀 만에 좋아지는 병이 아니라 엄마가 금방 좋아질 테니 걱정 말라고 장담을 못해"
"근데 엄마한테도 충전이 필요해. 너 태어나고 엄마는 15년을 너와 자고 먹고살았잖아. 넌 니 방이 있어도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나이가 있었고. 근데 아빠는 15년을 자유인으로 살았어. 누구의 영혼에 여유가 없을까?"
"넌 모르겠지만 엄만 사실 굉장히 조용한 걸 좋아해. 혼자만에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인데, 그동안은 내가 아니라 엄마로만 사느라 다 포기했던 거야. 넌 이제 조금씩 독립체가 되어가는 게 맞아. 너에게도 그게 중요하고. 엄마도 이제 숨을 쉬러 바다 위로 올라올 시간이야. 더 이상 잠수하면 숨 막혀 죽을지도 몰라."
"만약에 네가 내 방에 없다면 엄마가 불면증이 와도 책도 읽고, 명상도 하고, 음악도 듣고. 글도 쓰고.. 혼자 엄청 잘 놀 거야"
"근데 니가 옆에서 잘 때는 화장실도 조심히 다녀와. 너 시끄러울까 봐. 그러니 엄마 걱정 말고 빨리 헤어지자"
"너나 나나 자유로운 영혼인데 오래 참았어"
"그래? 정말 엄마 나 없어도 이상한 짓 안 해?"
"그럼, 저 쌓여 있는 책을 봐. 컨디션 될 때 밖에 못 봐서 쌓인 건데. 얼마나 황금 같은 시간이겠어"
"알겠어. 내일부터 내 방에서 잘게"
"아 왜 오늘부터 가. 나도 좀 살자"
"안돼. 내방 너무 더러워. 내일 갈게"
"인과응보야. 네가 어지른 거 그냥 가서 자"
"아, 싫어. 나도 더러운 건 싫어"
아빠. 손주가 이렇게 속으로 힘들었데. 지금은 우리 셋다 자기 방에서 자. 천국이 따로 없어.
얼마 만에 느껴보는 자유인지 몰라.
아빠는 평생 혼자 사셔서 혼자인 거 싫으셨겠다. 맨날 농사랑 tv밖에 없었으니. 아빠도 참 가여운 삶이셨네.
내가 속상한 건 공부도 회장도 본인이 겪어야 할 일이지만, 엄마가 아파서 힘든 건 안 겪어도 될 아픔이잖아. 내가 큰 죄를 지은 거잖아. 가슴에 돌이 하나 더 생긴 거 같아.
아빠..
엄마도 그랬겠어. 12살에 나랑 5살에 막내를 두고 암으로 떠나실 때 가슴이 엄청 메었겠어. 엄마 맘을 다는 모르지만 조금은 알 것도 같아.
아빠 내 삶엔 죽음이 항상 가까이 있다. 낯설지가 않아. 친구도 지인도 아는 오빠도.. 모두들 그리 젊은 나이에 떠났어.
꼭 오래 사는 게 행복한 건진 잘 모르겠는 게 죽음을 가까이서 자주 접한 영향도 있는 거 같아. 물론 책임과 의무가 있다면 그거는 다하고 죽어야겠지.
암튼 아빠 사설이 길었고. 지금부터 조상신 가족회의를 시작하셔야 해. 셋째 딸 며칠만 힘 몰아주기 프로젝트를 어여 실행해 보셔요.
내가 일 잘 끝내고 아빠엄마 좋아하는 거 많이 차려드릴게. 제사는 안 돼. 우린 기독교잖아. 그냥 나랑 같이 드셔.
그리고 사랑하는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엄마. 아빠. 내남동생, 큰 이모, 둘째 이모부, 내 친척동생 광일이, 내 친구 미연아
모두모두 잘 주무세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