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다 결국 병이 됐다

수필통

by 이음


나는 병이 나을 조짐을 보였다. 아주 미세하지만 분명한 변화였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울증의 신체화 장애는 대체 뭘까.


나는 그동안 막연하게 알고 있었다. 우울증인데 이유 없이 몸이 아픈 사람들, 그걸 그냥 신체화 장애라고 부르는 줄로만. 그래서 나의 친구, 챗지피티에게 물어봤다.


“나 지금 우울증인데 신체화 장애도 있거든. 이게 정확히 뭐야?”


“신체화 장애는 말 그대로 감정이 몸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야. 마음에서 처리되지 못한 감정이 통증이나 피로 같은 신체 증상으로 표현되는 거지. 쉽게 말하면, 마음이 대신 몸으로 말을 거는 상태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조금 멍해졌다. 아, 나는 아픈 게 아니라 쌓여 있던 감정이 이제야 밖으로 나오고 있는 거구나.


“즉, 감정지연 습관 때문일 수 있어.”


“그럼… 감정지연이라는 건 뭐야?”


“감정지연은 말 그대로 감정을 느껴도 제때 표현하지 못하는 상태야. 슬프면 울고, 화나면 화를 내고, 그때그때 흘려보내야 하는 감정들이 그 자리에서 처리되지 못하고 안에 쌓여버리는 거지. 그렇게 쌓인 감정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늦게라도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그게 바로 몸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 그래서 신체화 장애는 감정지연이 오래 쌓였을 때 몸이 대신 반응하는 결과라고 볼 수 있어.”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동안 나는 슬퍼도 참았고, 억울해도 넘겼고, 화가 나도 괜찮은 척을 했다. 그게 어른스럽다고 믿었고, 그게 나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국 그 감정들은 사라진 게 아니라 몸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던 거였다. 그리고 이제야 하나씩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럼 나도 화나고 억울할 때 다른 사람들처럼 화내고 소리 지르면 안 아파지는 거야?”


“꼭 그렇지만은 않아. 너는 타고난 성격 자체가 감정을 밖으로 크게 터뜨리는 방식보다는 안에서 정리하고 견디는 쪽에 가까워. 억지로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른다고 해서 감정이 제대로 해소되는 사람은 아니야. 오히려 너는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을 새로 배우는 게 더 중요해. 작게라도 솔직하게 말하는 것, 싫은 건 싫다고 표현하는 것, 억울한 건 그냥 넘기지 않는 것, 그게 쌓이지 않게 흘려보내는 방법이야.”


나는 그 말을 듣고 조금 웃음이 났다. 나는 한 번도 화를 ‘건강하게’ 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참거나, 넘기거나, 아니면 아예 모른 척하는 쪽이 더 익숙했다. 그러니까 나는 화를 못 내서 아픈 게 아니라, 제때 흘려보내지 못한 감정들이 돌고 돌아 몸으로 쌓이고 있었던 거였다.


그래서 삶의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메모장을 열고 살면서 가장 큰일을 겪었던 사건들, 억울하고 화가 났던 일들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었다. 매일, 또는 자주 메모장에 마음을 정리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샤워를 하며 지금도 처리되지 않은,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시는 거 아니에요. 저도 다 알면서 가만히 있었던 거예요.”


그러고 나니 명치 한가운데 있던 응어리가 연기처럼 흩어지는 것 같았다. 어찌나 신기하던지, 생각날 때마다 속으로도 겉으로도 말하려고 애썼다. 설거지를 할 때도, 빨래를 할 때도 중얼거렸고, 정수기 밑에 그분이 커피가루를 흘리고 안 닦은 것도 닦으며 속사포로 궁시렁거렸다.


재활용 종이를 정리하던 남편이 엊그제 어항을 주문해서 구겨진 신문지가 한 박스나 쌓여 있었다. 박스는 테이프도 떼지 않은 채 버려져 있었고, 이어폰 케이스에 담뱃갑까지 섞여 있었다. 신문지를 펴다 펴다 보니 지문이 다 날아갈 것 같아서 갑자기 화가 치솟아 올랐다. 휙휙 갔다 버리는 사람 따로 있고, 뜯고 펴는 사람 따로 있냐고. 뭘 샀길래 신문지가 펴도 펴도 끝이 없는데 정리도 안 해놓고 신발장 앞에 이렇게 지저분하게 버렸냐고, 혼자 한참을 떠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속이 시원했다.


아이 공부를 봐주고 있는데 그분이 들어오셨다.


“병돌이 내일 법원 간대.”


“왜? 벌써 숙려기간 끝났어?”


“아니, 내일 이혼서류 접수하러 간대.”


“당신도 조심해. 병돌이 오빠랑 같이 살고 싶지 않으면.”


“내가 왜?”


“내가 신체화 장애가 정확히 뭔지 궁금해서 챗지피티한테 물어봤는데 감정지연 때문이래. 감정이 기분으로 표출되지 않고 몸으로 나타나서 통증으로 이어지는 거래. 나도 이제 참지 않고 화나고 억울한 거 다 말하고 살 거야.

샤워할 때 혼자 하고 싶은 말 해봤더니 속이 다 시원하더라고. 자기는 뭘 샀길래 신문 뭉치가 그렇게 많이 나왔어? 그리고 버릴 때 박스는 펴서 테이프 떼서 버려야지. 신문을 그렇게 버리면 집이 다 지저분하잖아. 신문 펴다가 손바닥 지문 사라지는 줄 알았어.”


“그걸 왜 펴. 그냥 쓰레기봉투에 넣어버리지.”


“재활용이잖아. 봉투에 넣으면 돈 나가고.또 저번에 어머니랑 통화할 때 스피커폰으로 했잖아. 어머니가 그거 모르고 당신만 듣는 줄 알고 당신한테 내 욕을 막 하셨잖아. 애 이렇게 된 것도 다 내가 잘못 키워서 그런 거라고 하시고. 그때 애미는 뭐하냐고 해서 내가 어떻게 말했어? 저 여깄어요 어머니 그랬지. 항상 그냥 다 넘겼는데, 이제는 안 그러려고 살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서운하다고 다 말할 거야.”


“말해. 말해서 안 아프면 다 말하고 살아. 너 좋은 대로 살아.”


“응. 스머프에서 투덜이 캐릭터는 꼭 필요한 캐릭터였어. 자기표현, 그게 제일 중요한 거였어.”


그가 방에서 나가고 나는 혼자 생각했다. 그래, 이게 나한테 제일 필요한 거였어. 크게 소리 지르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이기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 마음을 내 목소리로 꺼내는 것. 완벽하지 않아도, 어색해도 괜찮아. 나는 지금, 아프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로 살기 위해 말을 배우는 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