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집의 시간들>에 관한 기록
대한민국에서 집이란 무엇일까? 대한민국에서 집이란 재테크의 수단이자 얼마나 잘 살고있는지 판단하는 척도가 된다.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를 통해 만족감이나 열패감을 느끼게 하는 상대적인 척도이기도 하다. 근대소설가 김유정의 작품 <감자> 속의 소녀는 '느그집에 이거 없지'라며 감자를 건넸다면, 오늘날 초딩들은 집이 아파트인지, 몇평인지, 방이 몇개인지를 묻는다.
<집의 시간들>이라는 영화는 집의 의미에 대한 여러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이 영화에는 둔촌주공 아파트에 살았던 주민들이 나와서 직접 그들의 목소리로 그들의 집이 갖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군가에게 집은 오랜세월동안 함께 살아온 가족의 일부이기도 하고, 무엇이든 평탄하게 인생의 통과의례를 마치게 해준 고마운 수호신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또한 집은 나의 과거이기도 하며, 정체성의 확장이기도 하다. 집은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닮는다.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나의 이상의 일부를 위탁하고 있는 공간이다. 각 물건들에는 개개인의 기억이 고유하게 호명하는 정체성이 있고,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소환하는 타임머신이 되기도 한다. 집은 나의 내면세계의 외면적인 표현형이다. 집의 꾸밈새, 그리고 채우고 있는 물건들에서 살고있는 사람들의 선호, 스타일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러 저러하게 각자에게 주는 집의 의미는 달라도 둔촌주공 주민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의미가 한가지 있다. 주민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한가지, '서울에서 다시는 이런집에 살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둔촌주공 아파트는 오래된 나무들과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있다. 주민들은 창에서 손만 뻗으면 나무와 닿을 정도로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아왔고, 그러한 자연은 치유와 회복, 영감의 원천이 되어주었다.
시간의 흐름에는 양가적인 면이 있다. 시간의 흐름이 특정한 공간과 결합하여 개개의 고유성을 직조해간다면, 동시에 물리적인 공간의 쇠락과 후퇴를 피할수 없다. 그러한 쇠락과 후퇴는 둔촌주공 주민들이 살면서 감내해야하는 실제적인 불편- 녹물 등- 으로 나타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간에 얽힌 이야기와 추억들은 더욱 쌓이고 공간의 의미는 더욱 풍부해지지만, 동시에 자산으로서 집의 가치는 떨어진다. 영화 중 인터뷰에도 얼핏 나왔지만 사람들은 둔촌주공에 대해 각자 주관적으로 부여한 가치와, 자산으로서의 가치 사이에서 고민하기도 한다. 재개발 이야기가 거의 20년 전부터 나왔다고 하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은 이런 딜레마 때문이 아니었을까?
영화를 보고나서 한가지 안타까웠던 점은 어째서 이구동성으로 공감하는 둔촌주공의 가치를 다시 재현할수 없는걸까하는 의문이 들어서였다. 왜 사람들은 다시는 서울내에서 이런 곳에 살수 없을것이라는 생각을 할까? 우리가 우리의 삶을 결정하지 못한다면 대체 누가 결정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천편일률적인 좋은 삶에 대한 하나의 기준, 라이프스타일이 달라질 때도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양성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했던 것은 그것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우리사회는 그간 효율와 돈의 가치를 우선하여 공간과 함께 공간에 담긴 시간성 역시 파괴해버리는 선택을 해왔고, 그것에 토대한 개개의 고유성 역시 사장되어버렸다. 그러한 파괴와 함께 다시 돌아올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그 안에 담겨있던 사람들의 기억과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을까?
시간의 흐름을 재현하는 공간이 곧 고유함과 개성의 원천이 될수 있다는 것, 돈이나 효율이 아닌 무형의 가치들에 실감을 주는 것, 그리고 내가 살아가고자 하는대로 내 삶을 만들어가려는 의지가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출발이 되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