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예술인문극장 ‘인정투쟁; 예술가편‘
우리는 왜 '인정'받고 싶어할까?
결국 우리가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에서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의미가 있는 존재이길 원한다.
인정은 어떻게 획득되는가?
나의 확신? 실체의 유무? 또는 상대방 또는 사회의 인정일까? 실체가 있어도 사회적인 인정이 인색한 경우도 있고 한참후에야 그 가치가 발견되는 경우도있다. 때로는 실체 없이 어떤이유로 형성된 사회적인 인정이라는 허상이 또다른 인정을 부르기도 한다
'인정'은 '투쟁'이라는 단어와 어울리는가?
인정이 사회적인 존재로서 누려야하는 권리라는 관점에서, 투쟁이라는 단어와 어울릴수 있다. 다양한 사회적인 관계에서 인정이라는 권리를 앗아가려는 힘이 있고,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며 인정이라는 권리를 획득하려고 하는 것이 인정 투쟁일 것이다.
연극은 예술가가 인정투쟁하는 여정을 '나', '너', '그' 라는 세가지 서사로 풀어내고 있다.
첫번째는 '나'의 이야기이다. 6명의 장애인 배우들이 나와서 연기를 하지만 극의 형태는 마치 한명이 독백극을 하는 형태이다. 독백 같은 대사를 6명의 배우들이 릴레이로 낭독하는 형태가 인상적이었다. 한사람의 예술가 인정받고 싶은 '나'는 국가가 예술인의 자격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는 '예술인 패스'를 받으려고 한다. 하지만 매번 '데이터 없음'이라는 결과를 받아들며 번번이 좌절을 겪는다. 예술인 패스를 받으려면 예술가 경력을 보유해야하고 예술가의 경력을 위해서는 또 무언가 장벽이 생기는 난관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나’의 존재가치는 ‘예술가'의 정체성에 기대어 있고 그리고 그 ’예술가‘의 정체성은 권위인 '예술인 패스'에 기대어 있다.
두번째는 '너'의 이야기이다. 2막은 예술인 패스를 받기 위한 예술가의 경력을 쌓기 위한 예술가 '너'의 여정을 그린다. '너'는 누군가에게 주목되어야하고 누군가에게 불려져야하는 대상이다. 고유한 존재인 ‘나’와는 달리 ‘너’에서는 고유성이 사라진다. '너가 아니어도 너는 많았다.' '너'로 불려지는 예술가는 기성권력으로 대표되는 예술가 선생님의 기준과 비위를 맞추기 위한 인정 투쟁을 한다.
세번째는 '그'의 이야기이다. 예술가 '그'는 누구나에게 객관적인 인정을 획득한 존재이다. 세번째 서사는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서사였던 거 같다. 예술은 사회와 공명하지 못하고 사회적인 인정을 받지 못할때 예술이라고 할수 있을까? 예술의 예술다움은 예술 자체의 무언가에 있는가 아니면 사회와의 관계를 통해 얻어지는가 다양한 질문들이 떠올랐다. 예술은 이미 어떤 낯설음을 전제하고 대중들에게 열광/옹호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예술의 존립위기를 말하는 위험신호일수 있다. 예술은 대중들의 인정과 낯설음 비호감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것 아닐까?
이극을 보면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면서, 갈등에 대한 생각이 아주 달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갈등이 없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나와 달리 그분은 갈등과 투쟁이 서로의 존재를 존재답게 하고 필수 불가결하다라고 생각하는 분이었다.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인정이 자동으로 주어지고 보호되는 것보다 인정을 투쟁하는 과정에서 질문하고 의심하고 선을 넘으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보다 잘 정의할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민주주의나 인권이 발전하는 과정을 볼때 그런 투쟁의 역사는 필수적이었다. 그 유산을 자동으로 물려받은 우리는 그런 권리를 공기처럼 누리며 살고 있지만 그 권리에 대한 소중함이나 애틋함은 예전만 못하다.
이극은 전부 장애인 배우들이 출연했다. 왜 장애인 배우들을 출연시켰을까 궁금하기도 했는데 장애라는 소재를 대상화하지 않고 장애인 배우들의 예술이라는 소재를 매개로한 그들 자기자신의 이야기로 들리기도 했다. 그런 기획이 인정투쟁이라는 극의 메시지에 몰입감을 더하는 부분도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