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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녜스 Feb 04. 2020

불시착이어도.

끝 그래서 시작.

불시착이어도 괜찮다. 사표의 끝이 백수의 시작이라 할지라도.


놀고먹어야겠단 생각은 아니었다. 좀 쉬고 싶었다. 나 스스로에게 지쳐있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가 있다. 하다 하다 지쳐 포기하고 싶을 때. 그때였다.


갑작스럽긴 해도 아무런 계획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래를 다듬기 전에 현재를 다질 필요가 있을 뿐이었다.


나의 현재는 하얀 철쭉이 비탈을 채우고, 봄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아침으로부터 시작한다.


꽃샘추위를 피해 날이 따뜻해지자 엄마는 횡성 5일장에서 중닭을 열 마리 사다가 닭장에 넣었다.


아직 시골 초보인 나는 늦게 잠에 들었다.


초저녁부터 잠자리에 드는 시골 프로페셔널들에게 자정이 훨씬 넘어야 잠드는 내 생활은 못마땅 그 자체였다.


엄마가 잔소리를 하셨다. 도시에서 혼자 지낼 때는 듣지 못했던 오랜만의 잔소리. "일찍 자." 정겹기까지 했다.


아침에 마당이 얼마나 예쁜지, 이제 파릇파릇해지는 잔디가, 겨우내 칙칙하던 산기슭이 봄을 맞이하는 모습을 내가 보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이른 아침, 건너편 산자락에 끼는 새하얀 연무도, 하루의 시작을 함께 하기에 너무도 좋은 벗이라고 하셨다.


이곳 강원도 산골 봄의 아침은 조금 찬 공기가 볼을 감싸 안을 때 깊게 코로 들어오는 나무 내음으로 잠을 깨는 시간이다.


느린 걸음으로 흙 위를 걸으면 촉촉하고 보솜보솜한 촉감에 발가락으로 괜히 슬리퍼를 찔찔 끌고 다니고 싶어 진다.


새소리는 어떤가. 꼬리가 노랑 주황빛이 도는 산새가, 참새보다 익숙해질 산새가, 지저귄다.


오후 녘 마당에 나무 그늘이 지면 잠깐 의자에 아무렇게 앉는다. 힘을 빼고 나 외에 이 숲 속에 사는 생명체들의 소리를 듣는다.


윙윙거리는 벌, 날파리에서부터 가끔 부스럭 소리를 내며 등장하는 다람쥐. 아, 꿩이 뒤뚱거리며 나뭇가지를 사각사각 밟는 소리도 들린다.


동물원에 갈 필요가 없다. 동물원에 가면 우리가 동물을 보는 게 아니라 걔네가 우릴 보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까.


이곳 마당에선 서로 관심 없다. 딱 첫 눈빛만 주고받을 뿐, 그뿐이다. 공존을 위해 서로의 영역을 존중한다. 누가 누구를 동물원 원숭이로 여기지 않는다.


나의 현재는 너무 지천에 겹치는 영역에서 서로에 관심을 갖어야만 하는 도시인과는 다른 행보이다.


오롯이 나에 대해 집중하되, 벽만 보고 혼자가 아니라, 아파트 3층 높이도 더 되는 소나무에 떨어지는 햇빛에 눈부셔하며 나의 숨의 온기를 느끼는 시간이다.


불시착이어도 괜찮다. 목적지의 바람직함은 발을 딛기 전에는 모를 일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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