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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on Aug 10. 2023

요즘 감자가 맛있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요즘 감자가 맛있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마트에서 산 감자를 깍뚝썰기를 해서 압력밥솥에 밥을 할 때 쌀과 함께 넣었다. 순우리말로는 감자밥이지만 한자어로 감저반(甘藷飯)이라고도 한다. 옛 문학작품 속 감자밥은 가난한 생활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장치가 되는 것 같은데 요즘 채소값이 너무 비싸서 그나마 가격이 괜찮은 감자를 마트에서 집어들었으니 맞는 표현일 수도 있겠다. 게다가 날도 더운데 튀기거나 볶는 게 귀찮아서 그냥 넣고 찌기만 하면 되는 감자밥이 딱이었다.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가, 갓 지어 따뜻해서 그런가 감자가 유난히 맛있었다. 오 이 감자 맛있는데? 감자 맛있는 김에 최근에 강남에 새로 연 미국 햄버거 프랜차이즈 파이브가이즈는 감자 튀김 품질에 엄격한 걸로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식구들에게 했다. 거기는 매일 아침 생감자를 손질한대, 우리가 영국에 살 때도 그랬잖아, 파이브가이즈 벽면에 오늘의 감자가 어디서 온 감자인지 원산지를 꼭 적어두곤 했었어. 이번에 강남점 열 때도 전국의 감자를 다 먹어봤다는 거 같아.


감자밥을 먹다말고 포장비닐을 확인해야겠다며 비닐류 재활용 쓰레기통을 다시 열어 이 맛있는 감자가 경기도 광주에서 생산된 감자이며 아마도 우리가 간 2마트 어디에서나 살 수 있을 거라는 얘기를 나누었다. 채소의 경우 그 지역에서 난 채소를 일부 무조건 팔게 되어있는 건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용인 2마트에서는 용인산 채소모둠을 쉽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제주도에서는 이 경기 광주 감자를 못 사는 건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을 하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러니까 우리는 경기도 광주에서 생산된 감자를 경기도 용인에서 구입을 하고 경기도 가평으로 가져와서 먹고 있는 거야.


며칠 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강남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살다가 다시 한국에 돌아와 어쩌다보니 학구열이 불타는 곳만 골라서 살고 있는 세상 도시녀인 내가 또 어쩌다보니 조만간 산 속 생활을 시작할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많이 놀란 터였다. 여기서 놀랐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이 친구가 아무리 오래된 친구이더라도 나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는 걸 의미했었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카페에서 브런치를 시켜놓고 이 친구와 수다를 떨고 있는데 접시 위 감자튀김이 눈에 띄었다. 며칠 전 먹은 감자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새 감자가 너무너무 맛있더라, 제철인가? 얼른 먹어봐.


- 야 너 완전 시골 여자 다 됐네


어쩌면 이 친구와는 내 미래 산 속 생활에 대한 그 어떠한 이야기도 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냥 언제나 나였을 뿐인데, 내가 강남에 살 때 하는 말과 내가 외국에 살 때 하는 말과 내가 시골생활을 앞두고 하는 말이 이렇게 다르게 해석된다. 남들이 가는 똑같은 마트에서 똑같은 감자를 먹었을 뿐인데도 나는 이제 그렇게 비쳐지는 것이다. 교육 이야기도 그랬었다. 8학군 출신인 내가 하는 말, 아이를 영국사립학교에 보내는 내가 하는 말, 아이를 산골학교에 보낼지도 모르는 내가 하는 말이 완전히 똑같은 뜻의 완전히 똑같은 문장이더라도 듣는 사람의 해석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래서 이제 해석을 달리 하는 사람들과는 자주 연락하지 않을 셈이다. 너는 어쩜 런던 한복판에 있어도 현지인 같냐고 하던 사람들은 이제, 너는 어쩜 산 속 한 가운데 있어도 농부 같냐고 말을 한다. 그런 말 대신에 <너는 참 어디에 있어도 너 답다>고 말해주는 사람들과만 소통하고 싶다. 도시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을 내 인생 바운더리에 다 끌고 가기엔 나는 너무 바쁘다. (밭일로 바쁠 것 같죠? 어쩌죠.. 저는 땅은 있는데 밭은 없어요)


사실 며칠 전부터 도시집으로 다시 들어와서 아이도 학원을 다니고 있는데 sns 상으로는 계속 산에 있는 척을 했다. 내가 거기 있는 줄 알면 연락이 줄고 조금 조용해지는 것 같이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구경거리가 되기로 결심했다. 여기서 일하게 된 경위를 비닐 커튼 너머로 최대한 재미있고 자극적으로 속도감 있게 이야기했다.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점점 다듬어져서 일주일이나 계속하는 사이 알차고 간결한 소화로 완성되고, 만담처럼 완급을 조절하는 데도 실력이 붙었다." <서 있으면 시아버지라도 이용해라, 친애하는 신사숙녀여러분(유즈키 아사코 지음) 중에서>


어쩌면 세상 복잡한 도시 속 마트에서 주차 전쟁을 치르고 산 감자이지만 마치 조용한 시골 마당에서 내가 키운 감자인 척 하면서 소설 속 주인공처럼 기꺼이 구경거리가 되어주는 날이 곧 올지도 모르겠다. 그때도 지금처럼 내 멘트는 똑같을 테지만.


"요즘 감자가 맛있더라"


바뀐 건 그들이 상상하는 그림 속 '나'이지, 진짜 나는 아니니까.  





*수년전에 쓴 에세이에 감자전이라는 토막글이 있다. 감자 시리즈라도 연재할까 장난스러운 생각이 드는 비내리는 오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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