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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on Jul 13. 2023

말을 잘 써야지

그래야 세상이 나아질 것만 같거든

자기 분야에서 40년 차, 50년 차이신 분들이 보면 나를 귀엽다고 하실 지도 모르겠지만 (귀여워 해주세요!) 오늘은 내가 내 분야에서 20년 차임을 앞에 깔아놓고 글을 시작하고 싶다. 내가 1,2년 차에는 아니 10년 차였던 시절에도 감히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은 요즘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KBS 예능국에서 자료조사원을 하며 연예인들과 매니저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것저것 앙케트(앙케이트X)를 말 그대로 조사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 조사가 잘 되어야 막내작가 서브작가 메인작가 등이 프로그램을 구성할 때 도움이 되니까. 이때 왔다갔다 하며 본 사람 중에는 이우정 작가님도 있다. 새 프로그램 론칭을 위해 다같이 앉아 회의를 한 적이 있는데 당연히 기억은 못 하실 듯. 하지만 나는 이우정 작가님이 티비에 나올 때마다 그때 생각이 난다. 나의 뽀시래기 시절. 내가 만약 예능국에 계속 있었다면 나도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드라마도 만들고 그럴 수 있었을까?


응 당연하지.

방송작가 동기와 친구들은 이렇게 말해준다. 고오맙다.

하지만 나는 예능국에 남지 못했다. MBC 아나운서국에서 자체제작하는 <우리말나들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거기 작가를 구한다는 연락을 받고 면접을 보러 갔고 그렇게 전화를 돌리던 자료조사원에서 전화도 돌리고 원고도 쓰고 편집도 하고 자막도 쓰고 섭외도 하는 작가가 되었다. 물론 자료조사원에서 운 좋게 갑자기 작가가 된 것은 아니고 그 중간에 각종 프로덕션에서 막내 작가도 하고 EBS에서 영어 작가도 하고 등등 다양한 경험을 쌓아왔다.   


이후에 결혼도 하고 이민도 가고 아이도 낳고 역이민도 오고 등등 하느라 예전만큼 다양한 방송 일을 하고 있진 못하지만 여전히 방송작가다. 현재는 MBC 라디오국 소속으로 여전히 <우리말나들이>의 원고를 담당하고 있다. 라디오 <우리말나들이>는 2004년에 처음 생겼는데 그때 TV 원고를 맡고 있던 나에게 기회가 주어져서 감사하게도 지금도 원고를 쓰고 있다. (계속 쓴 건 아니고 개편 때 잠시 나갔다 다시 들어왔다.)  


예능국에서 아나운서국으로 옮긴 2003년으로 다시 가보자. 몇 천 명의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반짝반짝이는 아나운서들 사이에서 책상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서는 우리나라의 맞춤법을 바로 잡아보겠다며 매일 1분짜리 영상을 만들었다. 그때 진행자는 고 정은임 아나운서였다. 내가 본 사람 중에 아마도 가장 교양있고 똑부러지지만 부드러운 카리스마라고 해야 하나. 그런 분에게 내 비루한 원고를 줘도 되는 건가. 빨간줄 열 개 그어서 반품당하는 거 아닌가..했지만 무슨 소리. 그런 분이 아니다. 예능국에서는 볼펜만 딸깍거려도 죽어라 혼이 났던 터라 아나운서들의 따뜻한 말씨와 교양어린 어투에 정신이 어질어질하던 때였다.


그래서 그때는 원고가 귀엽다고 해야 하나. 지금이나 되니까 이 소리도 할 수 있겠다. 예를 들면 뭉게구름, 꼬리구름, 삿갓구름처럼 다양한 우리말 이름을 담은 구름의 종류를 소개한다거나 '가르키다' 아니죠~ '가르치다'가 맞습니다! 따위의 명확한 제시를 할 수 있는 우리말에 집중했었다. 한 시청자가 그게 왜 '가르치다'가 맞냐며 항의 전화를 해대도 그 증거는 국립국어원에 있으니까 표준국어대사전을 펼쳐보도록 하시오, 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들만 원고의 소재가 되었다.


한 오 년 쯤 지나고 나니 내 원고는 조금 과감해지기 시작했다. 이걸 과감하다고 표현하다니 과거의 내가 부끄럽다. 예를 들면 사전에 '여사장'이라는 표제어가 있는데도 너네가 남사장이라는 말은 안 쓰면서 왜 여사장이래? 남사장이라고 할 거 아니면 여사장도 쓰지 마!라고 말하기 시작한 거다. 지금은 어떨까? 이십 년 쯤 된 지금은 아예 국립국어원을 저격한다. 사전에서 '여사장' 방 빼라고!


지금의 나를 설명하기 위해서 한바탕 글을 썼는데 사실 아직 본론은 꺼내지도 않았다. 지금 꺼낼 참이다. 그러니까 이십 년 차 우리말 작가가 요즘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말하고 싶었다. 이 바닥에서 이 정도 있다보니 '말'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게 뭔지 이제야 알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렇게 말이 무서운 거라면 이게 무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은 아무도 그 사건을 '나영이 사건'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건 '조두순 사건'이다. 조두순이 8세 여아를 성폭행하고 상해를 입힌 사건은 조두순 사건이다. 말의 첫단추가 잘못 꿰어지면 나영이만 영원히 고통받고 조두순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소름이 끼친다. 본의아니게 개명을 해야 했던 전국의 선량한 조두순 씨들에게는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 (신상공개 범죄자의 개명을 금지하는 법안을 발의했다는 뉴스는 몇 년 전에 있었는데 시행은 어디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나는 우리 엄마가 과부라서 그런가 어릴 때부터 과부라는 말이 듣기 싫었다. 미망인이라는 말은 한술 더 뜬다.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미망 : 남편은 죽었으나 따라 죽지 못하고 홀로 남아 있음.


여기에 사람 인을 붙인 말이다. 그러면 뭐라고 부르냐는 질문은 수도 없이 받아왔다. 그때 내 대답은 이렇다. 꼭 뭐라고 불러야 하나? 이름이 있는데 이름 부르면 되지.


- 오늘은 미망인 김대한민국 씨를 모시고 말씀 나누겠습니다.

- 오늘은 김대한민국 씨를 모시고 말씀 나누겠습니다.


왜 굳이 남편을 잃었다는 걸 밝혀야 하는데? 영화 <로맨틱 홀리데이>(2006)에서처럼 다시 연애를 시작할 거라서 상대에게 w-i-d-o-w-e-r라며 내가 혼자된 사람이라는 걸 밝혀야 하는 자리를 제외하고는 '굳이?'라는 답을 하고 싶다. 그리고 당연히 이건 '홀아비'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말을 눈치보지 않고 할 수 있는 게 바로 경력직의 맛이랄까.


최근에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을 읽고 있다. 오디오클립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인데 오디오는 들어본 적이 없지만 책을 아주 흥미롭게 읽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지난 이십 년 동안 다루었던 내용이 있기도 했지만 처음 알게 된 것들도 많아 놀랐다. 그중 가장 충격을 받은 말은 바로 '아동 성매매를 한다'가 아니라 '아동이 반복적으로 강간을 당한다'라는 표현이 맞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렇게 적확한 표현이 또 있을까...!


지난 원고에서 나는 꾸준히 '성적수치심'이란 낱말에서 '수치심'은 뭔가 잘못된 표현이라고 방송해왔다.


수치 : 다른 사람들을 볼 낯이 없거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함. 또는 그런 일.


내가 당했는데 내가 왜 다른 사람을 볼 낯이 없나? 내가 왜 떳떳하지 못한가? 아닌데? 수치심은 가해자가 느껴야 할 감정이지 피해자가 느껴야 할 감정은 아닌 것이다. 요즘엔 성적불쾌감 성적모욕감 등이 대체어로 제시되고 있긴 한데 사실 성적빡치심보다 더 나은 낱말을 보지 못하였도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의 언어를 조금이나마 나은 방향으로 가게끔 일조했다고 믿으며 눈누난나 했던 내 자신이 너무너무 부끄러워서 수치스러웠다. 내가 만약 '아동 성매매'라는 말을 지난 글에 담았다면 작가로서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걸 쓰면서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니 4-50년 차 우리말지기들이 들으면 비웃고도 남을 일이다. (비웃어주세요!) 아동이 성매매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동이 반복적으로 강간을 당하는 게 맞다. 그리고 이건 아마도 <우리말나들이>에서 다루지는 못하겠기에 여기에서라도 말하고 싶었다.


18년 차 경찰인 남편과 주말에 만나면 이 이야기를 해볼 참이다. 이 책에서 그러는데 한국은 영국과 달리 '아동 유인 방지법'이 없대! 이 나라에서 아이를 키우는 게 맞아? 라고 운을 뗄 예정이다. 영국에서는 어떤 낱말로 이런 이야기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사실 몇 년 째 휴직 상태이기 때문에 18년이라고 쳐주면 안 되긴 하지만 뭐 휴직이라고 경찰이 아닌 건 아니니까. 방송작가가 개편으로 방송글을 잠시 쉰다고 해서 방송작가가 아닌 건 아니니까.   


구름 종류에 대해 알려주는 귀여운 원고도 좋지만 점점 끓어오르는 정의감이랄까 빡치심이랄까 모성애랄까에 휩싸여 1) '불법체류자'가 아니라 '미등록체류자'입니다, 2)'피드 박제'라는 말 동물 학대와 관련이 있는 말입니다, 3) '치매'의 '치'는 어리석을 치입니다. 치매 환자가 어리석은 건 아닐 텐데요. 4) '합죽이'는 외모를 비하하는 말입니다. 따위의 원고를 쓰고 방송을 하는 나의 다음 원고는 무엇일까. 일단 아이 담임 선생님이 제발 합죽이(toothless person)라는 말 좀 애들한테 그만 쓰셨으면 좋겠는데요..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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