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들의 문해력이 낮아졌다는 말을 한다. 그 원인을 주로 읽기 보다는 보기를 더 선호하는 현재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100%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그 현재의 상황이라는 것이 원인 제공을 한 건 맞을 거다. 나도 SNS을 열면 튀어나오는 쇼츠를 여러 개 보고나서야 다음 일을 진행할 수 있긴 하지만 몇 시간씩 본다는 사람들에 비해서는 거의 보지 않는 편에 속한다. 만약 이에 대한 설문조사가 있었다면 '거의 그렇지 않다'에 체크를 하고 아메리카노 한 잔 쿠폰을 받았을 거다. 개인적으로는 올해 어휘력과 문해력에 대한 책도 두 권 썼지만 언제부턴가 한자를 포기한 말글생활 영향이 약 10% 정도는 있지 않나 싶다. 예를 들면 '금일'을 '금요일'의 준말로 착각하게 된 건 예전에 우리가 금일(今日)을 버리고 '오늘'을 쓰기로 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나도 약 20여년 동안 <한자어를 버리고 순우리말을 씁시다, 토박이말을 살려 씁시다> 라는 투의 라디오 캠페인을 방송국과 함께 했지만 지금은 딱히 그렇지도 않다. 이제 언어문화가 또 달라져서 <한자어 좀 배웁시다, 이 한자어는 이런 뜻입니다, 잘 알아두세요>라는 내용의 방송을 한다.
언어는 계속 바뀐다는 걸 느낀지는 좀 됐다. 나이가 들었다는 뜻일 거다. 라떼는 맞던 것이 지금은 틀리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 눈치껏 입을 잘 놀려야 하는 것이다. 설겆이가 설거지가 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돐이 돌이 된 이야기가 아니다. 90년대 방송 말투라며 자료화면으로 나오는 것이 40대 중반인 나는 어색하지가 않은데 요즘 사람들은 말투가 왜 저러냐며 웃는 것이다. 라떼는 블랙죠라는 초코바가 있었어도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초코바 이름이 블랙죠이고 그 포장에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차림을 한 흑인 소년 그림이 그려져 있다면 아마 온라인이 뜨거울 것이다.(아프리카 날씨만큼 뜨겁다고 쓸 뻔했다.)
그런데 난 문해력이나 언어의 변화 따위를 얘기하려고 브런치를 연 것이 아니다. 긴 글을 쓰지 못하게 된 내 자신에 대한 한탄을 하고 싶어서 열었는데 또 딴소리를 하고 있다. 아마도 긴 글에 대한 갈망이 본론을 시작하기 전에 이 말 저 말 다 끌어다가 놓게 만든 건 아닌가 싶다. 그래야 길어지니까? 계획대로 글을 쓰는 편이 결코 아니라서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조각조각들이 글을 길게 만들어주고 있다. 바른 글쓰기라고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슬프다.
스무남은 해를 1분짜리 캠페인을 쓰며 살았다. 중간중간 긴 호흡의 여러가지 일도 해보았지만 기본적으로 하는 일은 60초짜리 캠페인이었다. 주말 포함 매일 방송이라서 많이, 자주 쓰는 원고인데 이걸 탓해야 하나? 이걸 이렇게 짧은 호흡으로 이십년 넘게 하다보니 나는 긴 글은 쓰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건가? 엄마가 된 나를 탓해보기도 했지만 자기 자신을 탓하지 않는 엄마들도 많고 육아를 하면서도 긴 호흡의 글을 쭉쭉 뽑아내는 엄마 작가들도 많다. 나는 숨을 곳이 없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쇼츠를 중독적으로 보는 사람도 아니라서 영상 탓을 할 수도 없고 아이가 스스로 알아서 잘 하는 편이라 육아/육성/교육 탓을 할 수도 없다. 내가 뭘 하는 게 있다고. 아이가 알아서 하고 학원이 알아서 해주는데.
글을 좀 끊어볼까? 짧지만 매일 계속 쓰는 습관 때문일까?길게 쓰는 습관이 없는 것이? 아니면 독자와의 약속이 없기 때문일까? 어쩌면 독자라는 게 애초에 없기 때문일까? 40대 중반이지만 아직 갱년기는 오지 않은 것 같은데 이건 뭔가, 갱년쓰기인가? 마음과 머리는 청년쓰기인데 이러긴가? 어쩌면 애초에 길게 쓰지 못하는 사람임을 알았기에 소설가가 아닌 방송작가가 된 건 아닐까? 어느 이야기를 10년을 물고 늘어지는 소설가 집념이 없으니 한두시간이면 끝나는 생방송 입말원고를 썼던 건 아닐까? 그렇다고 입말원고가 10년을 쏟아부은 소설보다 낫지 않다고 볼 수는 없을 텐데. 라디오 원고를 듣고 힘을 얻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또 또 타협한다. 나자신.
글쓰기 학원을 다녀볼까? 사실 학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최근에 동화쓰기 수업을 나가본 적은 있다. 수업을 운영해야 하는 사람이 왜 배우러 나가냐는 소리도 들었다. 현직 동화작가에게 듣는 코스였는데 동화라서 그랬나 순수한 마음이 들지 않아서 중간에 그만두었다. 작가님은 내가 쓰는 문장들을 '문학소녀'라며 계속 칭찬하셨는데 원래 칭찬이 가득한 분이기도 하셨지만 사실은 작가라고 말하기가 죄송스러워서 그만둔 것도 20% 정도는 된다.
마우스의 스크롤을 괜스레 올리고 내린다. 이 정도면 긴 글을 쓸 수 있는 거 아닌가? 아니야. 내가 쓰려던 얘기가 뭔지 모르겠잖아. 아무도 긴 글을 못 쓴다고 하지 않았는데 혼자 이런다. 아무도 모르지만 내가 아니까 그런 것이다. 내가 안다, 내가 긴 글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는 걸. 아니지, 긴 글은 쓸 수 있다. 내가 만족하는 긴 글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럴 때는 어디에서 도움을 받아야 할 지 모르겠다. 대학 때 배우던 문예창작학과 교수님을 찾아가볼까. 교수님에 대한 기사를 찾아보니 요즘엔 제주에서 생활하고 계시네. 이 참에 제주에 한번도 가보지 못한 아이를 데리고 찾아가볼까? 선생님! 가르침을 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궁둥이를 붙이고 긴 호흡으로 글을 쓸 수 있습니까?
궁둥이 힘으로 공부를 한다는 말이 있듯이 글도 궁둥이로 쓰는 게 맞다. 올해 내가 낸 두 권의 책은 궁둥이로 쓴 거다. 동남아 못지 않은 한국 더위에 궁둥이가 다 짓물러 내가 사는 시골에는 있지도 않은 피부과 전문의를 찾아 1시간 이상 거리에 있는 시내에 가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어쩌면 내가 그냥 노화로 오래 앉아있지 못하게 된 건 아닐까? 좋아하는 배우의 말대로, 한국 영화의 발전을 위해 새로 개봉한 영화는 영화관에서 보려고 노력하지만 화장실을 두세시간 동안 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쉽지 않다. 결국 늙은 궁둥이 탓을 하고 있는 나 자신, 어쩌면 그만 쓸 때가 된 걸지도.
원문에 넣지 않은 조각들
* 언어문화처럼 운전문화도 바뀐다는 걸 느낀다. 한국을 떠나기 전의 서울의 교통흐름과 지금의 교통흐름은 확실히 달라졌다. 더 나아진 것도 있고 더 악화된 것도 있으니 운전을 할 때도 눈치껏 해야만.
** 얼마 전 북한의 열병식 자료화면을 보는데 여전히 '돐'으로 쓰고 있어서 흥미로웠다. 북한의 아나운서는 '돐을[돌슬]'이라고 'ㅅ'을 살려 발음하고 있었다.
*** 내가 사는 시골에는 피부과 전문의도 없지만 안과 전문의도 없다. 아이의 시력검사를 위해 1시간 이상을 차로 달려 시내에 나가야했다. 혹시 이런 불편함이 긴 글을 못 쓰게 된 원인일까? (철썩, 내 뺨을 때리는 소리)
**** 이 시골엔 피부과도 안과도 없지만 작은 영화관은 있다. 다만 멀티플렉스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영화를 관람할 건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나에게 없다. 영화관장님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