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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To My Daughter

네가 끝까지 약속을 지키려고 했어

by Aeon Park

오후 4:30. 11살 아이를 학원에서 픽업했다. 아침에 학교 앞에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아이가 말했다.


- 학교에서 다음 주에 학생회장 선거를 하는데 G가 나간대. 그래서 내가 선거 도와주기로 했어.


그렇게 선거 도우미가 된 우리 딸. G랑 그렇게 친했나? 전학온 지 얼마 안 된 남자 아이인데 친해졌다니 신기하네. 그냥 네가 회장 선거에 나가보는 건 어떠냐고 슬쩍 물어보니 자긴 그런 건 하지 못한단다. 그래, 엄마 아빠도 반장 부반장 회장 부회장 같은 건 안 해봤어. (요즘엔 반장을 회장이라고 부르는 학교도 있다) 우리도 못해본 걸 강요하진 않을게.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거실에서 자기 컴퓨터로 시부적시부적 프레젠테이션을 만드는 아이. 친구에게 이메일로 사진을 받아서 기호 번호를 넣고 친구가 실천하기로 한 공약들을 도형을 넣어 만들고 있었다. 방과후 수업으로 컴퓨터를 시켰더니 별걸 다 하네. 엄마는 12살에 컴퓨터를 처음 봤는데.. 엄마는 대학생 때 배운 표 만들기 다 까먹었는데.. 하면서 얘기를 들어보니 결정적으로 자기가 이걸 도와주기로 한 이유는 후보자의 집에 프린터가 없고 우리집에는 프린터가 두 개 있기 때문이란다.


작업을 다 마치고 프린트만 하면 되는 그 순간, 컬러 프린터에서 에러 표시가 뜬다. 당시 시각 저녁 8시. 컬러 잉크를 정품을 사지 않고 조금 더 저렴한 재생잉크 호환 어쩌고를 샀기 때문일까? 새 것으로 교체를 해도 프린터가 인식하지를 못한다. 아이에게 선거까지는 시간이 있고 지금은 너무 늦었으니까 오늘은 그냥 자고 내일 낮에 해결해서 그 다음 날에 후보자에게 네가 만든 선거 포스터를 갖다주면 어떠냐고 물으니 절대 안 된단다. 내일까지 갖다주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는 아이. 나는 그때부터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여기는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 산 속 주택. 게다가 여름에 수해를 크게 입어 아직도 도로 복구가 되지 않은 험준한 산길.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시골 문구점, 20분 거리에 있는 알파문구, 30분 거리에 있는 알파문구에 다 전화를 해보아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인터넷 상에서는 영업 중이라고 뜨는데 왜 전화를 안 받을까.


결국 친하게 지내는 아이 둘 동네 엄마에게 아이의 동의를 얻어 전화를 해 본다. 보통은 '하지 마, 사람들이 다 아는 거 싫어.'하는 아이인데 정말 이걸 해내야 했나 보다. 워킹맘이라 이제야 집에 와서 쉴 텐데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다. 언니~ 하면서 전화를 받은 워킹맘은 집에 컬러 프린터가 있긴 한데 사용하지 않은 지 1년이 넘었다고 대답했다. 한 번 사용해보고 되는 지 연락을 준다고 해서 기다렸다. 하지만 잉크가 말라버렸는지 색깔이 나오지 않는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리고 몇 분 뒤, 그녀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 언니, 제 친구(우리 아이의 학원 선생님)가 지금 학원인데 학원에 프린터가 있대요! 파일 보내달라고 하니까 보내보세요.


아.. 작은 시골 마을이라 그런가 우리집에서 컬러 프린트가 당장 필요하다는 것이 동네방네 다 소문이 나고 있었다. 다시 아이에게 물었다. 지금 가능한 사람이 있긴 한데 너의 학원 선생님이셔. 그러면 선생님도 알게 되고 수업 중인 학생들이 있으면 걔네도 알 수도 있어. 그래도 진행해?


- 응. 괜찮아. 물어봐줘.


오케이. 진행시켜. 수업 중이었을 수학 학원 선생님에게 파일을 미리 보내고 감사함을 표현할 달콤한 초콜릿 바 두 개를 들고 산속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동리(지방 행정 구역의 최소 구획인 동(洞)과 이(里)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내려갔다. 선생님은 아이가 만든 선거 포스터를 두 장 인쇄해서 L자 파일에 넣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잉크에 노랑이 부족해서인지 후보자의 얼굴이 빨개 보인다고 걱정하셨지만 지금 얼굴이 초록이든 파랑이든 그게 문제가 아니예요, 이 시간에 너무 감사해요, 선생님.


그렇게 L자 파일을 학원 선생님으로부터 받아든 아이가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말했다.


- 괜히 도와준다고 했나봐.. 나는 바보야.


아니야, 아니야. 너는 이 과정을 통해서 배운 것이 더 많기 때문에 그런 후회는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예를 들면 내가 너를 도와주긴 할 건데, 그래서 포스터도 만들어주고 프린트도 해줄 거긴 한데 만약 컴퓨터나 프린터가 고장이 나서 작업을 하지 못하게 되면 당일에 못할 수도 있다, 라고 여지를 주었더라면 네가 반드시 오늘 해주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마음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또는 되지 않는 것은 빠르게 포기를 하고 오늘은 안 되었으니까 내일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하고 실천하는 용기와 배짱도 약간은 필요할 거라고. 오늘 해주기로 했으니까 오늘 반드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널 괴롭히지 않았냐고.


생각해보면 우린 깜깜한 산 속에 우리밖에 없는 단독주택이고 G후보자는 아빠가 군인이라 군인아파트에 살고 있기 때문에 사실 컬러 프린터가 있는 군인가정을 찾기가 그쪽이 더 쉬웠을 것 같긴 한데 뭐 엄마도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있거든. 물론 네 도움이 필요했지. 네 친구의 엄마고, 네 학원 선생님이시잖아. 나는 오늘 저녁의 이 작은 소동이 우리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을 거 같아서 기분이 좋은 걸? 야, 걔가 회장이 되면 이 선거운동의 모든 과정을 함께 해준 선거 도우미 OOO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합니다, 라고 한 마디 하라 그래. 그리고 자기가 회장이 되면 실천하겠다는 공약 중에 간식데이도 꼭 지키라 그래. 네가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잠자는 산속의 엄마를 움직이게 한 것처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학교선거도우미에 대한 내용

https://www.nec.go.kr/site/nec/06/10603010100002020040802.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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