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ggie Nov 26. 2015

중학교 입학부터 이사 전까지

중학교 1~2학년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명문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학교 3학년 때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은 그다지 크지 않은 도시였는데, 그 작은 도시에서 딱히 평판이 좋지 않은 남녀공학 중학교였다. 내 기억으로 아마 평판이 나쁜 편에 속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어느 중학교를 가든 상관 없다는 생각이 컸다. 평가가 좋지 않은 학교라도 그만의 의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불미스러운 일이 혹여 내게 일어난다고 해도, 온실 속의 화초로 눈을 반쯤 가린 채 살기 보다는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의 어두운 면도 경험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지금 와서 되돌아 보면 더 명문에 가까운 학교에 갔다면 내 삶이 조금 순탄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아직 어렸던 내가 받아 들이기에 불량한 중학생들의 적나라한 비행을 매일 마주하는 일은 생각보다 버티기 힘들었다. 또 그들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과 선생님에 대한 무시, 그리고 가장 나를 실망시켰던 선생님들의 묵인.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불량한 학생들을 어찌하지 못하고 손을 놔버린, 너무 자주 그들의 만행을 모른 체하는 선생님들을 보면서 나는 점점 어른에 대한 신뢰를 잃어 갔던 것 같다. 아, 어른은 우리를 지킬 수 없구나. 그저 자기 밥그릇 챙기느라, 어쩌면 불량 학생들이 무서워서 착한 아이들이 그들의 희생양이 되도록 방치하는구나. 그 중학교의 선생님들도 다른 지역의 교사들과 다를 바 없이 대학 교육을 받고 교사 채용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이었다. 국가가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허가한. 어쩌면 국가부터가 우리를 내버려 두도록 인도한 것일지도 몰랐다. 나쁜 아이들의 폭력에 노출되면서 나는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이 폭력은 폭행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의 가치와 사제 간의 미덕을 해치는 행동도 포함한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사람을 가리지 말고 여러 성격을 가진 친구들을 더러 사귀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중학교 1학년 때는 공교롭게도 우리 반 남자 아이들 전체가 두루 어울렸다. 밥 먹을 때도 같이 다녔고, 쉬는 시간에도 같이 다녔다. 이 무리의 중심은 싸움을 잘 한다고 소문난 한 아이였다. 나도 같이 어울렸던 이 무리는 그래서인지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원래 나는 초등학교 내내 반에서 튀는 아이였고, 반 전체의 분위기를 마음 먹은 대로 조절할 수 있었다. 나는 분위기 메이커인 동시에 모범생이어서 매 학년마다 반에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중학교에 올라 와서는 조용히 지내고 싶었다. 늘 많은 아이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생활에 조금 피곤함을 느낀 나는 뒤로 물러 서서 그저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싶었다. 내가 개입하지 않는 반은 어떻게 흘러 돌아갈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아까 말했듯 우리 반 남자 무리의 리더는 싸움에 관심이 많았고, 여자들에 대한 매너가 부족했다. 우리 반에는 언젠가부터 아이스께끼나 옷 벗기기 등의 문란한 문화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물론 중심은 그 아이. 나는 내 인생 처음으로 누군가에 의해 휘둘렸다. 관심의 중심이 나에게서 멀어지자 나는 조급했고, 남들이 나를 안 좋게 볼 거라는 생각이 커졌다. 그래서 나는 남자애들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나도 여자를 업신 여기는 척 했다. 내가 여자애 치마를 들춰 올리려고 달려든 기억이 있다. 물론 나는 달려드는 몸짓만 과장하고 단 한 번도 치마를 들추려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무리의 문화에 동참했다. 옷 벗기는 건 차마 시늉도 못했다(어떤 애들은 여자애 체육복 자크를 내리는 등 짖궂은 장난을 쳤다).


날이 갈수록 나 자신에 대한 실망이 커졌던 것 같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나는 그저 방관자로서 남고 싶었는데, 결과적으로 나쁜 아이들에게 물든 상황이 돼버렸다. 애초에 나도 그렇고 그런 남자 중 한 명이었을까. 초등학교 때 여자 아이들 배려하고 내가 더 부끄러워 하고, 나름의 매너를 지킨 건 다 가식이었을까. 왜 그 행동은 틀렸다고 말하지 못하는지, 왜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같은 반 애들의 행동을 따라하는지 잘 몰랐다. 그냥 눈에 띄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결국 나는 초등학교 시절의 나보다 훨씬 못한 남자가 돼버렸다. 지금이라도 박차고 나서 이 이상한 상황을 개선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이미 내가 조용히 살기로 결심했으니 가만히 있어야 하는 건지, 과장 없이 하루에도 수십 번 고민했던 것 같다. 


무리의 리더에게 반기를 들게 되면, 그 반작용에 대한 부담을 홀로 져야 한다. 초등학생 때 나는 수업 시간 내내 허리를 꼿꼿이 하고 당당한 표정을 유지하면서 반 내 라이벌의 기선을 확실히 제압하곤 했었다. 하지만 이젠 그런 일에 신경을 뺏기면 안될 것 같았다. 나는 중학생이 되었고, 오로지 공부에 집중해야 했다. 치기 어린 신경전은 그만 둬야 했다. 그래서 나는 매번 치열한 고민의 마지막엔 입을 닫겠다는 결정을 내렸고, 추한 나로 점점 변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 무리와, 그 아이들과 거리를 두려고 했다.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기고, 내가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둔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듯한 아이들을 태연하게 대하는 것은 굉장히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순진한 친구의 우정을 속으로 배신하는 비겁한 남자인가. 아니면 애초에 건전한 사고를 지니지 못한 애들은 친구로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 이런 생각은 내 중학생 당시 머리 아픈 고민들의 흔한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아무래도 이 아이들을 정상적인 친구로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 중 기억나는 가장 충격적이고 불쾌한 일이 있다. 내 초등학교 동창이기도 했던 한 아이는 몸집은 컸지만 성격이 수줍었다. 초등학교 때도 참 귀엽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성격은 반 무리의 리더에게 괴롭힘의 이유가 되기에 충분했다. 어느 날은 점심 시간을 알리는 종이 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였다. 커튼 쪽에 애들이 몰려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다가가 보니 '리더'가 내 동창의 음모를 뽑으려고 하고 있었고, 애들은 그 아이가 못 움직이게 손과 발을 잡고 있었다. 둘 사이에 무슨 사연이 있길래 저러는 건지 그 내막을 상상하다가도, 이건 정말 더러운 행위였다. 그것을 뽑아서 라이터로 태우고, 또 왁자지껄 웃고. 정말 역겨웠다. 내가 늘 어울리는 애들이지만 같이 다니기 쪽팔렸다. 난 그들이 몰려있는 커튼에서 멀찍이 떨어져, 교실 뒤 사물함 위에 앉아 정육면체 큐브를 맞추는 척 했다.


난 동시에 커튼에 몰린 애들에게 그다지 불쾌하지는 않은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혼자가 되는 건 너무 무서웠던 거다. 내가 좋아하던 동창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자신의 음모를 태우는 친구들 앞에서 내 동창이 그다지 큰 수치심을 느끼진 않았을 거라고 내게 최면을 걸며 나는 다시 자신을 방어했다. 유쾌한 표정을 지어내 보이기 위해선 멘탈을 다잡아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더 기분이 더럽고 쥐구멍으로 숨고 싶었던 건, 복도에서 창문을 통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내 초등학교 첫사랑이었다. 차마 이성에게 보일 수 없는 더러운 행동을 하는 무리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나. 물론 커튼에 가려져 있었지만 아마 내 첫사랑도 저들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대충 짐작을 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 애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척 오로지 큐브에만 집중하는 내가 참 한심했다. 첫사랑에게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다니. 정말 죽고 싶었다. 자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딱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여자애들을 성적으로 희롱하는 문화 이외에 또 어처구니 없는 행위가 유행했었다. 스파링. 복싱 스포츠에서 정식 경기가 아닌, 연습으로 싸움을 붙는 일을 말한다. 우리 중학교에서 자주 스파링이 일어났다. 웃긴 건 스파링이 진짜 싸움으로 번지는 일이 별로 없었다는 것. 다리를 걸어 상대를 넘어뜨리는 애가 승리한다. 그게 끝이었다. 단순 장난, 그 이상은 아니었다. 뒤끝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럼 아무 문제가 없었던 걸까? 적어도 학교에서 유행해서는 안 되는 문화였음은 확실하다. 나는 중학생 때도 여전히 모범생이었고, 학교에서 재미로 싸움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싸우고, 웃고, 부러워 하고. 보통 점심 시간에 스파링 주최자와 스파링 참가자, 그리고 그들과 친한 관객들이 한 반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경기가 치뤄졌다.


난 도대체가 쟤네들이 무슨 생각으로 사나 파악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상한 건가. 싸움을 재미로 할 수 있는 건가. 어리니까, 혹은 남자라면 스파링 정도는 할 수 있는 건가. 그냥 나는 혼자였던 것 같다. 주구장창 앉아서 조용히 공부하는 애들은 고리타분했고, 조그맣게 어울리는 애들은 소심해 보였다. 활발하고 재미 있는 애들은 스파링을 했다. 나는 어느 무리에도 속하고 싶지 않았다. 다 싫었고 짜증났다. '세상은 왜 이리 바보 같냐.' '다들 왜 이렇게 한심하냐.' 세상에 대해 부모님은 속 좋은 소리만 하는데, 내가 다니는 중학교는 부모님의 생각과 전혀 딴판이었다. 이것은 내가 부모님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계기가 되었다.


2학년 때도 여전히 우리 학교는 난장판이었다. 어떤 남자애는 여자애를 억지로 자기 무릎에 앉히고. 그 여자애는 화를 내거나 정색하기는 커녕 웃기만 하고. 속마음이 실제로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여자애한테 호감이 있던 나로서는 상당히 배신감이 드는 장면이였다. 내가 좋아하는 앤데, 그렇게 가볍게 자신의 몸을 허락하다니. 아무리 장난이라도 너무 심해보였다. 그 중학교여서인지, 중학생 때라서 그런 건지 몰라도 그때의 그곳은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다. 13년동안 지켜오던 믿음이 매일 깨졌고, 이 세상에 내가 믿을 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잘 나가는' 누구는 수업 시간에 라이터로 책상을 태워 탄 내를 풍기고, 나를 아껴주시던 영어 선생님은 누가 그랬는지 찾지만 반에서 아무도 도와주질 않고. 또 언젠가 현장 체험 학습을 나갈 때 선생님이 같이 탄 버스에서 뒷좌석에 앉은 애들은 담배를 피우고. 나머지 아이들이 연기를 마시든 말든. 체육 시간에 축구할 때는 싸움 잘하는 애가 공을 몰면 나머지 아이들은 비켜줘야 했다.


언젠가부터 다른 학교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들이 내게는 자연스럽게 생각되기 시작했다. 노골적으로 선생님을 무시하는 반 아이들을 보고 반장으로서 선도하기는 커녕 같이 따라 웃고 교권을 추락시키는 데 동참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나는 '아, 내 인생 망했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딱히 적극적으로 나서서 아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선생님의 권위를 세워준다거나 하는 거창한 행동을 하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 마음가짐의 변화가 있었다. 앞으로 내가 어떤 사회에 속하든 그 집단과 쉽게 동화되지 말 것. 진심으로 어울리기 이전에 거리를 두고 그들의 행동이 옳은지 늘 의심할 것. 이 다짐은 내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한 후 전학 간 중학교에서, 고등학교에서, 그리고 어쩌면 대학교에서도 친구들로부터 거리를 둔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상대가 누가 봐도 정의롭고 선하다고 생각되지 않으면 나는 그와 어울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예전의 부끄러운 내 모습을 다시 반복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주욱 혼자였다. 누구의 눈에는 서로 잘 어울려 다니는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그리고 나와 어느 정도 교감을 나눈다고 생각하는 친구가 몇 명 있었을지 몰라도, 나는 마음 놓고 내 진심을 내보인 친구가 초등학교 이후로, 그러니까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없다. 중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그래도 내 진짜 마음을 보여주려고 많이 노력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애초에 나는 커다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공부만 하는 아이라는, 스스로와 친구들에게의 기만. 내가 실은 재밌는 아이였다는 사실을 들키면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질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이제 초등학생이 아니니까 친구들과 노는 건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재미 없게 행동하고, 공부 이외의 것엔 관심 없는 척을 했었다. 거짓이었다. 애초에 나는 공부에 집중하기로 마음 먹은 때부터 솔직한 사람이기를 포기했던 건지도 모른다. 솔직하지 않아야, 재밌게 놀거나 여자친구를 사귀거나 철 없는 행동을 하지 않아야 어쨌든 공부와 가까워지고 궁극적으로는 내가 원하는 미래에 가까워질 거라고 생각했었다.




수능이 끝나면 난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를 위안하곤 했었는데,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대학교를 가게 되었고, 역시 중심은 공부였다. 학점을 잘 받고 장학금을 받기 위해선, 좋은 학생 좋은 아들이 되기 위해선 여전히 스스로를 속이고 친구들을 속여야 했다. 더 이상 속이는 게 싫어서 나는 1학년 2학기 등록금을 내고도 개강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학교에 나가지 않기 시작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더 이상 살기 싫었다. 공부하기 싫은 게 아니라 살기가 싫었다. 거짓 투성이 삶에는 친구도 없고 사랑도 없고 나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모르겠다. 내가 중학교 다니는 어릴 때 내렸던 결정이 옳았는지. 이렇게 살아왔어야만 했는지. 외롭고 거짓으로 점철된 삶밖에는 살 수 없었던 건지. 아픈 경험에 대해서 억울한 마음은 없다. 상처로 얼룩진 내 중학교 시절의 기억도 어쨌든 내 삶에 의미와 가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얼마나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고, 얼마나 추락할 수 있는지 깨닫게 해준 시간이었다. 당시에는 자존심도 많이 상했고 스스로에게 실망도 많이 했지만, 지금은 자기방어 기술이 발달해선지는 몰라도 그때보단 자괴감이 덜하다. 내가 아닌 누구라도 그때 나의 상황에 처하면 비슷하게 행동했을 거라고, 나만 그런 게 아닐 거라고 날 위로한다. 또 나만큼 힘든 날들을 버텨낸 사람은 별로 없을 거라고 나를 치켜세운다. 사실이다. 난 말 그대로 죽을 만큼 힘들었고, 그래도 꿋꿋이 버텨냈다. 사람이 인생에서 겪을 행복의 양이 정해져 있다면, 나는 이제 행복할 일만 남은 거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글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