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본 듯한 상상 속 세계

바르셀로나, 호안 미로 미술관

by 나예

도착하자마자 "우와, 좋다! 멋있다!"가 바로 나오지않았던건 긴 긴 비행에 너무 지쳐버려서일지도, 너무 큰 기대를 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니 바르셀로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좋아지는 곳이었던 것 같다. 수많은 관광객과 이방인으로 넘쳐나는 곳이건만, 그 누구에게도 위화감은 들지 않았다. 이 곳은 어느날 갑자기 누구를 데려다 시내 한복판에 세워놔도 어색할 것 같지 않은, 희안한 관용(하지만 실제로 이곳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의 도시다. 가우디의 명성 덕에 화려하게만 보였던 도시는 생각보다 얌전하고 수수해서 더욱 편안했다.


좁아터진 비행기에서 15시간여를 고문당해 만신창이가 된 몸뚱아리를 이끌고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호안 미로 미술관 이었다. '푸니쿨라' 라고 불리는 등산 열차를 타고 언덕을 올라 찾은 이 곳에서는 마치 어린 아이가 그린 것처럼 동심이 듬뿍 담긴(그리고 보니 피카소도 무척이나 어린아이처럼 그리고 싶어했었다.) 그의 작품 300여점을 볼 수 있었다.


호안 미로는 스페인 20세기 추상미술과 초현실주의의 대표격인 화가이자 조각가이자 도예가이자 판화가인 남자, 꿈 속에서나 떠 다닐 듯한 뭔지 모를 대상들을 단순명료하고 강렬한 색채와 곡선을 통해 율동이 느껴지는 듯 표현하는데 평생을 보낸 남자다. 사람이 뭔가를 좋아하고 싫어하는데 구체적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피카소보단 미로를 더 좋아하는데 예전에 한 두 번 정도 그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나름대로 정리해서 내린 결론. 미로의 작품에 등장하는 형태들은 몽환적이고 환상적이면서도 어디선가 한 번 쯤 본 듯 해서 크게 낯설거나 충격적이지가 않달까. 덕분에 한결 편안하게 볼 수 있는 것 같다. 일종의 데자뷰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같고. 하지만 '어디선가 본 듯 한 상상 속 세계'라니 그 말 자체가 몹시 모순적이긴 하다.

※ 미술관 내부는 촬영이 금지되어있다.


미술관 자체가 워낙 언덕 위에 위치한 곳이라 옥상에서는 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였다.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고도 제한이 있는 곳이라 삐죽삐죽 튀어나온 곳이 전혀 없다. 오늘은 여정의 첫번째 날. 그러니까 우선은 통으로 바라볼테다. 대신 내일부터는 저 집들 사이를 굽이굽이 누비고 다니리라.


그림이나 시는 사랑, 즉 완전한 포용을 경험할 때 만들어진다.

- 호안 미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