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책 출간을 준비하면서 만난 출판사 담당자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왜 책 출간을 하려고 하시는거에요? 변호사가 법률 자문 관련 책을 낸다거나 교수들이 자기 연구 분야에 대한 책을 내는 것은 본인 커리어에 큰 도움이 되지만 작가님은 딱히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제가 경험하고 느낀 것들이 너무 좋았어서 그걸 공유하고 싶어서요."
"그 말은 그냥 자기 만족이라는 거네요."
저 순간에는 '자기 만족'이라는 말이 너무나 사치스럽고 간지럽게 느껴져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는데 뒤돌아서 생각하니 슬며시 부아가 치미는거다. 세상 일 중 과연 '자기 만족'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나? 그리고 나의 직업적 커리어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일만이 의미있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세상 모든 작가들이 자기 커리어에 한 줄을 더하고자 글을 쓰는 것은 아닐텐데.
그 때에 비해 지금의 나는 훨씬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작가라는 타이틀 상으로도 그렇고 나이도 몇 살 더 먹으면서 더 많은 일들을 겪어 마음도 조금 더 단단해졌다.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됐고 '쟤가 한 때 저러다 말겠지' 했던 주변 지인들의 태도도 많이 바뀌었다. 무엇보다 내 글을 좋아해주는 사람들도 생겼다.
저 대화를 하던 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꼭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자기 만족이 대체 어때서요?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담당자가 초고를 제대로 검토하기도 전에 나온 질문이었다.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몇 명인가요? 일단 최소 10,000명은 만들고 오세요. 거기서 10%가 구매해줘야 1,000부니까 1쇄 정도 되겠네요."
"본인이 연예인이거나 유명인이에요? 여행 에세이는 유명인이나 낼 수 있어요."
작가의 길로 들어서기 직전과 간신히 그 길로 들어선 초반에는 비슷한 이야기를 건넨 출판사가 꽤 되었다. 출판사도 금전적으로 이익을 내야하는 곳이니까 무명보다는 유명인과 일하는게 편할테고 저자도 책 출간 이후 손 놓고 마냥 놀고 있을 수는 없겠지만(기본적으로 나는 그렇게 속 편한 성격도 못된다) 기본적으로 책을 홍보하고 파는 것은 출판사의 역할인데 그 역할을 저자의 유명세에만 오롯이 미루겠다는 것은 일종의 책임전가에 가깝다. '좋은 책은 독자들이 저절로 알아줄거야' 하는 희망만 가지고 홍보와 영업에 손 놓고 있는 것도 문제지만 솔직히 저런 이야기를 하는 출판사가 생각보다 많아서 놀랐고, 더 솔직히 말해보자면 저런걸 직접적으로 대놓고 요구해와서 더 놀랐다. 출판사의 책임을 은근히 미루는게 아니라 직접적으로 '10,000명' 같은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한다는게. 어느 업계나 인플루언서를 원하는 마음이야 비슷하겠지만 그 때는 내가 더 순진하기도 했으니까. 이제와서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깜짝 놀라곤 하는데 아마 '책 읽는 사람'에 대한 선입견이 있듯이 '출판 업계는 안 그럴 거야' 같은 환상도 있는 모양이다. 지금은 저런 소리를 들으면 듣고 거를 수 있게도 되었고 때에 따라선 "그런데 출판사 계정이 제 개인 계정보다 팔로워가 더 적네요"라고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쓰고보니 나 녀석, 참 많이 컸다.
예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많이 컸다는 것일 뿐 안타깝게도 내가 그동안 대단한 글을 썼다거나 책을 엄청나게 팔았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나는 무명이고 내 책은 소소하게 팔린다. 나도 사람이고 밥벌이는 생존이니까 그런 객관적인 수치들에 있어 아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요 몇 년 간 나에게 찾아온 긍정적인 변화들로 인해 앞으로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 이전보다 약간은 생겼달까, 그 믿음이 마음의 중심을 잡아준다. 방황하고 흔들릴 때도 있지만 중심 추가 있으면 언젠간 다시 중심을 잡는 것처럼. 잠시 읽는 일과 쓰는 일을 멀리하고 한 눈을 팔다가도 다시금 책을 손에 쥐고 곧내 키보드를 두드리게 된다. 쓰는 일을 쉬다 보면 '아아, 뭔가 쓰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현실 세계에서 수다스러운 타입은 아닌데 아마 할 말을 말 대신 글로 전부 해버려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여태까지 썼던 다섯 권의 책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여행을 소재로 했기 때문에 나는 쉬이 '여행 작가'로 불린다. 최근 몇 년간 여행은 우리의 일상 깊숙이 들어와 있었지만 급작스레 전세계를 강타한 전염병으로 인해 일명 '여행의 종말'까지 고해진 요즘, 여행 작가들을 포함해 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고민이 깊다. 나 또한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지 좀 더 숙고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평생 여행에 대한 글만 쓸게 아니라면 한 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주제이고, 조금 이르지만 이제는 꼭 여행이 아니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누군가 알아주고 지지해주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지만
딱히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그럭저럭 괜찮다는 마음으로,
그럼에도 계속해 나갈 것이다.
이 일은 내가 오래할 수 있는 일이고 또 좋아하는 일이니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본문에 언급한 출판사와 진행하던 계약은 중간에 엎어졌고 두번째 책은 다른 출판사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