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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 Aug 04. 2023

나를 위해 읽는다, 문해력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마까르의 꿈_러시아 단편

수도 없이 많은 책을, 단편들을 읽었다. 그 책들은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그 책들은 과연 나를 이루는 조각이 되었을까? 조각이 되었다면 어떤 부분에 들어맞는 어떤 조각이 되었을까?




그간 시장에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수 많은 자기계발서를 보며 그닥 공감하지 못했다. 어차피 끊임없이 뭔가를 배우고 공부하고 애쓰면서 살아야하는데 책조차도 공부하는 자세로 읽고 하나의 노동처럼, 내가 해내야하는 과업 중 하나의 자리에 둬야 한다는게 싫었다. 어차피 개개인이 처한 상황은 모두 다른데, 책에서 이렇게 하세요- 라고 한다고 해서 그게 내 경우에도 꼭 들어맞는건 아니잖아, 싶었고 내 상황은 내가 제일 잘 알아! 라는 알량한 자존심도 있었다.


여전히 나는 책은 하나의 취미이자 놀이라고 생각한다. “그만 놀아! 공부해! (혹은 일해!)”에서 도매급으로 폄하되는 그런 놀이가 아니라는 차이는 있을 수도 있겠다. 뭐가 됐든 분명한건 나는 책을 재미로 본다는 것이다. 가끔 아주 재미없는 책을 고르게 되면 ‘아 정말 재미없네. 돈 아깝다’하고 만다. 책을 두고 ‘배울게 없네, 돈 아깝다’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세상 모든 것을 ‘배움’, 더 나아가 ‘가성비 있는 배움’으로 보고 살게 되면 몹시 피곤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책들은 내 안에서 끊임없이 쌓여 무언가가 되었다. 그러려고 의도하고 읽은 것은 아니지만 읽다보니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정신없이 놀다보니 절로 공부가 되었어요! 정도랄까. 


나는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자산은 ‘맥락을 읽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쉽게 말하면 눈치고, 고급스럽게 포장한 요즘 말로는 문해력이다. 문해력이란 그 글 자체의 표면적인 의미를 1차적으로 파악하고 더 나아가 그 이면에 숨겨진 의도를 캐치하는 것이다. 다양한 맥락을 고려할 수 있고 이를 정확한 추론으로까지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하는 능력 또한 포함이다. 단순히 글을 읽을 수 있느냐 없느냐와는 차원이 다른 개념이다. 험한 세상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야 할 내 아이에게 가장 잘 알려주고 싶은 능력 중 하나기도 하다. 나는 지식이 백과사전급이어도 맥락을,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면 그 삶은 그닥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읽는 행위가 단기간에 문해력을 급 상승시켜주는 족집게 과외는 절대 아니다. 오늘 당장 시작하자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2주 안에 문해력 완성 가능합니다!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문해력은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글을 읽으면서 조금씩 키울 수 있는 능력이다. 특별한 비법이 없고 왕도가 없다. 그럼 누군가는 전 이미 늦은건가요? 라고 물을 지도 모른다. 그건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늘의 나보다 내일의 내가 눈꼽만큼이라도 나아진다면, 그것이야 말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커다란 힘이 되어주는 것 아닐까. 더군다나 나는 엄마이고, 내 아이에게 있어 전방위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는 ‘인플루언서’이기 때문에 내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내 아이에게 여러모로 좋을거라는 믿음도 있다.


일단 나를 위해 읽는다, 나만을 위한 시간을 낸다는 것은 자기계발의 기본이다. 누군가는 책을 읽을 때 그 책이 담고있는 지식에 초점을 둘 것이고 누군가는 재미에 초점을 두겠지만 뭐가 됐든 읽는 과정에서 문해력은 조금씩 자라난다. 어쩌면 나는 자기계발에 무관심해왔던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아주 오랜 기간 나도 모르게 꾸준히 자기계발을 해온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 무엇을 읽으면 좋을까?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겠다. 우선은 짧은 이야기, 그 중에서도 단편 소설을 읽는 것을 권한다. 매일매일 회사를 다니고 남편과 아이와 반려동물과 반려식물들을 케어하고 집안 살림을 꾸리는, 이 모든 일들을 숨가쁘게 병행하면서 온전히 책읽기만을 위해 긴 시간을 빼기는 힘드니까, 역시 짧게 집중해서 후다닥 읽고 결론까지 볼 수 있는 짧은 이야기가 좋다. 특히 내 경우엔 아이가 태어난 후로 진득하게 앉아 책을 읽을 시간이 정말이지 단 1분도 없는게 현실이다. 주위를 보면 아이가 일단 밤잠에 들고나면, 소위 '육퇴'를 하고나면 드디어 나만의 시간이야!를 외치며 뭔가를 하는 것 같기도 한데 우리집 아이는 잠 드는 시간이 12시. 이미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시점에야 간신히 잠이 든다. 이 정도면 늦게 자는건지 일찍 자는건지 모르겠을 수준인데 뭐가 됐든 내가 이 시간에 뭔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간 다음날 출근에 지장이 있을 수밖에 없기에, 침대에 누워 아주 잠깐 책을 읽다 기절하는게 지난 3년 동안 해온 나의 책읽기 루틴이다.


이런 방식의 책읽기에 장편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잠깐잠깐씩 짬을 내어 하는 자투리 독서. 수많은 날들을 합해가며 간신히 한 권의 책을 읽어내는데, 긴 이야기의 경우엔 어쩔 도리 없이 앞 부분의 이야기를 자꾸만 잊어버린다. 특히 대하 드라마처럼 수많은 인물이 쏟아져나오는 경우엔 말 그대로 아득해진다. 특히 그 이름이 러시아식 이름이라거나 할 땐 더 그렇다. 아젤라이다 이바노브나 미우소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 베르호브체바 같은 인물들이 일단 등장을 시작하면 이바노브나가 아까도 있지않았나? 아니었나? 근데 아그라페나 알렉산드로브나 스베틀로바? 이 사람은 누구였더라? 하는 일이 무한 반복된다. 매일 밤 다시 앞으로 돌아가 이 사람이 누구였더라, 어디 나왔었더라..? 만 찾다 끝나버리는 일이 다반사다. <수학의 정석>에서 집합 부분만 새카매졌던 그런 과오를 이 나이가 되어서도 반복하는 꼴이다.


역시 가장 좋은 방식은 그 날 읽기 시작한 이야기는 그 날 끝내고 깔끔한 마음으로 잠드는 쪽이다. 다시 말해 단편 한 두개 읽고 자기다. "문학 작품은 독자가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짧아야 한다"고 에드가 앨런 포도 말하지 않았던가! 바쁜 일상 속에서도 꾸준히 지속할 수 있는 책읽기를 통한 자기계발의 관점에서 내가 단편 덕후가 된데에는 이러한 애달픈 사연이 있다.


그렇다면 짧은 이야기 중에서도 왜 하필이면 단편 ‘소설’일까? 그건 역시 재미 때문이다. 재미라는 것은 다분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긴 하겠지만 그럼에도 일반적으로 스토리 자체의 재미를 추구한다면 역시 소설만한 것이 없다. 사람사는 이야기 이상으로 재미난 이야기가 세상에 있을 수 있을까? 내가 아주 오래도록, 읽기를 지속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재미’에 있다. 천재는 열심히 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다. 재미 없는 것을 꾸역꾸역 참아내며 읽어낸다고 문해력이 더 많이 길러지는 것은 절대 아님을 잊지말자.


“그렇다면 나도 잠깐 시간을 내어 단편 소설에 도전해볼까? 뭐부터 시작하지?” 싶은 분들에게는 우선 러시아 단편을 추천해본다. 내 기준 러시아 문학의 장점은 바로 '다양성'이다. 러시아에는 엄청나게 넓은 땅덩이와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한층 더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문해력의 핵심은 다양한 맥락을 이해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다양한 입장이 되어보고 다양한 일들을 겪어봐야 한다. 그 사람의 신발을 직접 신어보는게 가장 효과적이긴 하겠지만 매번 그렇게 할 수는 없고 우리에겐 책이 있으니 굳이 그렇게 할 이유도 없다.


초심자들에게 러시아 단편을 권하는 이유는 또 있다. 이 이야기들은 다양한 듯 하면서도 그 안을 관통하는 일종의 유사한 정신 같은 것을 품고 있어서 문해력이 아직은 조금 부족한 이들이 읽어도 비교적 파악이 쉽게 된다. 그런데 심지어 그 메세지가 훌륭하기까지 하다. 그건 바로 “최선을 다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정신이다. 이건 비관주의나 염세주의와는 결이 다른 것이다. 복세편살과도 약간 다르다. 톨스토이의 단편 중 넓은 땅을 갖고 싶은 욕심 때문에 하루 종일 걷던 주인공 '빠홈'이 끝내 심장이 터져 죽음을 맞고, 결국 그에게는 관짝 하나가 묻힐 정도의 땅만 있으면 되었던 것이었더라~ 하고 알려진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이야기를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빠홈이 사실은 “과도한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어. 이 정도면 충분하니 서둘러 돌아가자” 라는 생각을 갖고 중간에 발길을 돌려 출발점으로 되돌아갔다는 점도 함께 기억하고 있을까? 빠홈은 해가 지는 속도와 거리를 치밀하게 계산하는 이성을 바탕으로 최선을 다해 추잡하지 않게 행동했다. 이쯤 되면 그런데도 죽은건가요? 대체 왜죠? 하고 반문할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애당초 인간이 악마를 이길 수는 없기 때문인 것으로 난 해석했다. 이미 처음부터 승패가 정해진 게임이었던 것으로 말이다. 승패가 정해졌다 한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뛰는 이들에게 우리는 “졌잘싸”를 외치며 격려의 박수를 보내지 않는가. 나는 이 이야기의 방점은 “졌잘싸”에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러시아 문학 속의 주인공들은 어차피 안될 상황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인간의 기품을 지킨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하던 누군가의 대사가 절로 떠오른다. 이 정도면 저승에 가서도 항변할 수준은 된다. 이런 내용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를 다룬 단편도 물론 있다. 블라디미르 코롤렌코의 <마까르의 꿈>이라는 이야기다. 농부 마까르는 죽음을 맞아 심판자인 신 앞에 서게 된다. 마까르의 평생에 걸쳐 적힌 장부를 들춰보며 죄의 무게를 가늠한 신은 그에게 무거운 형벌을 내리려 한다. 하지만 마까르는 항변한다. 평생을 권력자와 성직자들의 등쌀에 시달리며 산 것, 아내가 죽고 아들이 강제로 징병에 끌려나가 실종된 상황에서도 공납을 위해 계속 일을 해야했고 가난과 배고픔과 추위와 더위와 홍수와 가뭄 위에서 일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죄를 짓게 되는 현실. 결국 신은 마까르의 일생을 돌아보며 측은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고야 만다. 이 항변 과정 중에는 마까르가 평생에 걸쳐 보드카를 400병이나 마셨으니 그에 합당한 죄값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면도 있다. 하지만 그 보드카 대부분은 업자들이 물을 탄 것이고 심지어는 담배를 우린 물로 만든 가짜도 있으니 그 계산에서 300병은 빼야 한다는 마까르의 주장에 신은 악덕 업자들의 행태에 분노하며 수긍한다. 담배물 보드카라니, 천벌을 받을 놈들은 그 놈들 아닌가!


짧은 시간 동안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고 해서 함의된 내용들조차 가볍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편'이란 하나의 양식일 뿐, 이야기 자체는 가벼운 이야기도 있을 수 있고 무거운 이야기도 있을 수 있다. 뭐가 됐든 다 좋다. 가벼운 이야기든 무거운 이야기든 일단 읽자. 함의된 내용을 알아채는 것이야말로 찐 문해력이라 할 수 있겠지만 우선은 재미만을 느껴도 충분하다. 일단 시작하고 이야기를 읽는 일의 재미부터 충분히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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