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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Mar 24. 2022

화랑미술제를 통해 본  
이승희 작가의 작품세계

문화 & 문명 비평가   문광용

문화 & 문명 비평 

문광용 컬럼




화랑미술제를 통해 본 

이승희 작가의 작품세계와 의식의 양상


지난해 국제아트페어(KIAF;키아프)에서 봤던 이승희 작가의 ‘내면의 빛’ 시리즈인 6점의 작품은 이 작가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난 주에 열렸던 화랑미술제에서 이승희 작가는 단 2점의 작품을 선보였지만 이 또한 저에겐 많은 사색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승희 작가의 ‘내면의 빛’ 시리즈는 작품의 추구방향과 집중력에 있어서 매우 흥미롭습니다. 키아프때 저는 이 작가의 작품을 관능성, 생명성(자연성), 모성을 바탕으로 한 내면적 의식과 중심을 향해가는 방향성으로 보았습니다. 지난 후기에서 나름 소감을 남기긴 했지만 이번 작품을 보니 먼가 더 얘기하고픈 것이 생기더군요. 지난 후기의 외적 측면에 비해 내적 측면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느낀 점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번 두 작품은 주제의식의 연장선에 있으나 확장성과 내면성을 더 짙게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연두색 계열의 첫 번째 작품은 자연의 세계에 대한 함축적 표현으로 볼 수도 있을 겁니다. 더 넓게는 무위자연의 세계를 통한 핵심으로의 접근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무위자연의 세계는 생물, 무생물을 포함한 모든 것이 포함된 질서로운 세계일 겁니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가장 포괄적인 세계이죠. 또한 여기에는 태초의 시간과 우주의 핵심이라는 시공간의 포괄성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와 대비되어 살색 계열의 두 번째 작품은 모성을 담보한 생명의 세계가 강하게 표현되어 있지요. 자연적이고 물리적인 첫 번째 작품의 세계에서 따뜻한 온도를 품은 생명의 세계로 조금 더 구체화되어 있습니다. 생명의 세계의 태초는 신비 그 자체입니다. 이 드넓은 우주로부터 왔으되 그 시초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는 지극히 신비스러운 일이지요. 그러나 확실한 것은 생명의 태초조차 우주로부터 왔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주는 죽어 있지 않고 살아 있다는 말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들에 핀 꽃 한 송이는 아직도 인간문명이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주는 특정 설계도로 특정한 에너지를 부어서, 생명이 깃든 꽃으로 드러냅니다. 이 근원의 방향을 잃지 않는다면 우주의 근원을 향해 탐구해 갈 수 있을 겁니다.



     






예술에 있어서 취향이란 소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영혼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입니다. 어린 영혼은 외적 소재를 대상으로 경험하기 바쁘지만 오래된 성숙한 영혼은 내면으로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이는 수준의 문제라기 보다는 우주와 함께 흘러온 각자의 적절한 배움과 즐김의 시기와도 맞물려 있을 겁니다.


영혼이 적절한 나이가 되기 전까지 내면은 문을 잘 열어주지 않습니다. 세속의 욕망과 성취를 위해 경험하는 때가 있고 이렇다할 물욕이 없이 내면의 동기가 부르는 소리를 따라 사는 때가 있을 겁니다. 무엇이 더 낫고 무엇이 나쁜 것이 아니라 적절한 때가 되어 자기답게 사는 길을 잘 찾는게 중요할 뿐입니다.


이승희 작가는 ‘내면의 빛’ 시리즈를 통해 꾸준히 내면의 의식과 그 근원의 중심을 향한 탐구를 멈추지 않는 예술가입니다. 자연이나 문명을 소재로 해서도 이런 주제를 탐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작가는 이미 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온 상태에서, 마치 면벽하는 수도승처럼 내면의 중심을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있습니다. 오래전 큰 도를 깨우치기 위해서는 ‘윤집궐중(允執厥中; 오직 가운데를 붙잡고 놓치지 말라)’ 하라는 선인의 말씀이 그대로 연상됩니다.


내면의 집중과 탐구는 직관이나 영감 등으로 출발하지만 이의 지속적인 탐구는 에너지의 중심을 형성합니다. 내면에는 천부적으로 부여된 아주 작은 빛이 있지만 이 빛은 나의 현세의식과 트라우마와 인위적, 외향적 습관의 두께로 인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절한 영혼의 때가 되면 조금씩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이 드러남은 스스로가 의식하고 탐구하고 집중함으로써 더 빛을 낼 겁니다. 이는 마치 플라톤의 동굴 우화와도 같습니다. 동굴 바깥에선 내부로 빛을 투과하지만 사람들은 빛이 비추는 쪽으로 앉아 있지 않고 그늘이 많이 진 쪽으로 앉아 있습니다. 대부분 어두운 곳만 바라보며 간신히 사물과 대상을 인식할 뿐입니다. 그러나 내면의 의식이 깨인 존재는 빛이 아주 조금만 비추어도 바로 몸을 반대로 움직여 빛이 오는 쪽을 주시하게 됩니다. 그 빛이 더 환히 들어오게 만드는 것은 빛을 먼저 인식하는 자의 의식과 행동에 달려 있습니다. 빛이 존재함을 인식하고 빛을 내면에 담으며 빛을 주위에 알리는 존재는 빛의 사제와도 같습니다. 이는 결국 예술을 통해 삶과 세계의 근원을 알려주는 예술가가 있다면 바로 그의 역할이 사제와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일부이고 외적 세계는 내적 세계의 일부일 뿐입니다. 거미가 실을 뽑아서 자신보다 큰 세계를 형성하지만 거미의 마음은 설계도의 큰 그림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인간은 더할 겁니다. 롯데월드타워의 엄청나게 높은 건물조차도 내면의 마음에서 보자면 수십수만페이지의 설계도를 담을 수 있는 마음의 한 페이지도 안 될 겁니다. 의식의 세계가 우주만큼 넓은 것은 내면을 집중적으로 지속해서 들여다봐야 전모의 일부가 보일 겁니다.


자연과 문명을 소재로 한 예술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그것 역시 중요하지만 내면의 마음을 고도화한 추상화 역시 그 이상으로 중요할 겁니다. 이때의 예술가는 자연과 우주를 이어주는 사제로서의 모습을 더 본격적으로 드러냅니다. 내면의 빛은 내면의 중심으로 향하고 내면의 중심은 의식으로 향합니다. 우주만큼 넓은 광활한 의식의 세계에도 불구하고 중심으로 가는 길은 있을 겁니다. 그쪽으로 가까이 갈수록 이 세계가 별개가 아니고 생명과 무생물이 별개가 아니고 태초와 지금이 별개가 아니고 안드로메다 은하와 우리 은하가 별개가 아님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이의 과정은 인간적인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마저 놓아버리고 핵심에 다가갈 때가 올 겁니다. 나 자신을 제어하고 있는 하위의식이 어떤지 상위의식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무얼 해야 하는지 스스로 충분히 길을 걸어갈 수 있을 때가 올 겁니다. 상위의식의 상단으로 가면 그 빈 곳의 자리가 텅 빈 자리가 아니라 온갖 세계를 배태하는 창조의 자리임을 느낄 때가 올 겁니다. 이미 그 길을 걷고 있는 숨어 있는, 그러나 적지 않은 이들이 많으니까요. 사실 이를 위한 촉매로써 우리 각자는 취향과 근기에 맞게 교회에 가고 절에 가며 혹은 홀로 수행하며 혹은 자연에서 노닐며 혹은 예술작품에서 그 계기를 마련합니다.


이승희 작가의 작품은 추상적이지만 직관적입니다. 취향에 맞는 이들은 내면의 탐구를 얘기하는 작품을 만났다고 반가워 할 겁니다. 한편으로 이 작가의 작품은 수행자들이 수행의 지속성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이용하는 묵주나 염주와도 같습니다. 삶의 외적인 측면은 온갖 호화찬란한 것들로 외피를 입기 마련이어서 한눈 팔기 쉬운 법인데 묵주처럼 늘 손에 지니고 있으면 깜빡 하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거나 바로 되돌아오기 마련이지요. 아마도 이 작가의 작품이 집안의 벽에 걸려 있다면 내면의 탐구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이들에겐 삼천포로 오랫동안 빠지지 않고 다시 제자리의 중심으로 돌아오는 등대의 역할을 할 지도 모릅니다.


우주의 머나먼 시간 속에서, 넓고 넓은 공간 속에서 인간은 한낱 미물처럼 보이지만 우주의 시간과 함께 흘러가는 동행자입니다. 영혼의 존재를 믿든 안 믿든 나는 분명히 우주의 일부로서 역할과 쓰임새를 달리 할 뿐 영원히 같이 흘러갈 겁니다. 그 역할이 중심에 있든 가장자리에 있든 나이가 어리든 많든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만 대략이라도 짐작할 수 있다면 두려움없이 용기를 가지고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가장자리에 있더라도 중심으로 가는 것은 결국 시간문제일 뿐이지요. 그 과정에서 예술은 친구처럼 위안과 공감을 주는 존재일 겁니다. 토스토에프스키가 얘기했던 것처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이지요.


작품전시에 초대해 주셔서 의식의 세계를 일깨워주고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 주신 이승희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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