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예술가
핵심 예술가
카잔자키스
언젠가 젊은 날,
'그리스인 조르바'를 재미있게 읽었다.
생동감을 주는 책이었다.
작가의 다른 책도 발취해서 읽어 봤는데
역시 그의 글은 뜨끈뜨끈 했다.
속도감도 있고...
'그리스인 조르바'를 집필한 작가는
자유 구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니코스 카잔자키스'(1883년 ~ 1957년)이다.
그의 소설 '미할리스 대장'이 발간되자
그리스 정교회는 맹렬히 카잔자키를 비난했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도 '최후의 유혹'을
금서 목록에 올렸다.
작가에 대한 '알베르 카뮈'의 한 줄 평은
"나보다 백 번은 더 노벨 문학상을
받았어야 할 위대한 작가이다."이다.
카잔자키스가 노벨 문학상 후보에
여러 차례 올랐지만
종교계의 반대 투서로 매번 좌절되었다.
나의 파리 유학 시절 중
그의 문제작 '최후의 유혹'이
영화화되어 상영된 적이 있다.
종교계에서 상영관에
악취제를 뿌리는 해프닝도 있었다.
내가 그 영화를 본 것은
구세주를 인간 예수로 다룬 그 영화의 내용보다는
주연 배우가 내가 좋아했던
'윌렘 대포'였기 때문이었다.
처음 이 카잔자키스의 작품을 접했을 때는
그리스의 위치 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동서양에 구애받지 않는 상황에 있어서
동서양을 넘나드는 그의 진리 탐구가
맘에 들었었다.
그런 작가는 세계적으로 참 드물어서
소중하다고 까지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의 전체적 종교와 정치 성향과
최후의 그가 결정한 작가 의식을 알고는
실망스러운 점이 생기게 되었다.
그의 내면은 이러하다.
난폭한 아버지의 학대로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갖고 있어서
자유를 갈망하던 그가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자유보다는
트라우마를 더 하게 되어
불교에 위안을 얻게 된다.
그러나 결정적인 치유는 그리스 평민
조르바를 만남으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 표피적인 치유를 참 자유라 오인하고
정신적인 자유에 만족을 얻게 된 것이다.
미학적인 견해로 보자면,
종교적으로 문학의 깊이를
좀 더 깊게 갈 수 있는 상황에서
달콤한 현실에 안주해 버린 것이다.
그에게는 트라우마를 벗어나
정신적 자유를 얻는 것만으로도 대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적인 면에서는
사상적으로 어느 시대의 작가보다 뛰어날 작가를
천국의 문 앞에서 잃어버린 격이다.
이런 얘기는 같은 그리스인 플라톤 이후
서구 철학과 문화 전반적으로 그들의 사상은
정신적인 국면까지라 여겨지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영적인 사고를 할 뇌가 부족하다고나 할까?
종교에서는 생각을 떨쳐 버리고
신과의 합일을 원하는데
그들은 깊은 생각으로
신과의 합일을 꾀하려 한다는 모순 말이다.
그 모순 때문에
그들은 철학이 발전한 것이고
철학 언저리에서 계속 맴돌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작가 개인의 원인은
작가 내면의 에고의 속삭임을
이겨내지 못했음을 뜻한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 조르바에서 보여주듯
모든 것을 떠나서
현실과 자유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시켜 준 점이 커다란 성과임에는
누구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종교인이 아니지 않은가.
예술 영화라 할 수는 없지만
카잔자키스 생애를 그린 영화
한 편을 보게 되었다.
그의 마지막 유작인 '영혼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그의 요약된 생애에 대한 영화 '카잔자키스'이다.
https://youtu.be/j0bGwG_JEOE?t=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