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과 『타자의 추방』
한적한 바닷가를 배경 삼은 한 민박집이 있습니다. 이름은 하마다. 주인공 타에코는 휴가차 이 곳을 찾습니다. 그런데 하마다 민박을 지키는 사람들, 어딘지 모르게 수상합니다. 아침마다 방을 찾아와 알람시계처럼 타에코의 단잠을 깨우고 정체불명 단체 체조를 춥니다. 그 후엔? 밥 먹는 일이 전부인듯 합니다. 근처 관광지를 물어도 관광할 곳은 없다며 '사색'을 들먹이기만 합니다. 자신의 스타일과 맞지 않다고 여긴 타에코는 결국 다른 거처를 찾아 떠납니다.
여기서 잠시, 2012년 『피로사회』라는 저서로 철학계 신성으로 떠오른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사유를 나눠봅니다. 한병철은 가장 최근의 저서 『타자의 추방』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시대정신을 끈질기게 비판합니다. 비판 대상은 '성과주체'라는 개념입니다.
우선 그는 근대에는 타자(대개 권력을 가진 한 기획자)가 노동을 강요하고 감시하는 규율사회였다면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자발적으로 자신을 몰아붙여 생산성을 증대하는 성과사회로 변모했다고 분석합니다. 보통 우리는 이것을 진보라고 여길 것입니다. 'You must ~'가 아닌 'I can do it', 'We can do it' 이라는 자유의지가 천명되는 느낌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런 내면화된 성과주의를 경계합니다. 자기 부담을 짊어져야 하는 이 시대의 자기 경영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된다고 말입니다. 실제 우리는 경험합니다. 1분 1초라도 허비하지 않고 시간 활용을 잘 해야 한다는 강박, 쉬면서도 자기계발하는 생산성을 발휘하지 못하면 쓸모 없다는 강박 등에 사로잡힙니다. 그 누가 채찍질하지 않아도. 씁쓸한 자화상입니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올까요. 하마다를 떠나 다른 거처를 찾은 타에코는 '자기 착취의 역설'을 깨닫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그곳은 하루종일 밭일을 하고 책을 보는 컨셉이라고 합니다. 자연체험을 명분으로 협력과 존중의 가치를 배운다지만 쉼에서도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은근한 압박이 그녀를 우두망찰 돌아서게 합니다. 책을 잔뜩 실은 짐도 모두 버려둔 채. 변화는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봄의 전령처럼 하마다를 해마다 찾는 빙수 아줌마 사쿠라(공교롭게 이름도 벚꽃이네요)에게 동화되며 조급함을 버리고 기다림을 터득합니다. 팥을 삶는 비법에 비밀이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미처 설명하지 못했던 복선 하나도 있었군요. 처음 타에코가 공항에서 하마다 민박까지 찾아오는 길을 표시한 약도는 극단적일 정도로 많은 요소들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 지도를 보고도 헤매지 않고 찾아온 손님으로서 인정받습니다. 그리고 여기(하마다)에 있을 재능이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듣습니다. 결국 타에코는 자기 부담을 다 버리고 하마다에 머무를 운명이었나봅니다. 그 재능을 이미 증명했던 그녀는 마지막에 안경을 툭 떨구는 것으로 화답합니다. 많은 것이 지워진 약도를 본 것처럼, 세상을 선명하고 자세하게 보는 도구인 안경을 버리고 흐릿한대로 받아들여 보려 합니다. 내면이든 무엇이든 가득 채우기만 하려는 현실에서 생략법을 아는 것은 꽤나 어렵겠지만.
마침 멍때리기 대회가 떠오르는군요. 2014년부터 올해까지 서울에서 개최되어 인기를 끈 행사였습니다. '누가누가 넋을 잘 잃나'라는 하도 기발한 컨셉이라 처음 열릴때부터 관심있게 지켜봤는데 왠지 저도 내년 참가를 목표로 도전의식을 불태우게 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을 온전히 내려 놓는게 의외로 쉽지 않으리라 여겨지면서도 말입니다. 일단 멀리 내다볼 필요도 없습니다. 코앞에 좋은 기회가 다가왔죠. 시기적으로나마 모두 벗어던지기 쉬운 황금 연휴가 곧 펼쳐집니다. 과연 우리는 단 하루라도, 단 몇 분이라도 멍때리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안경>
감독: 오기가미 나오코
출연: 고바야시 사토미, 이치카와 미카코, 카세 료
개봉: 2007.11.29
『타자의 추방』
저자: 한병철
출판: 문학과지성사
발행: 2017.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