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에서야 돌이켜보니 지난 두 달간은 ‘시간’을 생각할 일이 참 많았네요. 어쩐지 허무하게 보낸 2020년의 여름을 지나 가을에 접어들어 문득 깨달은 사실입니다.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니, 앞으로만 나아가는 시간이 참 야속했던 모양입니다. 시간의 일방향성을 거스르고자 했던 상상력이 다시 그리워진 걸 보니까요.
#1. 8월 1일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컨택트>를 본 날입니다. 2017년 개봉 당시의 첫 관람에 이미 큰 충격을 받았던 영화를 곱씹은 순간입니다. 미지의 외계 생명체와 인간이 만난다는 영화의 소재는 지레 스펙터클한 대립각을 떠올리게 만들지만, 그 상상을 아주 멋지게 배반하는 이 작품은 거듭 색다른 체험을 선사하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원인과 결과에 따라’ 혹은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선형적인 시간관을 따르는 인간에게 (그 관념의 전복이 가능한) 선물이 주어지는 이야기. 동시다발적으로 얽히고설킨 문장 전체를 단숨에 뿜는 ‘헵타포드어의 이미지가 상징하는 능력’은 언제봐도 놀랍달까요.
#2. 8월 9일
알랭 레네 감독의 <히로시마 내 사랑>을 통해 시간이라는 대상을 재소환해봅니다.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히로시마에서 만난 두 남녀가 주인공. 그들은 ‘시간을 공간화’합니다. 과거 프랑스 느베르에서 겪었던 전쟁의 아픔을 현재 일본 히로시마에서 그대로 복기하며 “(히로시마의 아픔을) 나는 다 봤다”라고 전하는 여자의 모습은, 과거가 현재에도 상존하는 문제임을 어필합니다. 아니, 감독은 오히려 과거는 없다고 말하죠. 영원한 현재만 있을 뿐이라고. 그래서 현재에 있는 대상을 자꾸 과거의 남자와 동일시하며 “당신은 죽었다”고 표현하는 장면이 반복됩니다. 결국 시간은 흘러오고 흘러가는 것이 아님을. 여기에도, 저기에도 지금 그 자리에 박제되고 있는 공간과 같음을 깨닫도록 합니다.
#3. 8월 26일, 9월 2일, 9월 25일
어쩌다 다회차 관람을 하게 된 <테넷>이네요. 난해한 물리학 개념을 모두 거두고 보니 비로소 선명하게 다가오는 메시지,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물론 궁금증은 이어집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의 서사를 바로 잡으려는 시도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전작 <덩케르크>에서 의외의 힌트를 얻습니다. 성공적으로 실패(?)한 역사를 재현한 그의 선택은, 이미 정해진 결과일지언정 그 종착에 닿아가는 과정을 보다 선한 방향으로 수행하는 일과 맞닿습니다. 누구도 아닌 아무개의 과거사를 스크린에 펼쳤던 감독의 작업. 시간을 회귀하던 닐이 이름 없는 주인공과 스치듯 조우하며 보여준 활약상과 비슷해 보인다는 뜬금없는 연결고리를 찾아봅니다. 단 이 모든 걸 떠나, 역으로 되감기는 시간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쾌감이 우선이었지만요.
#4. 9월 30일
그리고 돌고 돌아 「네 인생의 이야기」로 와 원점입니다. 영화 <컨택트>의 원작이 된 이 소설은, 여름부터 깊이 재고하게 된 시간관념을 매듭짓는 텍스트가 되었네요. “(인류는) 어떤 순간이 다음 순간을 낳고, 원인과 결과는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연쇄 반응을 만들어내는 것.” “이와는 대조적으로, (헵타포드는) …… 최소화나 최대화라는 목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가장 처음과 가장 마지막의 상태를 알아야 하는 것”, 다시 말해 “원인이 시작되기 전에 결과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게 되는 것.”(p.207) 그리고 어쩌면 영화에서 확인했던 ‘헵타포드어의 이미지가 상징하는 능력’은 단순히 미래를 아는 것이 아닌, 미래를 알고 있음에도 행하는 것에 방점이 찍혀있겠다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시간에 저항하는 갖가지 방법을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오히려 현실 속 시간의 흐름이 얼마나 견고한지 더 인정하게도 되지만, 또 다른 저항의 이야기는 여전히 기다려지네요. 그 와중에 새벽은 자꾸 깊어지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