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을 해도, 목표를 향해 나아갈 동력을 잃고 의욕을 버린 상태.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예고 없이 찾아오는 무기력증을 달고 지내면서도 ‘왜’라는 질문을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간지럽고 성가신 증상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럭저럭 버텨낼 수 있음에 외면했을 테지요. 혹은 불타오르는 일시적인 열정에 그것을 떨쳐냈다고 착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물음을 던지니 그 무게가 참을 수 없이 무겁습니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이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를 통해 펼쳐낸 섬세한 성찰로 인해 얻은 자각입니다.
책은 에리히 프롬이 빚어낸 일생의 성과물 중 자아에 대한 고민을 뽑아 엮은 결과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가 무기력을 반복하는 이유는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본질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됩니다. 그렇다면 다시 궁금증이 생깁니다. 인간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에리히 프롬은 불변하는 인간 본성이 있다는 진리에 대한 믿음도, 또 반대로 그 어떤 공통적인 본성도 갖지 않는다는 극단적 상대주의에 대한 믿음도 부정합니다. 완전히 똑같진 않지만 ‘서로 공유할 수 있는 범주화된 속성’을 나누되 개성을 완성해 나가는 ‘각자의 실존적 선택 과정’을 거칠 때 진정한 인간일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인간이 자기 역사의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그 자체가 본질인 셈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어 현대인은 본질을 잊기에 십상이라고 지적합니다. 스스로가 원하는 지향점을 찾기 보다는 타인과 사회가 정하는 일정한 기준을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합니다. 외부가 기대하는 명성을 소유하려고만 하는 행동이 자신을 소외시키고 무기력에 빠지게 합니다. 즉 진정한 자아 찾기를 위해 무기력증이란 외면해서도, 착각해서도 안 되는 빨간 신호로서 떠안게 되는 짐이겠습니다.
현대인의 상징 마리아 엔더슨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본질을 잊은 인간, 나아가 그 인간의 성장담까지 그린다는 점에서 탁월합니다. 일단 타인의 시선, 평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배우가 주인공이기에 적절합니다. 배우는 외부에 기준을 두는 우리의 모습을 전적으로 상징화한 실체라고 여겨집니다. “인격의 성공 여부에 자존감이 달려 있으므로 현대인에게 인기는 엄청난 의미가 있다”는 에리히 프롬의 말도 어쩐지 배우를 강하게 연상시킵니다.
마리아 엔더스는 18세에 말로야 스네이크라는 연극에 출연해, 연상의 상사 헬레나를 유혹하고 파멸로 이끄는 캐릭터 시그리드 역을 맡아 단숨에 명성과 부를 얻는 스타가 됩니다. 세월이 흘러 리메이크 되는 작품에선 헬레나 역으로 출연 제안을 받지만 영원히 대중에게 시그리드로 남고 싶은 욕망이 스스로를 괴롭힙니다. 내면에 간극이 생깁니다.
비서 발렌틴과 리메이크작의 대사 연습을 하는 과정에서 마리아의 내적 갈등은 여실히 드러납니다. 마리아는 젊고 저돌적인 시그리드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껴 고통에 시달리다 끝내 자살을 택하는 헬레나를 구저분하다고 여깁니다. 대사에는 당연히 몰입할 수 없습니다. 발렌틴은 조언합니다. 헬레나는 적어도 자기감정에 솔직하고 체제 순응적이지 않다고. 반발심의 말로를 걷는 모습이 오히려 빛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시그리드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없기에 좌절을 되풀이합니다.
분명한 점은 마리아가 자신의 진짜 모습이 아닌 외부로부터 투사된 욕망을 붙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새롭게 시그리드 역으로 캐스팅된 젊은 배우 조앤 앨리스와의 관계로 증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할리우드계의 문제아로 어디로 튈지 모를 파괴적 자유를 표출하는 조앤에게 마리아는 절대 공감하지 않습니다. 행보를 비난하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조앤은 시그리드가 가졌던 젊음의 속성을 대표하기도 합니다. 마리아는 이제 그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실제적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비로소 나를 찾다
현실에선 마리아가 헬레나일 수밖에 없다는 ‘숙명’은 극 중 극이라는 형식으로 절묘하게 알 수 있습니다. 비서 발렌틴과 마리아, 시그리드와 헬레나의 역할은 각각 묘하게 일치하면서 그 경계를 흐립니다. 헬레나가 시그리드에 의지하며 점차 빠져드는 연극의 대목은 마리아가 발렌틴 없이는 자신을 되돌아볼 수 없는 지점과 평행하며, 시그리드가 헬레나를 떠나는 것은 발렌틴이 돌연 자취를 감추는 일과 궤를 같이합니다.
그리고 끝내 헬레나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만 같던 마리아는 발렌틴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더 이상 연극 재현을 할 수 없을 때 비로소 인정하게 됩니다. 현실의 마리아와 헬레나가 일치하고야 맙니다. 발렌틴이 던진 ‘젊음의 특권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 ‘자신의 과거와 대면해보라’는 말, ‘순수함과 자발성을 되찾아보라’는 말은 어쩌면 마리아 자기 내면의 소리였을지도 모른다는 암시입니다. 에리히 프롬의 관점이라면 이성과 본성을 나누지 않는 자발성으로 자신을 자각하는 자아 합일의 태도를 갖추게 된 것이겠지요.
이제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마리아는 분명 다른 모습입니다. 여전히 시끌벅적한 스캔들을 몰고 다니는 조앤의 좌충우돌함에 마리아는 보다 객관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그것에 비난을 퍼붓지도, 또 생기발랄함에 부러움을 표하지도 않는 평정심을 찾습니다. 묵묵히 헬레나와 동화된 연극 무대를 준비합니다. 물론 때때로 투사된 욕망이 울컥 올라오는 일은 여전합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거둘 줄 아는 의식이 생겼습니다. 이번엔 관객들로 하여금 헬레나를 더 기억하게 만들고 싶다는 주문을 하지만 이내 타인의 관점을 신경 쓰고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내젓습니다.
우리 앞에 펼쳐진 말로야 스네이크
돌이켜 생각해봅니다. 마리아가 헬레나를 품는 합일의 순간은, 실스 마리아 말로야 고개로 뱀처럼 흘러오는 구름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러 갈 때 일어납니다. 이는 본질을 잊었던 인간의 성장은 말로야 스네이크 구름을 보는 일처럼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입니다. 정말로 마리아는 과거와 외부의 욕망을 소유하려 않고 버리기까지,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스스로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이렇듯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어른스러움과 순수함을 받아들이는 여유는 세월을 대면하는 용기와 함께 찾아온다는 메시지까지 안겨줍니다.
물론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되찾는 시간 앞에 작아지기도 하겠습니다. 그러나 세월에 마주선다는 자체만으로도 개개의 자아는 대단한 가치를 지닐 수 있습니다. 모두는 당당히 말로야 스네이크 앞에 놓인 존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