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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 am a stem cell Mar 12. 2018

페미니즘이라는 언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며칠 전(2017년) 육군사관학교(육사) 졸업 1,2,3등이 모두 여성이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거세진 여풍, 육사 71년 만에 새 역사', '육사도 여성시대! 올해 졸업시험 1,2,3등 모두 여생도', '여풍당당'육사 졸업생도들'. 육사 졸업식에 관한 기사를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볼 수 있는 기사 제목들입니다. 전체 졸업생 중 10%도 안되는 여성이 1,2,3등을 휩쓸었으니 놀랍고 대단하다는 겁니다. 남성 주도의 영역이었던 군대에도 여성이 부상한다는 주장입니다.

이 소식을 전하며 SBS뉴스의 한 앵커는 이렇게 뉴스를 마무리하기도 했습니다. “올해 육사 졸업생 1,2,3등이 모두 여성이라는 뉴스는 놀랍고 축하할 일입니다. 하지만 이 소식이 혹시라도 우리 양성평등의 현실에 대해서 착시를 부르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우리나라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세계 112위, 여성 경제활동지수는 OECD 33개 회원국 가운데 32위, 특히 남녀 간 임금 격차는 꼴찌. 우리 여성들이 일상에서 만나는 성차별의 장벽은 육사 1,2,3등의 영예 정도로 뚫기에는 여전히 버거워 보입니다.”

이와 같은 뉴스들엔 어김없이 극심한 댓글 다툼이 일어납니다. '남성도 차별받는다', '성차별은 여전하다', '양성평등이란 말은 틀렸다' 등 너무나도 다양한 수준과 범주를 넘나드는 의견들이 쏟아집니다. 하지만 이런 논란은 각자의 입장에 선 사람들 간의 격렬하고도 극단적인 싸움으로 이어질 뿐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과 처방을 찾으려는 방향으로는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곤 합니다. 뉴스들에 달리는 댓글들이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페미니즘 이해 수준이라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이 외에도 지난 해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게임회사 넥슨의 성우교체로 촉발된 메갈리아 논쟁, 문단 내 성폭력 폭로, 최근의 박근혜 대통령 풍자 작품 '더러운 잠' 논쟁 등을 통해 격렬한 페미니즘 논쟁이 끊임 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 뉴스에 댓글을 다는 시민들도, 논평을 하는 해당 분야 전문가 혹은 지식인이라는 사람들도 페미니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양한 페미니즘 논쟁들 가운데 무엇이 맞는 말인지, 그릇되다 생각되는 주장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더 근본적으로는 도대체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혼란스럽기만 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성차별이 매우 극심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어떻게 정리해야 할 지 막연했습니다. 페미니즘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정희진님의 <페미니즘의 도전: 한국 사회 일상의 성 정치학>을 읽었습니다.

페미니즘에 반 걸음쯤 다가선 것 같습니다.

2005년에 처음 세상에 나왔고, 2013년엔 개정판으로 소개된 책입니다. 12년 전 책인데 마치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짧게는 수 백년, 길게는 수 천년 동안 남성 중심 사회가 유지되어 왔음을 생각하면 10년이란 세월은 변화를 가져오기엔 찰나와도 같이 짧은 시간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남성 중심의 시각과 언어속에서 편하게 살아왔던 제게 페미니즘은 새로운 언어이자 세계관이었기에 책표지를 펼친 후 몇 개월째 충격을 받으며 톺아보고 있습니다.

“여성주의는 남성 언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사유 방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들은 이제까지 '여성주의는 편파적이고 나는 객관적'이라고 믿고 있다가, 자신의 사고 역시 편파적이며 더구나 강자의 경험을 보편과 객관으로 믿어 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43쪽)

페미니즘은 단순히 성차별을 극복하고 평등을 구현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페미니즘은 '성별 제도가 우리 사회 구조를 어떻게 형성시켜 왔는지', '그 구조 하에서 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성별로만은 구분할 수 없는 인류 전체가 어떤 역사를 겪어 왔는지' 살펴보고, 그 안에서 억압당했던 다양한 사람들의 입장에 서 보자는 사상입니다. 페미니즘은 남성을 배제하자는 것이 아니라 나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는 포용의 세계관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우리 역사에서, 그리고 지금까지도 여성이 얼마나 심각한 억압을 당해왔는지를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가정과 일터에서 요구받는 이중노동', '여성은 의사와는 상관없이 언젠가는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전제', '정숙과 섹시함을 동시에 요구받는', '가정폭력 하에서도 발휘해야 하는 모성애', '만연한 성폭력과 가해행위의 축소', '아줌마라는 낙인' 등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2017년 현재에도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또 놀라운 사실은 그동안 남성으로 살면서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사용해 왔던 '말'들에 성차별적 관점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유관순 누나', '여성 노동자', '여성 정치인', '헌법 39조 1항. 모든 국민은 국방의 의무를 진다', '세계인권선언이 형제애', '미혼모', '연상의 여인', '여성 상위', '신여성', '여성의 사회 진출'… 이런 '말'들만을 쭉 늘어놓아 책도 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국민, 민중, 시민, 영웅 등은 기본적으로 남성임을 전제로 합니다. 책에서 언급되지 않았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할 언어들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20년 넘게 영어를 '공부'했는데도 여전히 영어로 한마디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흔히들 말하듯 '글로 영어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페미니즘을 글로 배우지 말아야겠습니다. 많이 듣고 따라 말하다 보면 어린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언어를 '습득'하게 되는 것처럼 저도 페미니즘은 이렇게 습득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기존의 의식을 바꾸려는 시도의 첫 발을 뗐다고 생각합니다. 후기에 저자가 쓴 문구를 마음에 새깁니다.

“흔히 말하는 의식은 바뀌었는데 몸이 바뀌지 않았다라는 개탄은 일상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일상을 넘거나 일상을 극복하는 정치가 아니라, 모든 정치와 운동은 일상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머리가 변하는 것이 의식화라면 몸이 변하는 것은 변태다. 그래서 언제나 혁명보다 개혁이 어려운 거다. 혁명은 이름과 의식을 바꾸는 것이지만 개혁은 몸의 형태를 바꾸는 것이다.”(289쪽)

늦었지만 대선 주자들도 일독을

“나는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며 대선 주자들이 저마다 '표심 구애'를 하고 있지만, 정작 여성들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여성정책이란 타이틀을 내걸고 공약을 발표한 대선 주자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 심상정 정의당 대표 정도다. 여성 유권자와의 간담회 등에서 여성 관련 정책 구상을 하나 둘 밝히고 있는 다른 주자보다는 공약이 구체적이지만, 여성단체들은 엄밀히 말해 현재 대선 주자들의 여성 공약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한다.”-서울신문 2017. 2.28일자-

현재 대선주자들의 페미니즘 이해 수준을 정확히 표현한 기사라 생각합니다. 12년 전 책에서도 언급된 '성폭력 피해 여성의 인권에 대한 무관심', '가사 노동의 무시', '성적 소수자 차별과 인권', '성범죄에 대한 미미한 처벌', '가정폭력 범죄에서의 이중잣대', '성매매와 성판매 여성의 인권문제' 등 심각한 여성문제들이 수없이 산적해 있는데 이와 같은 문제들은 전혀 고려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미 알려져 있는 여성문제들은 논의도 않은 채 구색맞추기 식의 출산, 육아 공약들을 여성정책이라 할 수 있을까요?

저자가 말한 것처럼 페미니즘은 사회를 보는 새로운 인식론입니다. 때문에 지금의 대선주자들에게 뭔가 커다란 변화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페미니즘과 여성문제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지식이라도 알고 있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희진 작가가 책에서 강조했던 것처럼 페미니즘은 여성이든 남성이든 기존의 나와 충돌하게 함으로써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대선주자들이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를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페미니즘은 우리 사회에 실제적인 유익도 제공할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은 다양한 타자들과의 소통과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사상이기에 성별 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적 모순과 차별에도 매우 민감합니다. “페미니즘은 이제까지 비정치적 공간으로 여겨졌던 사적인 영역에 인권 개념을 적용해 인권의 범위를 확장시켰다”(165쪽)고 저자가 말한 것처럼 페미니즘은 우리 사회 다양한 인권문제에 대한 접근에도 유익할 것입니다.

저와 같은 민초의 한 사람에서부터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아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사회 구성원 모두가 페미니즘을 이해하고 새로운 언어처럼 습득하게 되는 첫 걸음을 떼어봤으면 합니다. 사회의 변화는 개인의 변화와 사회정책의 변화가 함께 이루어질 때 가장 효과가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자의 말처럼 개인으로서 사회변화를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변태'입니다.

“한국 사회를 성(젠더)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실천하는 것은, 단지 여성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 일상, 개인들 사이의 관계의 민주화 없이, 정치 개혁이나 역사의 진보가 가능하겠는가? 일상의 정치학의 핵심은 성별관게, 즉 젠더이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분리에 저항하는 여성주의는 개인의 성장과 사회의 민주주의를 대립시키지 않는 사유 방식이다. 나의 변태는 곧 사회의 변화이다. 사회와 나는 연속선상의 한 몸인데, 어느 지점에서 그 몸을 자를 수 있단 말인가?”(290-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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