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기록에서도 성차별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
“여성은 타자이며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여성은 불완전하고 무능력하며 무가치하다고 말했다. 2000년 동안 인류는 파울로스의 말이라고 알려진 그 성경 구절을 되뇌었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원죄의 이야기, 뱀의 꾐에 넘어가 인식의 나무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이브의 이야기는 더 자주 입에 올렸다. 그런 다음 남자는 강하고 여자는 약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생각이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의 머리에 뿌리내렸다. 몸으로 밀고 들어와 피와 살이 되었고 우리의 행동방식,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결정했다.”(502쪽)
최근 여성들이 느끼는 분노의 맥락을 전부라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부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케르스틴 뤼커와 우테 댄셸이 <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라는 책에서 말한 것처럼 여성은 인류 역사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여성들이 자신을 역사 속 주체로 인식하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인류 역사를 고려하면 정말 최근의 일입니다만 그마저도 ‘수천 년 동안’ 뿌리내린 생각에 좀처럼 균열을 내지 못했습니다.
당해봐야 차별인지 알 수 있을텐데 역사의 주인공이었던 남성들은 성별에 따른 차별을 당해보기 어렵습니다. 이는 여성이 ‘해방’되었다고 하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에겐 당연한 일들이기에 제2의 성이 겪은 일들을 차별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책의 저자들은 이 성별에 따른 차별이 ‘태초’부터 시작되었다고 표현할 정도입니다. 다수의 남성들은 ‘말도 안되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여성들이 경험한 역사에선 이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거대한 세계사 속에서 있어왔던 여성 소외의 전체 맥락을 이해하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차별 논란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혐오에 혐오로 맞서려는 일부 극단적인 이들이 마치 성평등을 외치는 그룹의 전체인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두 저자는 세계사 속 중요한 사건, 인물들에서도 여성은 주변에, 아니 역사의 흐름 밖에 놓여 있게 된 것에 주목하고 세계사에서 지워진 여성들을 찾아보고자 했습니다.
저자들은 인류 역사에서 자신을 가둔 틀을 뚫고 나온 여성들이 항상 있었지만 이들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며 비범한 여성들을 소개합니다. 최초의 제사장이자 작가라고 할 수 있는 수메르의 공주 엔헤두안나, 사랑에 대해 가장 아름다운 시를 썼던 그리스의 여인 사포, 중국 황가의 역사 집필을 마무리했던 반소, 후에 러시아가 되는 키에프 공국을 국가로 성장시킨 여성 올가, 일본 최초의 소설 ‘겐지 이야기’를 쓴 궁정여인 무라사키 시키부, 몽골을 다시 일으킨 만두하이 여왕, 제네바 종교개혁에 큰 역할을 했던 마리 당티에르.
인류 역사에서 비범한 일들을 해냈던 여성들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주류였던 남성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평가절하되기도 했다는 점도 저자들은 강조합니다. 책의 각 장의 시작부에 기록된 연표에서 여성들의 이름을 볼 때 독자들이 느끼는 낯섬의 정도가 그 동안의 세계사 기록에서 여성들의 업적이 얼마나 가려져 있었는지에 대한 지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책에 소개된 세계 역사 속 비범한 여성들과 그들의 업적들을 알아가면서 성별에 따른 역할 구분이 얼마나 어이없는 편견인지를 재차 확인하게 됩니다. 이와 함께 이 책에서 주목해서 본 부분은 여성 차별의 기원을 말하는 부분입니다. 저자들은 3천년 전 아시리아의 법과 함께 등장한 ‘베일’, 유일신 신앙인 유대교의 출현과 종교 내에서의 원죄 낙인에서부터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공화국이었던 로마의 법, 중국의 공자에 이르기까지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게 했던 역사를 말해줍니다.
저자들이 지적한 역사 속 여성들의 소외는 절절하게 와 닿습니다. 노동자의 자유와 정의를 위한 투쟁을 외쳤던 마르크스도 여성 노동에 대해서는 무지했습니다. 종교개혁, 계몽사상, 프랑스 혁명은 인간에게 자유를 선사했지만 자유를 얻은 인간은 남자였습니다.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지만 이 역시 남성에게 한정된 것이었습니다. “무슨 혁명이든 혁명이 끝나고 나면 여성들은 대대로 내려오던 부엌의 자리로 돌아갔다.”(396쪽)는 말은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할지도 모릅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 반기를 들었던 인물 크리스틴 드파상이 눈에 띕니다. 그녀는 여자를 아무 가치도 없는 천박하고 비열한 존재로 묘사한 <장미 이야기>(13세기 궁정풍 운문소설)라는 소설에 분노해 여성이 주도권을 잡은 세상을 그린 <숙녀들의 도시>를 썼다고 합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진 남성 중심 세계에 ‘여성의 영혼도 남성의 영혼 못지않게 가치가 크다’고 주장하며 여자들도 과학, 예술, 정치 등 모든 일에 똑같이 잘할 수 있음을 외쳤습니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주장의 폭발력은 실로 엄청났지만, 그래도 여자가 남자와 동등하다는 생각에 비하면 받아들이기가 훨씬 수월했다. 크리스틴이 던진 여성에 대한 질문들은 지금껏 없었던 새로운 결과를 불러왔다. 여성에 대한 공식적 논쟁 ‘여성 논쟁’의 불을 붙인 것이다.”(279쪽)
이 때에도 어떤 남성들은 여성의 입장에서 여성을 변호하는 책들을 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이 그렇게 효과를 보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책에 따르면 크리스틴 드피상이 여자가 못할 것은 없다는 주장은 500년이 넘어서야 조금씩 입증되었다고 합니다. 여성들은 파일럿, 자동차 경주 참여, 과학 및 사회 운동 참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여자라서 못할 일은 없다는 점을 증명해 왔습니다. 저자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왜 우리는 여전히 여성의 역할을 두고 논쟁을 벌이는 것일까?”(499쪽)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에도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 증대와 함께 성차별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케케묵은 병역의무 논쟁에서부터 최근에는 불법촬영에 대한 편파수사 논쟁에 이르기까지 언론 상에 오르내리는 주제와 대중의 반응을 지켜보자면 평행선을 달리는 듯한 느낌입니다. 하지만 남성으로서의 직접 경험, 다양한 책과 자료들을 통한 간접 경험을 통해 판단할 때 여성이 역사적으로 거의 모든 부문에서 차별당해 왔다는 점은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잘못을 바로잡는 출발점은 인정입니다.
저자들이 책에서 물었던 것과 비슷한 물음이 생깁니다. ‘왜 우리는 여전히 여성이 차별당해 왔다는 것을 두고 논쟁을 벌이는 것일까요?’ 차별여부를 문제삼는 소모적 싸움에서 벗어나 이제는 여전히 존재하는 성별에 따른 차별을 어떤 방식으로 바로잡을 것인지, 그리고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의 말, 생각, 행동 양식에 깊게 뿌리내린 성역할에 대한 편견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지 등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