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별 Mar 04. 2022

멜로드라마는 언제나 좋다

'옷소매 붉은 끝동' 과 함께한 시간 ㅋㅋ

 어렸을때부터 나는 만화보다는 드라마를 좋아했던 아이였다. 친구들이 '뾰로롱 꼬마마녀'나 '세일러문'과 같은 만화에 열광할때 난 '아들과 딸' 이나 '첫사랑' 을 보는게 더 즐거웠다. 밤 10시쯤 부모님께서 거실에서 보시던 드라마를 문틈으로 흘깃흘깃 훔쳐보았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누구에게나 TV 드라마를 보며 가슴 설레이고 즐거웠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특히 나는 멜로드라마, 멜로 영화를 정말 좋아했다. 나이가 적지 않은 지금도 나는 멜로물을 정말 좋아한다. 내가 대학생이었을때만해도 멜텔레비전에서든 스크린에서든 단골 흥행소재 중 하나였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텔레비전에서 특히 정통멜로를 소재로 하는 드라마들이 줄어들었고, 동시에 영화관애서도 멜로물을 보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은 모르지만 풍문으로 이젠 멜로영화는 크게 흥행성이 보장되지 않아서 제작이 잘 안된다고들 하는 소리를 듣긴 했는데 정확히 이유를 알지는 못하니 그저 그렇구나 추측할 수 밖에....

대신 요즘에는 예전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소재들로 잔인하거나 강렬한 이미지를 가진드라마들이 많이 방영되는 것 같다. 특히 '불륜' 이라는 소재는 사골마냥 늘상 우려먹는 단골소재가 된 것 같은 느낌.... 요즘같은 세상에 어찌 한사람만 사랑하며 평생을 살아가느냐고 반문하는 세태를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아 가끔 씁쓸할 때가 있다.

 

 작년 연말에 코로나에 걸려서 하릴없이 집 안에서 지내야 했을때 우연히 '옷소매 붉은 끝동'을 알게 되었다. 일단 소재가 끌렸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성군인 정조대왕과 그 대쪽같은 사람의 첫사랑인 덕임의 이야기. 10년 전쯤이었나 이서진이 나왔던 드라마 '이산' 의 흥행과 함께 서점가에 유행처럼 정조와 그의 리더십에 대한 광풍이 불때가 있었는데 그때 이런저런 책을 읽었기에 정조는 내겐 꽤 친숙한 왕이었고, 덕임은 이산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후궁으로 정조의 기록덕에 유일하게 본명이 후대에 알려진 인물이기에 그 자체만으로도 호기심이 생겼다.

 

 '옷소매 붉은 끝동' 속 여주인공 성덕임은 이제껏 우리가 볼 수 없던 사극 속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였다. 왕의 승은을 여러번 거절할수 있는 궁녀라니, 거기다가 왕 앞에서 온전히 나로 살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궁녀라니. 한국사에 관심이 많아 역사 관련 책들을 많이 읽어왔고, 사극이나 심지어 역사스페셜 같은 교양프로그램까지 꽤 많이 섭렵(?)하는 내게도 이 사례들은 정말 낯선 이야기들이었다. 이 드라마는 궁녀였지만 사소한 것이라도 자신이 선택하며 사는 삶을 꿈꾸는 여인과, 왕이었기에 사사로 마음에 집중할 수 없어 평생 외로웠던 인간적인 왕이야기를 탄탄하게 잘 그리고 있다. 그러고보니 왕의 일생과 궁중의 여인들의 인생에 대해 생각해볼때 정해진 정무(왕의 일과) 이외에 사적인 시간들은 어찌 보냈을지 생각해 본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아마 그들도 사람이니 어쩌면 이런 왕, 이런 궁녀들이 분명 있지 않았을까..? 왕이 승은을 내려서 기뻐한 궁녀도 있었겠지만 혹시나 그 왕이 소위 추남이었다면?ㅋㅋ 그런 단순한 문제를 넘어서 어려운 어른들이 줄줄이 들어앉아있는 구중궁궐속으로 기꺼이 들어갔던 여인들이 과연 많았을까 하는 생각이 이 드라마를 보는 지금에서야 들었다.

 

주인공을 맡았던 두 배우들의 멋진 연기를 보는것도 즐거웠지만, 드라마에 <시경> 이 비중있게 나왔던 것도 내겐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시경>은 고대 중국의 시를 모은 것으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서오경 중 '오경' 에 속하며 중국의 가장 오래된 시집으로, 중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겐 꽤 비중있는 책이다. 이 드라마에서는 시경의 '북풍'이 소개되는데 번역이 아주 좋다고 느꼈다. 드라마 속 장면과 주인공들의 상황에 모두 다 어우러졌던 시여서 제작진이  어떻게 이 시를 이렇게 사용할 생각을 했을까 내심 감탄이 되었다.


北風其涼 雨雪其雱
북풍은 차갑게 불고 눈은 펄펄 쏟아지네
惠而好我 攜手同行

사랑하여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손 붙잡고 함께 떠나리
其虛其邪 旣亟只且
어찌 우물쭈물 망설이는가 이미 다급하고 다급하거늘
北風其喈 雨雪其霏
북풍은 차갑게 휘몰아치고 눈비는 훨훨 휘날리네
惠而好我 攜手同歸
사랑하여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손 붙잡고 함께 돌아가리
其虛其邪 旣亟只且
어찌 우물 쭈물 망설이는가 이미 다급하고 다급하거늘
莫赤匪狐 莫黑匪烏
붉지 않다고 여우가 아니며 검지 않다고 까마귀 아니런가
惠而好我 攜手同車
사랑하여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손 붙잡고 수레에 오르리
其虛其邪 旣亟只且

어찌 우물 쭈물 망설이는가 이미 다급하고 다급하거늘


다시 보아도 전체적으로 서정적이면서 이 드라마의 주제와 정말 잘 어울리는 시다. 특히 마지막 구절과 마지막회의 주된 내용이 정말 어울린다.

 

 드라마가 워낙 재미있어서 원작 소설도 찾아보았는데, 개인적으로는 소설도 굉장히 재미있고 한번이 아니라 여러번을 내리 읽을만큼 매력있었다. 최근 주로 인문사회 쪽 책들을 많이 읽었던터라 소설을 읽은지가 언제인지 기억나질 않는데 이 책읔 정말 오랜만에 술술 읽었던 소설이었다. 책 속의 정조는 드라마속의 정조보다 더더더 까칠하고, 덕임이를 많이 괴롭히는데 만약 드라마에서 원작 그대로의 이산을 그렸다면 아마 드라마는 폭삭 망했을거다 ㅋㅋ

그치만 어느 에피소드에서는 드라마보다 소설이 좋다고 느꼈던 것은 왕의 자리에서 한 여인을 사랑하며 생겼던 내면의 갈등과, 필부가 아니었기에 달리 사랑을 표현하는데 익숙하지 않았던 왕의 고뇌가 문장문장마다 잘 담겨있다는 부분이었다. 까칠한 왕의 모습이 계속해서 무심하게 묘사되지만, 아이러니하게 그 행간 사이사이 이산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던 책이었다.


 드라마는 원작 소설을 모티브로 하였지만, 극의 재미를 위해 많이 각색되어 있다. 드라마 서사도 나름의 흥미진진함이 있었지만 소설과는 다르게 드라마 속 이산은 다정하고 한결같은 모습으로 업그레이드 된 대신, 덕임이 캐릭터는 소설 속 거의 그대로여서 애정을 절절히 갈구하는 왕에 비해 너무 융통성 없고 고집스러운 모습이 덕임이의 주체성보다 더 부각된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은 좀 든다. 이왕 각색하셨던 거, 이왕 후궁이 되고난 후엔 결말도 좀 더 부드럽게 각색해주셨다면.....


 한가지 더 느꼈던 것은, 드라마나 영화, 각종 매체들이 더 자극적이고, 더 세련된 것이 무엇일까 찾아 헤매이는 지금 이 순간, 이 시대에도 결국 시청자들 마음을 움직이는 키워드는 요즘 세대들이 촌스럽다 말하는 '지고지순' 이라는 사실이다. 정조의 한결같은 사랑에 열광하는 시청자들이, 끝까지 덕임이를 보내지 못하고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이산과 함께 우는 시청자들이 그 증거가 아닐까 한다.


 간만에 금요일과 토요일을 기다리며 소소한 즐거움을 느낄수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다. 기다리는 드라마가 한편 정도 있다는 건 평범한 일상 속 꼭 낭비적인 일만은 아닐 것이다. 다음 멜로드라마는 뭐가 되려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