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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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궁금한 것은 , 프랑스와 레바논의 관계이다.. 레바논이라는 나라를 보자
레바논 공화국(아랍어: الجمهورية اللبنانية 알 줌 후리야 알리브 나니야[*], 프랑스어: République libanaise 헤퓨블리끄 리 바네즈[*]) 또는 레바논(아랍어: لبنان 루브난 [*], 프랑스어: Liban 리방[*])은 서아시아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이슬람교 54%, 기독교 40.5%의 다종교 국가로, 시리아와 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수도는 베이루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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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항구에서 대량 폭발 사고가 발생하였고 이에 대해 시민들이 정권 퇴진을 외치고 있는 상황에서의 프랑스 대통령의 위로 방문이다 무언가 그림이 잇는 이야기 일까 , 역사적으로 이 두나라는 어떤 관계였을까
----------------------먼저 오래된 역사를 거슬러 본다. -------------------------------
좋은 항구를 가진 혜택으로 레바논은 옛날부터 교역의 중심지로 번영하여 왔다. 기원전 3000년경부터 페니키아 인이 해안지대를 근거지로 하여 티루스(지금의 티레)·시돈 등의 도시국가를 건설했다. 그 뒤, 바빌로니아·페르시아 제국·로마 제국 등의 지배를 받았는데, 로마는 기원전 64년에 레바논을 점령했다. 로마 시대에는 티루스에 해군기지가 설치되었으며, 서기 300년대에 기독교가 널리 퍼졌다. 395년에 레바논은 비잔틴 제국의 일부분이 되었다.
600년대 초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아랍인들에게 정복된 후부터 아랍화·이슬람화가 진행되었다. 이 시대에는 산악지대가 이슬람교의 분파인 시아파·드루주파 등과 마론파 기독교인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11~12세기에는 셀주크 터키와 십자군의 쟁탈장이 되었으며, 1516년에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되어 19세기까지 이 제국의 술탄 밑에서 반독립적인 여러 세력이 레바논을 지배했다.
19세기에 들어서자 오스만 제국은 레바논의 직접적인 지배를 시도했으나 실패했으며, 마론파 기독교도와 이슬람교의 분파인 드루즈 교도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살해되었다. 이 분쟁에 프랑스가 개입한 것을 계기로 1861년 마론파 기독교인들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했다.
또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함에 따라 1920년 4월 산 레몬 회의에서 베카 고원 등의 내륙부도 레바논에 합병되었으며, 1923년에는 시리아 등과 함께 프랑스의 위임 통치령이 되었다.
1926년 시리아에서 분리되어 위임통치 아래 자치국이 되었고, 1944년 1월에 완전 독립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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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1차 세계 대전이 마무리되면서 1923년부터 프랑스로부터 위임 통치령이 시작되었고 레바논의 완전 독립은 1944.1월에 이르러서야 가능하였다 약 21년간의 프랑스 령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니 , 당시의 향수를 그리워하는 시니어 들과 그들의 아이들이 그 다시 프랑스에 대해 거부감이 없다는 것도 이번 사건과 일맥상통한다.
다시 본 주제로 돌아가자면 , 역대 프랑스 대통령들은 이 나라 외에도 다른 나라 일들의 사건 사고에 개입하거나 드러내기를 좋아하였다는 것인데 이는 프랑스인 들의 기질 때문 이기도 하고 아님 이전 유럽 사회를 정복하였던 나폴레옹 황제 시절을 그리워하는 복고풍의 정치 소맵쉽 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형 참사를 겪고 있는 레바논은 다시금 식민통치의 기로에 서 있다. 100년 전 독립에 환호한 레바논 국민들은 지금 자력이 아닌 외세에 의한 구원을 외치고 있다. 마크롱의 베이루트 방문 중 30여 분간 이어진 시민들과의 만남에서 줄기차게 터져 나온 목소리는 레바논 정부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에 마크롱은 “여러분 모두를 이해하고 위로한다”며 시종일관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보였다.
프랑스 보도 전문채널 BFMTV는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군중의 요구에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라며 그를 두둔했다. 유명 레바논계 프랑스인 에세이스트 자드 자합 역시 “레바논의 어떤 정치인도 마크롱처럼 군중 앞에서 ‘모두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레바논은 헌법적으로 18개 종파가 권력을 나누어 갖고 있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현재 대통령은 기독교 마론 파이며, 총리는 이슬람 수니파, 국회의장은 이슬람 시아파다. 모두 ‘정파’와 ‘교파’를 중심으로 한 자신의 지지 세력을 대변할 뿐 ‘레바논 국민 전체’를 품는 정치는 이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들다. 자드 자합은 “마크롱과 같은 행보는 모든 레바논 정치인들의 꿈”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종파 간 계파 간 갈등이 많은 이 지역의 적임자 위임 통치 시절을 떠올려 프랑스가 적임자라는 것이다.
이밖에도 현장 방문을 한 전직 프랑스 대통령은 여럿이다.
이러한 프랑스 지도자들의 화려한 외교행보에 대해 국제문제 전문가인 안토니 벨랑제 기자는 “프랑스 대통령들이 국제무대에서 발 빠르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라고 지적하며, 이는 사르코지와 마크롱의 경우만이 아니라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덧붙였다. 1992년 사라예보를 방문한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행보가 대표적이다. 당시 보스니아 내전으로 사라예보가 포위된 상황에서 미테랑은 그 한복판을 깜짝 방문했다.
그러나 역시 방문뿐이었다. 미테랑의 노력에도 대치 상황은 풀리지 않았으며, 이후 1400일 넘게 포위가 이어졌다. 뒤이은 자크 시라크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9·11 테러 나흘 만에 외국 수반 최초로 뉴욕 현장을 방문해 연대를 강조했지만, 당시 부시 행정부가 들고 나온 아프가니스탄 공습에 대해 어떤 국제적 리더십도 보여주지 못했다.
외교적인 수사 이기도 하겠지만 이러한 프랑스 대통령들의 발 빠른 행보는 국제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한번 천천히 숙고해볼 일이다. 사실 미국과 프랑스의 사이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어서 , 불가원의 관계 와도 같을 수 있다..
마크롱은 레바논 국민들에게 9/1 일 재방문을 약속 하였다 아래 글을 보자
마크롱이 레바논 국민들에게 ‘다시 오겠다’고 약속한 9월 1일은 1920년 ‘위대한 레바논’이 선언된 지 정확히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레바논계 프랑스인으로 ‘아랍국가연구소’의 설립자인 앙투완 바스 부스 소장은 “독립선언을 축하해야 하는 날 ‘유엔 헌장 7조’를 발동시킬 수 있는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게 될지 모르겠다”며 깊은 우려를 표시했다. 유엔 헌장 7조는 ‘평화에 대한 위협’에 관한 사안으로 ‘신탁통치’ 내용까지 포함돼 있다. 재방 문일을 이날로 정한 것을 두고도 해석이 분분하다.
현재 진행형인 프랑스의 행보를 보자면 , 예전 1세기경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위임 통치하였던 지역의 재방문으로 국제 정치적인 세를 과시하기도 위함이지만 그 지역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들여 만약 순조로이 정치 이향이니 위임 통치가 되는 경우라면 , 시리아와의 국경 분쟁 지역과 중동이라는 석유 저장고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잇다라는 계산이 깔린 것은 아닐까 지극히 의문이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9/1일의 약속이 어떻게 이뤄질지는 그날자 신문 방송 보도를 참고로 하자.. 오늘은 이만... Written by e han
Tip ; 그 이후 레바논 투쟁사 중동 지역을 중심으로 ( Wiki reference )
독립 뒤 레바논은 복잡한 종파(宗派)의 대립을 배경으로 독특한 종교연합국가를 형성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중립주의를, 경제적으로는 철저한 자유화 정책을 추진하여 아랍 여러 나라의 물자와 정보 제공의 중간자적 역할로 독자적인 번영을 유지했다. 그러나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래 여러 차례에 걸쳐 일어난 중동전쟁에 말려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1970년의 요르단 내전 이후 요르단으로부터 수많은 팔레스타인 난민이 유입되어 레바논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중심으로 한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후 레바논에서의 기독교인과 이슬람교인의 수가 거의 비슷하게 되어 마론파 기독교인들의 우위는 무너졌으며, 그 뒤 정세 불안은 더욱 심해졌다. 그래서 종종 이스라엘의 보복공격을 받았으며, 마론파 기독교인들도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에 반대하는 팔랑 헤(Phalange) 민병대를 결성했는데, 이스라엘이 팔랑 헤 민병대를 지원하였으며 지금도 이스라엘이 레바논의 친팔레스타인 이슬람 무장단체와 헤즈볼라 무장단체 소탕을 위해 계속 팔랑 헤 민병대 정당인 카테브 당을 계속 지원하고 있는 중이다.
1975년 2월에는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을 지원하는 이슬람교도와 이에 반대해 팔랑 헤 민병대를 결성한 마론파 기독교인들의 내전이 일어났으며, 1976년 11월에는 시리아군의 개입을 초래했다. 또한 1982년 6월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하여 PLO 소탕을 위해 서(西) 베이루트를 완전히 포위하고, 2개월에 걸쳐서 맹폭격을 가했다.
그해 8월 미국의 중재에 의하여 PLO의 서베이루트 주둔 군대의 철수 합의가 성립되어 약 1만 명의 PLO 게릴라는 아랍 세계 8개국으로 퇴거했다. 이후에도 1982년 9월의 기독교 민병의 팔레스타인 난민 학살사건, 1983년 7~9월의 기독교·이슬람교 각 파에 의한 내전 격화와 미국 해군의 함포사격, 1983년 10월의 미국 및 프랑스의 주둔 본부에서의 폭탄테러사건 등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1984년 1월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이슬람교도 세력과 정부군·기독교 민병대의 내전이 또다시 격화되었으며, 미국 해군은 이슬람교 민병대 거점에 재차 함포사격을 가했다. 그해 2월 이슬람교 세력이 총궐기하여 서베이루트를 제압했으며, 3월에는 시리아의 주도 아래 정전(停戰)이 실현되었다. 2006년에는 이스라엘의 침공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