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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 Han Jan 14. 2023

[ 영웅]안중근 1909.10.26 -1910.3.26


<영웅>은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일본 법정의 사형 판결을 받고 순국한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준비하던 때부터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까지, 잊을 수 없는 마지막 1년을 그린 영화다. 해운대에 초대형 쓰나미가 발생한다는 신선한 상상력의 <해운대>(1,132만 명, 2009년 개봉), 격변의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로 진한 웃음과 공감을 전한 <국제시장>(1,426만 명, 2014년 개봉)으로 국내 최초 쌍천만 흥행을 기록한 윤제균 감독은 8년 만의 신작이자 2009년 초연한 동명의 창작 뮤지컬을 영화화한 <영웅>으로 다시 한번 뜨거운 감동과 전율을 선사할 예정이다. “안중근 의사를 비롯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독립운동가들께 감사하다는 말씀, 그리고 절대 잊지 않고 있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 이러한 마음이 관객에게 조금이라도 닿기를 바란다.”고 전한 윤제균 감독은 안중근 의사에 대한 철저한 자료 조사를 거쳤다. 그리고 한국과 라트비아를 넘나드는 로케이션 촬영 및 대규모 세트 제작까지 규모감 있는 볼거리로 113년의 시간을 거스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완벽하게 스크린에 재현했다. 독립을 염원하는 마음 하나로 조국을 지킨 안중근 의사와 독립투사들의 뜨거운 순간을 그린 스토리와 눈과 귀를 사로잡을 볼거리가 어우러진 <영웅>은 공연 그 이상의 감동과 재미를 선사하며 올 연말, 관객들에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동명의 창작 뮤지컬을 원작으로 한 <영웅>은 공연을 넘어선 전율과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망설이지 않았다. 이를 위해 윤제균 감독은 기존 한국영화에서 시도된 바 없는, 촬영 현장에서 직접 배우들이 노래를 부르는 라이브 녹음 방식을 채택했으며 이를 통해 스튜디오 녹음이 불가피한 분량을 제외하고 무려 영화의 70%가 현장에서 녹음된 라이브 가창 버전으로 담길 수 있었다. 이를 위해 배우들은 3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발음, 발성 등의 혹독한 보컬 트레이닝을 거쳐 영화 속 모든 넘버를 직접 불렀으며, 반복되는 테이크에서도 흔들림 없는 감정 연기와 노래를 동시에 소화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윤제균 감독 또한 감정 연기와 한 호흡으로 이어지는 라이브만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독창 씬에서는 가능한 컷 분할을 하지 않는 롱테이크 방식을 취했다. 황상준 음악감독은 원작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오리지널 넘버의 50%를 극장 환경에 맞게끔 재편곡했으며, 오직 영화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새로운 넘버를 추가해 특별함을 더했다. 조상윤 촬영감독은 모든 넘버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촬영해 다채로운 장면을 풍성하게 담아내고자 했다.


1909년도 블라디보스토크의 생생한 풍경은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의 건축물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라트비아 로케이션을 통해 실감 나게 그려낼 수 있었다. 특히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주요 공간인 하얼빈역은 일부 세트를 새롭게 짓고 CG 작업을 거쳐 실제와 같은 규모감과 시대상이 담긴 섬세한 디테일을 재현해냈다. 안중근 의사의 독립운동 활동 시작과 독립군들의 투쟁을 그린 영화의 초반부 대비 하얼빈 의거 이후 일본의 법정을 거쳐 여순 감옥에 이르는 영화 후반부에서는 미술 전반적으로 색의 사용을 절제해 인간 안중근의 감정에 집중하고자 했다. 이처럼 제작진의 뜨거운 노력과 열정으로 탄생한 <영웅>은 완성도 높은 프로덕션으로 강렬한 몰입도를 선사하며 관객들을 압도할 것이다


[[ 이별에 대한 이야기 ]] 


이 영화의 주제를  개인적인 창으로 보자면 사람과 사람에 대한 이별 , 그리고 나라와 개인애 대한 이별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아픔이다. 



조마리아여사의 애끓은 아들을 위한 기도는 마지막 형장에서 사라질 아들을 위한 명주옷으로 대변 된다. 

더이상 항소를 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죽음을 묵묵히 받아 들여야 하는 아들, 


명예로우나 개인적 두려움이 앞서지 않았을까 하는 부분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영상 떨림으로 표현 된다. 

이토의 저격 날짜를 맞추기 위한 정보원(설희) 의 노력 , 무한한 피의 댓가 또한 가볍지 않다.  


그날 역사의 멈춤 한장면에는 도도히 흘러가는 시간속에서 또다른 변혁의 웅지를 키우지 않았을까 .

1910년 한일 합방이 된 이후 로도 35.5년간 통치하에 살아내었어야 하는 민족 ,  

아직 끝나지 않은 세계사의 관계 이기도 하지만 , 독립투사 개개인들의 아픈 이별이 녹아 있는  [ 영웅 ] 이야기는 우리들 선조들의  살아 있는 이야기 이다.  


이후로도 가져 가야할 유산 같은 , 어쩌면 우리들은 그 과거의 멍에를 지고 오늘을 사는 지도 모를 일이다.  또다른 생사를 찢는 아픈 이별을 맞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한번쯤 눈을 감고 선조들의 외침을 조용한 가운대라도 귀 기울여 들여 볼 차례 이다..  비오는 주말 오후 , 날씨 조차 을씨년 스런 겨울 하늘 사이 , 가본적도 없는 머나먼 타국  하얼빈이 떠오르는 건 무슨 일일까 ,.  한번 쯤  올해 가기 전에  영화나 뮤지컬로도 감상을 추천 드린다.   Written by E HAN .    


   

https://tv.kakao.com/v/434802028


그날을 기억하며 

https://tv.kakao.com/v/434498353


https://tv.kakao.com/v/433495183

https://tv.kakao.com/v/434778383


================================================================================= 부제  ;  사실 관계의 고증을 위한 자료 임 ,  


이토 히로부미 저격과 처형

이토 히로부미 저격

<nowiki /> 이 부분의 본문은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입니다.


저격 직전의 이토 히로부미(왼쪽에서 두 번째)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14] 이 소식을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자원했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哈尔滨, 哈爾濱(하얼빈), Harbin)에 도착했다. 당초 계획은 동청철도(東淸鐵道)의 출발지인 장춘의 남장춘(南長春), 관성자(寬城子)역과 도착지인 하얼빈, 채가구(蔡家溝)역의 4개 지점에서 암살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자금과 인력이 부족하여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에서 저격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15] 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채가구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채가구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했다.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하였다.


[16] 이외에도, 일곱 발의 저격 총알 중,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모리 타이지로우(森泰二郞),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남만주 철도의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우(田中淸次郞)에게 총격하였다.[14]

총격 후, 안중근은 가슴 안에 있던 태극기를 높이 들어 올리며 에스페란토어로


“코레아 우라!”


이라고 3번 크게 외쳤다. 이 외침은 대한 독립만세라는 뜻이었다.[14]


총격 30분 만인 오전 10시경, 이토 히로부미는 피격당한 직후 열차로 옮겨졌다. 죽기 직전에 브랜디(옛날에는 각성제로 가끔 사용)를 한 모금 마시고 "범인은 조선인인가"하고 물었으며, 주변에서 그렇다고 대답하자 "바보 같은 녀석"이라고 뇌까리며 죽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사건 현장에 있던 주변인물들의 증언에 의한 것이지만 조작이라는 주장이 있다. 총을 세 발이나 맞고 그런 말을 남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동행한 의사의 증언으로는 분명히 열차 내로 옮길 때까지 살아있었다고 한다. 다만, 다른 기록에서는 죽기 직전에 "난 틀렸다... 다른 부상자는 누구지"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도 기록되어 있어 전반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감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군에 체포되었고 1차 조사 이후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으로 넘겨졌다.[17] 최재형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일본이 아닌 러시아 제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하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했다. 하지만 안중근이 일본 제국 정부에 넘겨져 관동주 뤼순(료준)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으며, 유해는 오늘날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다. 같이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편 법관양성소 출신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이 안중근을 위해 무료 변론을 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묻는 말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15가지 이유.


첫 번째,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두 번째, 1905년 11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세 번째, 1907년 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


네 번째,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다섯 번째, 군대를 해산시킨 죄

여섯 번째,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


일곱 번째,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여덟 번째,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아홉 번째, 한국인들을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

열 번째, (제일은행) 은행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열한 번째, 한국이 300만 영국 파운드의 빚을 지게 한 죄

열두 번째,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열세 번째,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열네 번째, 일본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을 죽인죄


열다섯 번째,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등이다.


안중근의 체포와 수감 소식이 접해지자 당시 국내외에서는 변호 모금 운동이 일어났고 안병찬과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변호를 자원했으나 일제는 일본인 미즈노 기타로(水野吉太郞)와 가마타 세이지(鎌田政治)를 관선 변호사로 선임했다. 수감 중에도 그는 동양 평화론의 저술을 하였으나 끝내 완성 시키지 못했다.


마지막 행적

2008년 국제한국연구원은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은 2월 14일부터 사망한 3월 26일까지의 행적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공개하였다.


1910년 2월 14일 : 오전 10시 30분 관동주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음. 안중근은 당시 천주교 조선대목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전보를 보내 사제를 보내줄 것을 요청함. 자신의 사형 집행일로 성금요일을 희망한다는 뜻을 전함.


1910년 2월 17일 : 안중근은 고등법원장을 면담하여 한 국가의 독립을 위한 의병장으로서의 행동을 살인범으로 심리한 것에 이의를 제기함.


1910년 3월 9일 : 고해성사를 조제프 빌렘 당시 황해도 천주교 신천본당 주임신부에게서 받음.

1910년 3월 10일 : 빌렘 신부의 집전으로 마지막 미사를 봉헌.


1910년 3월 25일 : 사형 집행 연기. 세계적으로 성탄절, 정월 초하루, 황제의 탄신일에는 사형이 없다는 관례와 대한제국내의 의병활동이 강하게 전개되고 있어 통감부에서 이를 고려, 사형을 연기 요청. 이날은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태어난 건원절이었음.


이에 안중근은 면회를 온 두 동생에게 당부를 남김. 당부 내용은 노모의 안부를 묻고, 불효의 죄를 용서를 청하였고, 장남을 천주교 사제로 길러 달라고 부탁. 동생 안정근에게는 한국의 발전을 위해 공업 또는 식림 같은 한국을 위한 일에 종사토록 부탁.


1910년 3월 26일 : 오전 10시 사형 집행. 향년 32세. 참석자: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장.


당시 안중근을 지원한 사람은 거부 최재형이었는데, 최재형은 안중근의 체포에 대비, 변호사와 상의할 정도로 안중근을 현실적으로 도왔다. 한편 안중근은 글씨가 뛰어나, 뤼순 감옥 수감 때 많은 유묵을 남겼고 보물로 지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옥중에서 미완으로 끝난 저서《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남겼다. 2008년 3월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다롄(大連)시 뤼순(旅順) 감옥 뒤편 야산 일대 등지에서 유해 발굴작업을 벌였지만 실패하였다.[18]


유언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년 3월 25일자에는 '안씨 결고(安氏 訣告)'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도되었다. 거월십오일(2월 15일)에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씨가 여순감옥내에서 안중근씨를 면회 고별할 시에 안중근씨가 한국동포에게 결고(訣告)하는 사의(辭意)를 안병찬씨에게 설급(說及)하였는데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 2천만 형제자매는 각자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유지를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여한이 없겠노라" 하였다.[19]


어머니의 뜻에 따라 항소를 포기한 안중근 의사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인 1910년 3월 9~10일경, 어머니가 하얀 명주천으로 지은 수의를 가져온 두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20][21][22]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의 사형은 뤼순 감옥에서 행해졌다. 구리하라 전옥은 안에게 “금년 2월 24일 뤼순 지방 법원의 언도와 확정명령에 따라 사형을 집행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소노키의 통역이 끝나자 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구리하라 전옥은 다시 한 번 안에게 “뭔가 남길 말이 없느냐”라고 물었다. 안은 "아무것도 남길 유언은 없으나 다만 내가 한 일이 동양 평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 한·일 양국인이 서로 일치 협력해서 동양평화의 유지를 도모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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