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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 Han Jul 27. 2023

원자스파이

샘킨 

책 서두에 

[[이 이야기를 빛내는 것은 믿기 힘든 등장인물들이다. 그중에는 메이저 리그 야구 포수 출신에서 스파이로 변신한 모 버그도 있고, 훗날 대통령이 된 동생 존 F. 케네디보다 나은 전공을 세우려고 애쓴 조 케네디 주니어도 있다. 또, 독일의 최고 과학자들을 체포하려고 노력하는 와중에 자신의 유대인 부모를 강제 수용소에서 구출하려고 애쓴 네덜란드 출신의 물리학자도 있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마리 퀴리의 딸인 이렌 졸리오-퀴리를 비롯해 노벨상 수상자들도 다수 등장한다. 이 과학자들과 군인들은 국제 첩보전의 어두운 세계로 뛰어들어 인류사에서 가장 어두운 역사의 물결을 되돌리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원자 스파이라는 제목의 이 책 주제는 [ 원자 폭탄] 이다  아래는 위키 백과의 개요 . 


개요[편집]

핵분열을 이용한 원자력의 가장 초보적인 응용은 핵폭발(核爆發)이다. 그것은 핵분열의 연쇄반응을 광범위하게 순간적으로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핵분열과 그로 인한 중성자의 방출은 극히 단시간(100만분의 1초 정도)에 끝나므로 결과로서 폭발이 생기는 것이다. 예를 들면 1kg의 우라늄235가 완전히 폭발하면 현재 가장 강력한 화약인 TNT(트리니트로톨루엔) 2만t에 필적하는 에너지가 발생한다. 원자폭탄은 이와 같은 강력함과 그에 따라 발생되는 고온도가스(화구중심의 온도는 10억도라 한다), 방사열과 폭풍(爆風), 그리고 그 뒤에 남는 방사선(放射線)에 따라 처참(妻慘))하고 위력 있는 병기(兵器)가 되어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실제로 쓰였다. 


원자폭탄에는 원자연료의 종류에 따라 우라늄폭탄(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것과 같은 형)과 플로토늄폭탄(일본 나가사키에 떨어진 것과 같은 형)의 두가지가 있다. 핵폭발을 평화목적에 이용하려는 연구도 점차 추진되고 있다. 현재 운하(運河)의 굴착이나 석탄·석유·천연가스 등의 지하자원 개발이 유력한 용도(用途)로 지목되고 있다. 또 원자로(原子爐)에서 얻어지는, 훨씬 강한 중성자속(中性子束)을 얻을 수 있어 초우라늄 원소(플루토늄은 그 한가지이다)의 제조 등의 과학 연구에 쓰이고 있다. 그러나 핵폭발에 뒤따르는 잔존(殘存) 방사능에 대한 대책 등 큰 문제가 미해결로 남아 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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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인류가 방사능에 대해 과학적인 접근을 하기 시작한 것은 마리퀴리로 부터 였다고 해도 관언이 아니다 ,

[[   마리 스크워도프스카 퀴리(프랑스어: Marie Skłodowska-Curie, 문화어: 마리 큐리, 1867년 11월 7일 ~ 1934년 7월 4일)는 폴란드 출신의 프랑스 과학자이다. 본명은 마리아 살로메아 스크워도프스카(폴란드어: Maria Salomea Skłodowska)이다.

방사능 분야의 선구자이며 노벨상 수상자이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로,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동시에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라이너스 폴링하고 더불어 노벨상 2관왕에 등극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녀의 기간동안 세계는 1차 세계 대전이 발발 하였고,  1914- 1918년도 , 이후 2차 세계 대전의 시작점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도 수많은 과학자들이 방사선 연구와 정체 불명의 원자 쪼개기에 나서기도 하였다. 


1903년 라듐 연구로 마리 퀴리와 남편 피에르 퀴리가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고, 1907년에는 라듐 원자량의 정밀한 측정에 성공하였다. 1910년에는 금속 라듐을 분리하여, 1911년에는 라듐 및 폴로늄의 발견과 라듐의 성질 및 그 화합물 연구로 마리 퀴리 단독으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였다. 그 공적을 기려 방사능 단위에 퀴리라는 이름이, 화학 원소 퀴륨에 이름이 사용되었다. 마리 퀴리의 딸 부부인 이렌 졸리오퀴리와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도 노벨 화학상 수상자들이다.


이집안은 마리 퀴리 이후에도 그녀의 자녀 또한 노벨 화학상 수상자이기도 하고 방사선 분야에서도 업적또한 대한 하고 우라늄에 대한 연쇄 반응에 있어서도 중대한 발견을 하게 된다. 


현대 과학사에서 잘 알려진 하이젠 베르그또한 독일 태생이지만,  양자 역학의 선구자 이기도 하다. 이분또한 양차 세계 대전을 통해서 과학사에 이름을 널리 알리고 특히나 독일 제 3제국의 유망한 폭탄 제조가로서도 보호를 받게 된다. ( 그의 경우 무려 31세에 , 노벨상 수상자이다 .) 


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독일어: Werner Karl Heisenberg, [ˈvɛʁnɐ kaʁl ˈhaɪzn̩bɛʁk]; 영어 발음: /háizənbə̀ːrg/1901년 12월 5일 ~ 1976년 2월 1일)[2]는 독일의 이론물리학자이자 양자역학의 주요 선구자 중 하나이다. 그는 1925년에 획기적인 논문을 발표했다. 막스 보른과 파스쿠알 요르단과 함께 쓴 후속 논문에서는 양자역학의 행렬역학이 더욱 정교해졌다. 그는 1927년에 발표한 불확정성 원리로 유명하다. 하이젠베르크는 1932년 "양자역학의 창안에 대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3][노트 1]

하이젠베르크는 또한 난류의 유체동역학 이론, 원자핵강자성우주선, 그리고 아원자 입자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나치 독일의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 우란프로옉트의 총책임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1957년 뮌헨의 연구용 원자로와 함께 카를스루에에 최초의 원자로를 계획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그는 카이저 빌헬름 협회(곧 막스 플랑크 협회로 개명됨)의 소장으로 임명되어, 1958년 뮌헨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그 연구소의 소장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1960년부터 1970년까지 막스 플랑크 물리학 및 천체물리학 연구소(Max Planck Institute for Physics and Astrophysics)의 소장이 되었다.

하이젠베르크는 또한 독일 연구협회의 회장[4], 원자력 물리학 위원(Commission for Atomic Physics) 위원장, 핵 물리학 연구 그룹(Nuclear Physics Working Group)의 의장, 그리고 알렉산더 폰 훔볼트 재단(Alexander von Humboldt Foundation)의 회장이었다.[1]


빌헬름 카이저 연구소에서 우라늄계획의 일환으로 원자로 연구와 핵무기 제조 가능여부에 대해서 하이젠베르크와 오토 한과 같은 과학자들이 연구를 시작했다. 1942년 6월 4일 나치 수뇌부 앞에서 원자력의 군사적 의미를 밝힐 때, 그들은 핵무기 제조를 위해서 우라늄235가 필요하며, 자연계에서 이를 정제하여 농축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어려우며, 너무 비용이 많이 든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그들이 연구 중에 발견한 플루토늄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하지 않았다. 여튼 하이젠베르크와 그가 책임지고 있던 빌헬름 카이저 연구소에 의해서 독일이 핵무기를 손에 넣지 못한 것은 확실하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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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책의 주제로 돌아가자면,  2차 세계 대전이 시작 되자마자 연합국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이러한 우라늄을 사용한 신형 폭탄이 급격한 연쇄 반응을 통하면 엄청난 폭발력과 파괴력을 가진 괴물이 될거라는 점이고 

당시 유럽을 주축으로 한 과학도들의 발전 과정상 당연한 수순으로 프랑스나 독일에서 먼저 개발이 되고 실전 시험 사용도 가능 할 수 있다라는 것이 큰 문제 였던바 , 어떤 경로 라도 , 나치의 수뇌부에 과학자들의 문건과 이를 만들거나 실험 할수 있는 중수등이 필요 한데 ,  독일 지역 점령지에 있던  험난한 노르웨이 발전소 북부를 폭파해서 날려 버리거나 ,  파괴 하는 공작 임무를 띈 전쟁 용사들의 투혼이 흥미 진지 하게 그려 지고 있다 


단순 , 야구계의 이단아가 아닌 다양한 호기심과 무려 10여개국 언어를 구사 할 줄 아는 포 버그라는 전설적인 포수이자 스파이인 그는 종횡 무진 전장 아닌 전장을 누비면서 , 독일에 잠입하여 , 하이젠베르그를 납치 하거나 , 제거 하려는 임무를 부여 받았지만 끝내 그러하지 못한체 전쟁은 종결 되었다. 


지금은 CIA 의 전신이 되어버인 OSS 특수 부대는 상하관 복명 체계도 없고 , 오직 비대면 암호과 공작능력만으로로 적진에 침투하여 임무와 목적을 완성 한다.  패시 같은 인물은 이후 1960년대 이후로도 CIA 수장을 지내면서 , JFK 서거 당시의 전후 사건에도 관여 했다라는 음모론이 제기 되기도 한다.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진 맨하탄 프로젝트의  오펜 하이머 , 최근 영화로도 제작된 그의 역할또한 당시에는 공산주의 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고 정보기관의 모든 감시속에서도 과학적 혹은 정치적 임무를 완성 하였다. 


[[1925년에 하버드 대학교 화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3개월 후에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 캐벤디시 연구소(물리학 연구소)의 J.J. 톰슨 밑으로 유학을 갔다. 이 때는 양자역학이 태동하기 시작하고 있었으나, 화학을 배운 그가 갑자기 실험물리학에 적응하기는 힘들었다. 오펜하이머는 결국 포기하고 독일 괴팅겐 대학교의 막스 보른 밑으로 옮겨 가서 이론 물리학 특히 양자역학의 화학에의 응용분야인 스펙트럼의 양자론을 공부한다. 여기에는 닐스 보어의 결정적인 조언이 있었다고 전한다. 1926년서부터 1929년까지 괴팅겐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또 당시 괴팅겐에 함께 있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볼프강 파울리유진 위그너와 엔리코 페르미 등 20세기 물리학을 걸머지고 나가게 되는 젊은 사람들과 함께 어깨를 겨루고 있었다. 연속 스펙트럼의 양자론이라는 학위 논문 외에 16편의 논문을 이 기간 동안에 쓰고 있다. 이론 물리학자로서의 확고한 자리를 잡은 것이다.]] 


1943년 3월에서 1945년 10월까지의 2년 7개월 동안 원자폭탄을 설계ㆍ제작한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했다. 이 시기에 대한 평가는 그의 천재성 없이는 원자폭탄의 개발은 불가능했을 것이란 극찬에서부터 그가 한 일은 실제로 별 것이 아니었다는 비하론까지 다양하다.

그가 죽기 1년 전 프린스턴 대학교가 그에게 준 명예 박사 학위의 학위기에 물리학자로서 뱃사람이고 철학자, 마술가(馬術家)이며 언어학자이고 요리인이며 좋은 와인과 시의 애호가 라고 쓰여있던 것처럼 어느 분야에서도 취미의 영역을 훨씬 뛰어넘는 그의 재능과 아름다움에 대한 수준높은 식견 등을 가지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아 그의 집에 걸려 있던 반 고흐의 그림 석 장, 피카소의 그림 한 장, 그리고 르누아르의 그림 한 장 등이 보여 주는 재력(財力)은 그가 살아온 수준 높은 생활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모호한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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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원자폭탄은 , 독일의 항복이후 , 끝까지 항전 하려는 일본제국주의의 완전 패망에 종지부를 찍는 마침표로 작동 한 이후 , 세계사에서는 아직 두번쩨로 사용 된 적은 없는 현제 이다. 


평화적으로 이용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 친화적인 도구 이지만,  파괴적인 , 제국주의적 전략적인 사용을 승인 할때는 , 전세계는 이전과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변화 하거나 아예 인류라는 종이  수만년을 이어온 마지막을 장식하는 또한 다른 종의  서막을 알리는 종소리 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 무더위에 시원 한 여름 영화 , 마침 오펜 하이머를 본다면 어떨까요 .. ?    Written by E HAN . 


 

https://youtu.be/oSqK_v6zP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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