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View리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 Han Jul 05. 2024

잃어버린 대지 ; 간도, 찾아야 할 우리땅

오세영 역사 소설 

책 서두에 

[대동여지도로 유명한 지리학자 김정호가 백두산과 주변 지역을 상세히 조사하고 기록한, 그러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 지리지인 대동지지(大東地志) 제26권 ‘변방고(邊防考)’를 추적하며 겪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이다.


우연히 미국에서 전해진 “리뷰 오브 코리안 보더(Review of Korean Boader)”란 영문 문서에서 그간 전설처럼 전해지던 ‘변방고(邊防考)’의 실체가 확인되면서 주인공 윤성욱의 여정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과연 ‘변방고(邊防考)’는 어디에 있을까? 또 어떤 내용이 쓰여 있길래, 왜 사라진 것일까.] 


역사적 사실과 세계사 연대기를 절묘 하게 마춘 조합이랄까 .  한국의 간도 나아가서 북간도라는 지명은 현제 어디에 있고 우리역사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었을까 -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면서 이야기의 실마리를 찾아 가는 마치 한편의 추리물을 읽어 내리는 듯한 재미가 있는 글이다. 


우선 지명에 대한 고찰 이다. -  Source from 우리역사넷 

[ 간도의 어원과 범위  

간도라는 말에는 고종 초기 함경도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 개간지를 확대해 간 삶이 투영되어 있다. 1860~70년대 함경도에 대기근으로 많은 사람들이 두만강을 넘어 이주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관할 밖이었고 아직까지는 남의 국경을 침범하는 ‘범월(犯越)’이라고 하여 불법행위였다. 지방관 차원이었지만 조선정부가 그 개간을 용인한 것은 함경북도 종성군 두만강 가운데에 있는 퇴적된 섬이 시초였다. 사잇섬이라는 뜻의 한자어 간도(間島)라는 명칭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두만강 북쪽변까지 개간지를 확대하면서 개간지라는 뜻의 간도(墾島)라는 말도 혼용되었다. 종성군은 토지대장인 『간도야초(間島野草)』를 작성하여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청일 전쟁 이후 해란강 지역까지 한인들의 개간지가 확대되면서 같은 간도(間島)라는 말을 쓰면서도 해란강과 두만강 사이 지역이라는 의미를 담기도 하였다. 또 영토문제와 결부되고 두만강변의 군과 연계되어 간도지역을 나누어 무산간도, 회령간도, 종성간도, 온성간도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북간도(北間島, 北墾島)와 서간도(西間島, 西墾島)라는 말은 대한 제국기에 등장하였다. 1902년 대한 제국은 간도지역에 이범윤을 파견하여 주민을 보호하였다. 이때 그의 직함은 함북간도시찰(咸北間島視察)이었는데, 이를 줄여 ‘북간도시찰’이라 부르면서 자연스럽게 북간도라는 지역명칭이 사용되었다. 북간도라는 말에는 함경북도의 일부인 간도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으로 대한 제국 정부의 적극적인 간도정책의 산물이었다. 압록강 대안지역을 서간도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그 이후로 북간도의 대칭이었다. 함경도를 관북(關北)으로 평안도를 관서(關西)로 부르는 전통도 한 몫 하였다. 조선시대 압록강 대안지역은 ‘강북(江北)’이라 불렸다.


1907년에 설치된 통감부간도파출소는 현재 중국 연길지역 전체(당시 연길청)를 동간도라고 부르고, 길림 남부의 송화강 상류를 서간도로 지칭하였다. 이것은 통감부 파출소가 임의로 나눈 것으로 만주침략의 매개로 간도문제를 활용하려는 의도였다. 만주국 시기에 설치된 간도성(間島省)은 연길에다 혼춘(琿春) 지역을 포괄하였다.


이처럼 간도, 북간도, 서간도라는 명칭과 범위에는 한인들의 개척의 역사, 대한 제국의 간도정책, 일본의 만주 침략정책 등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두차례 걸친 청나와 와의 감계 협상 이다. - 아래는 전문 


" 조선정부가 수차례 토문감계(土門勘界)를 제기하여 마침내 양국은 1885년 을유감계(乙酉勘界)와 1887년 정해감계(丁亥勘界) 등 두 차례 영토문제 협상을 벌였다. 이에 따라 주민 귀환 문제 논의는 일단 유보되었다. 을유감계에서 조선 측 협상대표인 감계사 이중하는 백두산정계비의 토문강은 두만강과는 다른 강이며, 해란강-분계강을 양국 경계로 할 것을 주장했다. 


분계강(分界江)이라는 명칭은 조선후기 여러 지도에 실려 있는 지명으로 고려시대 윤관의 선춘령비와 연계되어 이해되어 왔다. 반면 청 대표는 토문(土門)은 두만(豆滿)을 다르게 부르는 이름으로 토문강이 곧 두만강이며, 백두산이 자신들의 발상지라는 전제 하에 백두산 아래 소백산에서 발원하는 두만강 물줄기를 경계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청으로서는 두만강과는 무관한 백두산정계비 존재 자체가 최대의 약점이었다. 


그래서 조선 측이 정계비를 옮겼을 것이라고 주장하여 정계비의 가치를 축소시키려 했다. 그리고는 당시 양국 관계를 환기하며, 조선 측이 정계비의 송화강 발원을 경계로 삼으려는 뜻인가 하고 역공하였다. 


이중하는 토문강이 해란강과 이어지지 않는 조사 결과와 조선시대의 문헌 중에 토문강이 곧 두만강이라는 기록을 확인하면서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협상 과정에 청 관리가 위협적인 말을 쏟아내기도 했지만, ‘토문’은 ‘두만’이 아님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 

===========================================================================


우연찮게 미국에서 전해진 " Reviw of Korean Boader" 란 영문 문서에서 전설 처럼 전해지던 " 변방고"의 실체를 확인 하면서 부터 주인공의 스토리가 시작이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동 여지도의 김정호 - 

『대동지지(大東地志)』는 목판본의『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22첩을 간행한 1861년 이후부터 1866년경 사이에 김정호(1804∼1866)가 편찬한 32권 15책의 필사본 전국 지리지이자 역사지리서이다.

김정호는 목판본의『대동여지도』22첩 등 주로 지도의 제작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지도와 지리지를 함께 제작한 지리학자이며,『대동지지』는 그가 마지막으로 편찬한 지리지이다. 현재 완질본이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본이 김정호의 친필본으로 알려져 있다.


문헌의 내용으로는  == 

[ 전국 지리지로는 경도(京都) 및 한성부(漢城府)가 1권, 경기도가 2∼4권, 충청도가 5∼6권, 경상도가 7∼10권, 전라도가 11∼14권, 강원도가 15∼16권, 황해도가 17∼18권, 함경도가 19∼20권, 평안도가 21∼24권까지 수록되어 있다. 하천에 관한 내용인 산수고(山水考)는 25권으로, 국경 방어에 관한 내용인 변방고(邊防考)는 26권으로 편제되었지만 내용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수도인 한양에서 전국 중요 지점까지의 거리 정보를 정리한 정리고(程里考)가 27∼28권에 수록되어 있고, 28권에는 역참(驛站)과 관련된 내용인 발참(撥站)과 연변해로(沿邊海路)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총 정리하여 체계적으로 기록한 방여총지(方輿總志)가 29∼32권까지 수록되어 있다.] 


이글 주제의 쟁점은 이 지점 부터 이다. 사라진 혹은 이미 26권으로 당시 편제되었고 이후 32권까지 수록된 전국지리서 중 변방고- 에 대한 내용만 빠져 있다라는 부분의 합리적인 의심이다. 

당시 1800년도는 청나라의 국제 정세도 매우 급변 하는 단게이고 1860년대의 아편 전젱 이후로 서강의 세력이 물밀듯이 들어올떼 한편으론 국제 지리학자인 - 독일인 리히트 호펜 - ( 아래 주 참조)도 극동 지방의 경게를 조사차 -이보다 무역루트 개척에 도움을 줄  아시아 -유럽간 실크로드 지리지에 더 관심을 가졌겠지만 -  동방의 지리학자와 조우 하였다라는 한편의 드라마 같은 우연과 필연을 적은 이야기가  나머지 찾지 못한 

' 변방고' 에 대한 당시 간도 , 북간도,의 경계선에 대한 부인 할 수 없는 실효적 지배와 한민족의 정착 이주터로서 자리매감한 당시의 나라간 경계에 대한 각국 열강들의 계산법이 다르지 않는 이상 자신에게 유리한 고문서의 입수를 학수 고대하며 벌였던 보이지 않는 스파이 전이 아니었을까라는 작가적 퀀덤 점프 상상력에  놀라움을 선사 한다. 


만약 , 그문건이 진실로 존재 하였고  ,  압록강 너머 백두산 정계비에 씌여져 있는 토문강의 발원 위치가 그보다 더 나아간 위치 라면 ,  청일 전쟁 이후 부터 꾸준히 주장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맞춤옷을 입히는 격이고 중국으로서는 남 중국해 지리적으로는 중국 연안이나 지속적으로 경계 분쟁을 겪고 있는 -센카투 열도 분쟁의 복사판 아닌 상황이 이뤄 질 수도 있으로라는 추정이다. 


[[ 센카쿠/댜오위다오는 동중국해상에 위치한 8개의 무인도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본, 중국, 대만 세 나라가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다. 이 열도는 총면적 6.32㎢로서 대만 북동쪽 200㎞, 오키나와 서남쪽 약 300㎞, 그리고 중국대륙 동쪽 300㎞에 위치하고 있다. 센카쿠/댜오위다오는 석유, 가스 등 중요한 천연자원으로 인해 독도/다케시마보다 더 중요한 경제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특히 대만의 애매한 위치 때문에 센카쿠/댜오위다오 문제는 더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일본은 센카쿠/댜오위다오가 1885년 오키나와현이 조사하기 전까지 어느 나라의 것도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1895년 1월 14일 일본은 센카쿠/댜오위다오를 공식적으로 일본 영토로 편입하기 위한 기념비를 세웠다. 따라서 일본은 센카쿠가 일본 영토였기 때문에 1895년 5월 청일전쟁 후 체결된 시모노세키조약에 의해 중국이 일본에 양도한 섬이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지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점령 하에 있다가 일본에 반환되었다. 일본은 주인 없는 섬을 자신들이 차지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중국은 16세기 명나라 사절단들이 조공을 바치러가던 항해 중에 가장먼저 류큐제도(오키나와)를 발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일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의해 오키나와가 미국에 이양될 때 센카쿠/댜오위다오는 오키나와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그 협상과정에 중국과 대만 누구도 참여하지 않았지만 1968년 유엔이 이 부근의 해저에 석유를 포함한 막대한 천연자원이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면서부터 센카쿠/댜오위다오를 둘러싼 각 나라의 영유권 주장이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이라는 미약한 존재는 청,러, 일, 독,영, 미 의 열강들에 둘러싸인 바람앞의 등잔과도 같은곳 , 열강들 사이에 자기주장이라는 것이 의미 없는 시절이다. 따라서 , 영토 분쟁 또한 나라별 문화적 , 그리고 생태학적으로 이미 수백년을 살고 실효 점유 하였던 땅덩어리 조차 잊고 살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은 가볼 수 없는 곳 , 존재 하지만 우리의 손길에 닿을 수 없는 그곳에 우리 선조들의 혼과 숨이 살아 있다고 믿는다. 

언제가 다시 우리 당대에 혹은 후손들이 그곳 땅을 밣아 새로이 나라간 경계와 감계를 토의할 그날이 오기를 다시 한번 기도를 올려 본다..  오늘의 생각들 ,. 용정 - 명동촌 - 독립운동의 산실이기도 한곳이다.  Written by e han 






명동촌 형성 및 변천 - source by 한국민족 백과 사전   

1899년 2월 18일에 문치정(文治政) 집안의 40명, 김하규(金河奎) 집안의 63명, 김약연(金躍淵, 1868∼1942) 집안의 31명, 남위언(南葦彦) 집안의 7명, 안내자 김항덕 등 142명이 이상촌 건설과 인재교육 등을 목적으로 북간도 부걸라재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부걸라재를 ‘명동촌’이라고 이름하고는, 부걸라재 일대의 토지를 매입하고자 하였다. 당시 일대의 토지는 중국인 지주인 동한(董閑)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총면적 약 600만 평 가운데 대부분의 땅은 산림이었고 개간된 땅은 불과 4∼5만 평 정도였다. 네 집안은 1,000여 경 규모의 땅을 매입하였는데, 당시 1경은 소 한 마리가 하루 동안 갈 수 있는 크기였다.


그 뒤 공동으로 부담하여 학전(學田)을 마련하였고, 학전에서 나오는 수입을 교육 기금으로 사용하였다. 문치정 집안은 동구(東溝), 김하규 집안은 대사동(大蛇洞, 龍洞), 김약연 집안은 선봉(先鋒) 남쪽 기슭인 장재촌(長財村), 남위언 집안은 중영촌(中英村)에 각각 정착하였다. 1900년에는 윤동주(尹東柱, 1917∼1945)의 증조부인 윤재옥도 가족을 이끌고 용암동(龍岩洞, 학교촌)으로 이주하였다. 그리하여 1899년∼1905년에 용암 · 장재 · 대룡 · 영암 등 4곳의 대표적인 마을이 명동촌이라고 불렸고, 주변의 소룡동 · 풍락동 · 들미동 · 중왕동 · 상중왕동 등도 점차 명동촌의 외연에 포함되었다.


한편 김약연 등은 명동촌을 기울어 가는 조선의 운명을 바로 세울 인재를 기르는 곳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1901년에 김약연은 장재촌에 ‘규암재(圭岩齋)’를 세웠고, 남위언은 상중영촌에 ‘오룡재(五龍齋)’를 두었으며, 김하규는 대룡동에 ‘소암재(素岩齋)’라는 서재를 각각 건립하여 학동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1908년 4월 27일에는 김약연 등이 여러 서재를 합하여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설립하였다. 명동서숙은 서전서숙(瑞甸書塾)에서 근무하였던 교사들을 초빙하여 그 맥을 이어갔다. 그 뒤1909년에 명동서숙은 명동학교로 바뀌었고, 1910년에는 명동중학으로 발전하였으며, 1911년에는 명동여학교가 설립되어, 북간도 지역 민족교육운동의 본산으로 자리하였다.


아울러 1909년에 명동학교 교무주임 정재면(鄭載冕) 등이 김약연 등의 협조를 받아 명동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는 700여 명의 명동촌 남자와 여자가 모여 부흥회를 열 정도로 발전하였다. 명동촌은 명동교회를 통해서 유교 공동체 사회에서 근대 기독교 문화 공동체로 변화하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암살의 역사 ; 정점 타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