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을 보고
Everything
영수증에 써야 하는 것과 쓰지 말아야 할 것. 가게에 사용할 흰색과 집에 사용할 흰색. 한 끗 차이의 영어와 한 끗 차이의 사랑. 한 손가락의 영원. 한 획의 헤어짐. 우리의 삶이 날이 갈수록 비루해져 가는 것은, 고민 끝에 가진 명료한 한 가지의 삶과 더불어, 갖지 못한 한 가지의 삶이 제곱되어 불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시도도 못한 꿈, 잃어버린 사랑. 하지 말았어야 할 말, 지울 수 없는 상처. 뜨거운 걸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지금보다 조금은 더 온기 있는 삶을 살 수 있었을까 하는 욕심. 욕심이 작아질수록 사실과 아쉬움은 커진다. 충분히 쥘 수 있는 것이었는데. 당장의 편협한 시각에 빼앗긴 삶의 작은 온기들이 너무 크게 느껴지는 지금. ’ 에브리씽‘ 파트가 유독 슬프게 다가온다. 건강하란 말. 사랑해란 말은 무엇이 그렇게 두렵고 무서워 건네지 못했을까. 조이를 배웅할 때, 종이의 뒷면이 이혼서류인 걸 깨달았을 때 초점을 잃은 에블린의 두 눈동자가 슬퍼 보였고. 웨이먼드 왕을 만나지 않고 쿵후고수가 된 에블린의 반짝거리는 눈동자는 슬펐다. 엄마는 정말 엄마가 아니었으면 더 행복했을까?
Everywhere
그럼 어디로 가야 할까. 결국 언젠간 끊어질 인연이었다고 단정 짓고, 꿈같은 건 어차피 이루지 못했을 거라 안주하며 살아야 할까. 죽음이라는 통계적 필연성에 매초 다가가는 것에 안주하며 어차피 정해진 끝이라 안심하면 충분한가? 죽음보다 큰 건 없다는 말은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 정확히는 이 세상이나 진리, 사랑 같은 모든 것들이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니 말이다. ‘에브리웨어’는 이러한 허무주의적 사고에 끝없이 싸워야 한다고 소리친다. 그 방식은 꽉쥔 주먹일 수도 있고, 다정함일 수도 있다.
쥐었던 주먹을 다시 편다는 것은 굉장한 도전정신이 필요하다. 누군가를 온전히 포용하겠다는 건, 그 수많은 우주의 모든 나를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까탈스러운 디어드리의 소시지 손가락이 싫은 나, 동성애자 딸이 부끄러운 나,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나 같은 모든 ‘나’를 말이다.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그런 비참하게 아름다운 다정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세금폭탄과 가압류. 신발까지 넣고 돌리는 손님의 무책임함. 엉뚱하다고 생각한 남편과 제멋대로인 딸. 이 모든 것에 투쟁해 온 에블린의 삶의 온기를 완전히 뒤바꾼 가장 영화스러운 장면. 어떤 영화보다 다정하게 전해지는 교훈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딱 한 번만 더 붙잡아줄 에블린을 찾기 위해 수천번의 우주를 점프했을 조이. 제발 자신을 놓으라고 소리칠 사람과 그걸 붙잡아줄 사람이 같다는 것. 이제는 얼마나 기꺼운 일인지 알게 된 것 같다. 돌멩이가 되어도 세상이 부여한 개연성 따위는 무시한 채 손을 건넬 수 있다면. 때론 그 세상이 우리따윈 아무 소용없다고 소리쳐도, 두 눈을 마주 보고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을 거야‘ 하고 말한다면. 그 모든 우주가 항상 너로 귀결된다면.
앞으로도 무한대로 팽창하는 다중우주가 온전히 다정할 수 있길. 그렇다고 해서 꼭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에블린처럼 치열하게 살며 세상의 풍파에 버티고 버티면 우리를 구해줄 웨이먼드를 어떤 우주에서 보내주겠지. 하지만 이제는 용기를 내보고 싶어진다. 누군가를 위해 나를 온전히 내려놓을 다짐. 그 사람과 똑같이 아플 각오를. 그럼에도 언젠가 그 순간이 후회가 된다면, ‘그럼 나는 그 찰나의 순간들을 소중히 누릴게‘.
All at once
그 많은 우주는 정말 ’한꺼번에‘ 괜찮아질 수 있었다.
ps. 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