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베를린으로 떠났던 것은 2016년도 여름이 끝나던 즈음이었을 것이다. 3개월의 긴 여름방학이 끝났어도 여전히 다들 아쉬울 무렵 나는 휴학계를 제출하고 비행기 표를 끊었다. 물론 그때의 나는 독일어라곤 한 마디도 제대로 못 했으며(지금도 다르지는 않다), 독일에 누군가 아는 사람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지금도 그때 왜 독일에 가고 싶어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좀 (부끄럽지만) 운명적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마 표면적으로는 그때쯤 수업에서 마르크스에 대해서 배우면서, 독일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수업은 경제학이나 사회학, 정치학 수업도 아니었고 ‘뉴미디어의 이해’라는 아주 모호한 제목의 수업이었다.(미디어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미디어의 정체성은 모호함, 에 가깝다) 거기서 나는 마르크스를 처음 접했다. 당연히 영 처음이라고는 할 수 없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반공에 미쳐있는 나라든 간에 그를 빼고 사회나 역사를 배울 수 없으니까. 아쉬운 일이다. 반공에 미쳐서 그의 멋진 사상을 가르치지 않는다니. 어쨌든 다시 ‘뉴미디어의 이해’로 돌아가면 미디어는 사회와 떼어놓고 말할 수 없으니 컴퓨터와 인터넷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기도 하고 또한 그것은 영화사와 등을 맞대고 있기도 하다. 또한 그것이 인공지능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 역동적인 흐름을 배우는 과정에서 나는 ‘시공간의 근대화’라는 주제를 접했다.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강의실은 왜 네모 모양일까. 중세 건축의 패러다임은 신과 통할 수 있도록 원형적이었는데, 그게 어떤 모양이든 신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언제부터 우리는 네모진, 각진 건물 속에서 살게 된 것일까.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왜 시계를 보고 사나. 언제부터 시간이 24시간이었나. 누군가는 그런 당연한 것들을 왜 묻느냐 하겠지만 나는 그런 당연한 것들에 의문을 가지는 것이 무척 설렜다. 근대화가 무엇인가, 표준화와 규격화가 무엇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소외가 무엇인가. 표준과 규격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모두가 표준과 규격 안에 존재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안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이런 다양한 질문들에 답을 찾고 배워가면서 언젠가부터 느껴온 괴리에 갇힌 나의 주위가 밝혀지는 기분이었다. ‘성공’과 ‘행복’ 그 사이의 괴리. 언젠가 빠져놓고 한 번도 헤어 나오지 못한 그곳. 그것은 한국사회 그 자체였다. 당연한 것들을 묻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반공이라는 이름 아래 많은 것들을 배척하는, 무척 역동적이었으나 한 번도 급진적이었던 적 없는 이 사회의 괴리 속에 갇힌 것이었다. 이곳은 내가 생각하는 행복한 삶을 이룰 수가 없는 곳이었다. 이 사회는 ‘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내가 사회 속의 구성으로 기능하기를 바라며, 그러지 못하는 사람을 낙오시킨다. 그 낙오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고, 그들을 가여워하지 않는 사회다. 나는 소위 객관적인 기준으로 남들보다 나은 환경 아래 살고 있지만 이것은 영원한가? 영영 나는 이 나은 환경에서 살 수 있나? 아주 불행한 사건이 연속적으로 덮쳐서 우리 집이 망하고 내가 길거리에 나앉으면 사회는 나를 구제해주려나? 나는 묻기를 반복했고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독일에 갔다. 그곳은 마르크스의 나라고, 비스마르크가 시작한 사회 보장 제도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고, 그것을 받치는 경제력이 유럽연합에서 가장 강한 나라다. 그 사회 속의 구성원으로 살 수 있다면 적어도 안전한 사회 속에서 살리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나는 무척 비장했네, 조금 웃기다.
흔히 베를린을 수식하는 말들이 있는데 나는 그중에 두 가지 정도를 아주 좋아한다. 하나는 가난하지만 섹시한 도시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학생과 예술가의 도시라는 말이다. 둘은 맥락을 같이 하는 부분이 있다. 학생과 예술가는 언제나 모든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직업군이 아닌가. 그들은 부유할 수 없다. 그들은 사회에서 노동력으로 기능하고 무언가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렇다. 그런 사람들이 가득 모인 곳이 바로 베를린임을 뜻하는 수식어다. 그다음으로, 가난하지만 섹시하다는 게 가능한가? 가난은 사람을 초라하게 만든다. 섹시하단 것은 본능과 맞닿은 감각이 반응한다는 것인데 본능은 초라한 것엔 반응하지 않는다. 그런데 가난하지만 섹시하다니? 나는 가난하지만 섹시한 도시라는 말을 '가난해도 초라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종합하자면 가장 가난한 학생과 예술가들이 모여들고, 그런 이들이 초라해지지 않아도 되는 도시라고. 말 그대로 정말, 섹시했다.
내가 베를린에 간 목표는 명확했다. ‘살아보기’ 베를린에서 살아보기가 나의 목표였는데 늘 사람들이 넌 여기에 왜 왔냐고 물으면 답하기가 좀 곤란하기는 했다. I'm trying to find how it is like to live in the city like here. 매번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다행히 그런 말에 그것 참 한심하네, 하고 대답하는 사람은 없어서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그곳에 있었다. (그런 반응이 사실은 좋았다. 우리나라의 비관적이고 현실적인 감각에서 조금 벗어나는 일이었기 때문에) 지금 기억에 남는 것들을 몇 가지 적어보려고 하는데 나는 그 사회에서 고작 여행자였음에도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느꼈고, 그것은 흔히 우리가 여행을 갔을 때 갖게 되는 감상과는 달랐다.
우선 그곳에선 화장을 하지 않아도 됐다. 그러니까 오히려 내가 화장을 하고 다니는 것을 더 신기하게 봤다. 그리고 브라를 입지 않아도 괜찮았다. 지하철에서는 겨드랑이 털을 깎지 않은 여자들을 몇 번 봤는데 당연히 당황스러웠다. 의연하고 자연스럽게 넘기고 싶었지만 어려웠다. 한국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광경이었기 때문에 그랬다. 그러나 당황하고 거북했던 후에 느껴진 것은 해방감이었다. 남이 털을 깎지 않은 것을 보고 왜 내가 해방감을 느끼나. 그래도 되는구나, 여기선 그래도 괜찮나 보다 하게 되니까 그랬다.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직접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 매일매일 나를 설레고 행복하게 했다. 그래서 나는 자주 화장을 하지 않고 속옷을 챙겨 입지 않고 거리를 걸었다. 피부에 뜨거운 공기가 바로 닿았고, 속이 답답하지 않아서 어색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무척 자유로웠다. 생활비가 아주 저렴했다. 슈퍼마켓에 가는 것이 항상 즐거웠다. 카트가 가득 담기도록 장을 봐도 우리나라 마트에서 쓰는 돈의 반절밖에 내지 않았다. 외국에는 흔히 슈퍼마켓에도 일종의 계급 차이가 존재한다. 조금 비싼 곳, 조금 저렴한 곳, 이런 식인데 여유가 있을 땐 에데카에 가고 돈이 조금 부족하면 알디 ALDI에 간다. 사실 사람들은 딱히 그런 것을 인지하지는 않지만 자연히 그렇게 된다. 두 마트에 가격 차이는 크지 않다. 그러나 소비자에게는 선택권이 넓어진다. 돈을 쓸 수 있는 선택의 스펙트럼이 넓었고 그와 동시에 돈을 쓰지 않을 자유 또한 보장된 곳이었다. 여행자라 가난했지만 나는 한국에서 보다도 더 잘 먹고 잘 살았다.
독일의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규직 노동자에 비해 돈을 더 많이 받는다. 노동 시장 내에서 고용 불안정성까지 임금으로 환산해서 계산한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여긴 정말 좋은 나라구나. 이들의 약자를 보는 태도를 아주 잘 보여주는 대목 아닌가. 사회와 정부는 그들을 버리지 않는다. 가난하다고 초라해질 필요도 없고 가난하다고 사회에서 낙오당하지 않는다.
거리에 노숙자들이 많았다. 나는 노숙자들을 무서워했다. 남루한 옷을 입고도 거리를 헤매며 존엄이 없는 양 행동하는 것이 나는 무척 두려웠다. 그들이 해코지를 하면 어떻게 하나, 난동을 부린다면. 그런 경우야 당연히 있겠지만 남루하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도 남에게 해코지를 하고 난동을 부린다. 내가 차별적인 생각을 한 거다. 베를린에는 노숙자들이 많았다. 나는 그게 정말 이상했다. 사귀게 된 독일인 남자 친구와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웃으며 근데 어차피 거리에 지나가는 행인들이나 노숙자들이나 비슷해 보이지 않아?라고 말했다. 독일인들은 옷 입는 것엔 관심이라곤 없는 사람들이라 수긍이 되는 지점이 있었다. 그는 또 나에게 그들은 원해서 거리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독일엔 길 고양이나 길에 사는 강아지가 없다. 그들은 모두 보호 시설에서 산다. 고양이나 강아지의 의지를 인간이 헤아릴 수 없기에 먼저 나서서 보살핀다. 그러나 노숙자들은 사람이라서 의식과 의지가 있다. 그래서 독일 정부는 그들에게 집도 밥도 옷도 돈도 모두 제공하지만 그들이 원치 않는데도 가둬두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연히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서울엔 노숙자가 별로 없다. 서울역에 몇 모여 있고 다른 동네들에선 잘 보이지 않는다. 베를린에선 어딜 가나 보이는 이들이 서울에선 잘 보이지 않는다. 서울이 더 살기 좋아 노숙자가 없는 걸까? 나는 그들이 내몰렸다고 생각했다. 남루하다는 이유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차별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치워진’ 것이다. 그들은 어디에 있나. 가난하고 남루하고 그래서 마치 정상 같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나. 왜 그들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에 함께 존재할 수가 없나.
우리는 의심을 내비치지 않는 사회에서 산다.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으니 환경이 거리낌 없이 우리를 덮쳐온다. 그렇게 개인의 자리가 비좁아진다. 우리는 그 비좁아진 자리에서 서로를 끌어내리고 밀치며 산다. 남들을 짓밟는 것이 당연하다. 수직 계층 이동이 더 이상은 어려운 사회에서 남들을 짓밟는 것은 올라가기 위함이 아니다. 자기 자리라도 보전하려면 우리는 곁에서 사람을 밀치고 짓밟아야 한다. 야수 자본주의 그게 이보다 더 어울리는 상황은 없다. 그래서, 이렇게나 구구절절하게 상황 판단을 했으니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는 얘기는 자연스럽게 뒤에 따라붙는다.
중학교 때 한국을 떠나 사는 것이 꿈이었다. 앞서 말한 성공과 행복의 괴리감을 느낀 것이 바로 그때가 시작이었다. 나는 행복하고 싶은데 성공을 하면 행복한가? 성공은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 같은데 내가 만약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럼 나는 행복할 수 없는 것일까? 누구나 해봤을 법한 그런 질문들을 혼자 품었고 그런 생각에 빠질 때면 아주 아찔하고 아득해졌다. 앞으로의 미래가 이미 어린 나이부터 두려웠고 무척 외로웠다. 삶에서 실패하는 악몽을 밤에는 꾸지도 않고 대신 낮에 품고 다녔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떠났지만 나는 다시 돌아왔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떠났다가 돌아온 이곳에서 다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단순히 정리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복잡하다고 미뤄둘 수 없는 문제기도 하다. 생각하는 대로 살랬다. 그렇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니까. 나는 이 말을 믿는다. 또한 세상을 바꾸려고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지 않으려고 무언가를 한다는 말을 좋아한다. 월남전 당시 홀로 백악관 앞에서 반전 시위를 하던 운동가의 말이다. 중학교 때 처음 듣고 잊지 않고 있다. 기자가 1인 시위를 하는 그에게 이렇게 한다고 아무것도 변하는 것은 없을 텐데 왜 이러고 있냐고 물었다. 그때 그가 한 대답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자연히 따라오는 물음도 의심하자. 그 마저 결과주의적 패러다임 아닐까? 어쩌긴 뭘 어쩌나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른 채 왜 이렇게 삶이 힘든지 끙끙대다가 억울해져서 남이나 까내리고 남들 짓밟고 그 위에 올라서고 그렇게 살면 안 되니까. 그러지 말자고 하는 얘기다.
그리고 스스로 반성하자, 자꾸 결론을 내려는 것. 그 결론의 가치를 따지는 것은 투머치 자본주의 투머치 효율성 투머치 결과주의적 사고방식이다. 우리는 찌들었다.
‘최후의 인간은 열정도 없고 헌신도 하지 않는 무심한 존재다. 사는 데 지쳐버려 꿈도 꿀 수 없는 최후의 인간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은 채 오직 안전과 편안 만을 추구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마르크스 못지않게 니체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