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읽으며
학부시절의 악몽이 떠올랐다. TMI : 나는 세부 전공으로 대중문화를 전공했는데, 주로 그게 이런 내용이다. 문화 연구는 레비스트로스, 롤랑 바르트, 등등의 구조주의에서 격동의 현대사를 거치며 이후 포스트 구조주의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그 이전의 패러다임이었던 구조주의란 기본적으로 구조에 기반한다. 우리를 둘러싼 텍스트(글자의 의미가 아니다.) 자체에 기반하므로 그것을 어떻게 해체하고 해석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다룬다. 해체와 해독의 과정이 어렵고 복잡하지만 그런대로 할 만하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우리에게는 자연화되어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구조를 찾아대는 거니까. 예를 들면 우리가 사는 건물을 들여다보는 거다. 그냥 항상 거기 있었던 벽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 철제 구조물들을 찾아 결국 이 건물이 지어지기 전 도면이 어떠했고 그 도면은 누가 왜 어째서 만들어냈는가를 찾아낸다. 그런데 포스트 구조주의는 여기서도 말했듯이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그 구조와 자연화된 텍스트를 이미 규범으로 보고 그것을 거부한다. 아무리 건물 안에서 건물구조를 들여다보고 도면을 유추하고 이걸 누가 만들었느냐 생각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포스트구조주의에서는 이 건물 밖으로 나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건물로부터의 탈출 방법을 찾는 것이다. 학부 때 포스트 구조주의를 배우는 것 자체가 포스트 구조주의 같았다. 그러니까 대충 뭐 하나 제대로 이해되는 게 없었다는 말이다. (지금도 난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태어나서 학습 과정에서 나의 이해력이 부족하다고 느껴졌던 순간이 그다지 많지 않았는데 참으로 유감스러운 순간이었다. 이게 뭐야? 지금 내가 이걸 배우는 게 맞아? 도무지 제대로 감이 잡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장황한 설명을 한 줄로 줄이면 이 책을 읽는 동안 그랬다는 말이다. 그러나 다행히 나는 실재하는 경험들, 내가 간접적으로 접한 경험으로부터 실마리를 조금은 찾았다고 느꼈다.
1. 그럼에도 ‘비실재’로 치부되는 사람들은 실재의 정지 상태에 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나는 대본 분석을 하느라 ‘천하장사 마돈나’라는 작품의 시나리오를 봐야 했다. 그 영화를 본 적은 없지만 익히 알고 있었다. 대충 여자가 되고 싶은 소년이 성전환 수술을 받기 위해 씨름을 하게 되고 그래서 뭐 어찌어찌 결말이 나겠지, 하는 생각으로 읽었다. 대본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흘러갔다. 아버지 캐릭터가 주인공의 가장 큰 적대 세력으로 나오고, 결과적으로 씨름 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뻔하지만 익히 아는 감동을 주는 소년 만화 같은 스토리다. 코미디적인 요소도 놓치지 않는다. 스토리 리듬의 조절이 잘 된 영화라고 느꼈다. 대본을 한 줄, 한 줄, 한 장, 한 장 읽다가 나는 스토리가 주는 메시지를 발견하고 크게 놀랐다. 나는 남자로 태어난 소년이 여자가 된다는 스토리를 받아들일 때 ‘맞아, 그런 사람들이 있다지? 왜 그 사람들은 다른 성별이 되고 싶어 할까? 그조차 사회가 여성 혹은 남성에 부여한 이미지와 어떤 패러다임 때문에 만들어진 생각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해왔다. (감히) 그 대본을 읽는 동안에도. 그래서 그 대사를 읽었을 때 젠더 디스포리아(성별 불쾌감)를 겪어본 일이 없고, 소위 말하는 시스젠더이자, 헤테로 섹슈얼인 나의 입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의 바운더리가 고작 그 정도였다고 반성해야 했다. 진심으로, 깊이, 마음을 다해.
주인공 소년은 말한다.
“난 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살고 싶은 거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기분. 살아도 사는 거 같지 않은 기분! 그걸 네가 알아?”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기분. 그 대사를 읽는데 문득 아득해졌다. 태어나서 사는 것 자체가 큰 고통인데 그 고통을 겪는 와중에 태어나지도 않은 기분을 느낀다는 것은, 도대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일까? 나는 감히 알지 못하고 알 것 같다고도 말하고 싶지 않다. 그 후에 젠더 트러블을 읽으면서 1번의 제목으로 붙인 문장을 발견했다. 젠더 디스포리아를 겪는 사람들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존재는 부정당하고, ‘비실재’로 치부됨으로써 실재의 정지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번이라도 그런 삶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존재는 언제나 움직인다. 그 움직임이 쌓여 삶이 된다. 이들에게는 본인의 존재와 실체로 움직일 기회가 박탈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살아나갈 수가 있지? 그들의 삶을 삶이라고 할 수 있나? 이들의 정체성은 ‘비실재’하는 것인데? 학문의 범위를 떠나서 나는 이것이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머릿속에 존재하는 관념 따위로 이들의 실존을 부정하는 것 자체가. 이것은 젠더 디스포리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규범 외의 존재들은 모두 그들의 실재가 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학문이든 법이든 죄다 후행 조치처럼 보였다. 결국 주디스 버틀러는 이런 제도와 관념, 규범들이 거대한 규범을 위한 후행 조치이자 규범 그 자체라는 말을 한다. 법을 개정하고 누구를 대상으로 삼아 연구를 하는 동안에도 그들의 삶은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잖아! 예를 들어, 동성애와 동성애자들이 이미 존재함에도 그들이 결혼할 권리는 여전히 인정받지 못한다. 그들은 제도권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 제도가 옳고 그른지는 차치하더라도. 이렇게 그들의 정체성이 규범 하에서 비실재하는 것으로 상정되므로 그들의 존재는 부정당한다. 그들의 실존이 선행하는(혹은 해야 하는) 것임에도 후행하는 규범적인 것에 따라 이들의 실재와 비실재가 정해진다. 나는 결국 주디스 버틀러가 이 지점을 지적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주디스 버틀러는 책에서 분명히 밝힌다. 그녀는 본인이 이것을 통해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이 어떻게 해야 하나,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나 그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고. 내가 생각하기에 주디는 이들의 존재를 알기 때문에 이들의 정지된 실재를 알리고 그들에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을 물 위로 끌어올리고 싶어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디는 묻는 것이다.
“젠더 구성은 어디서,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가? 구성에 앞선 구성자인 인간을 가정하지 않는 구성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2. HEY JUDY!
책은 한 문장 한 문장 읽어가는 것이 고되다고 느껴질 만큼 어려웠다. 또 후회했다. 아, 나 또 이런 책을 추천해서 모두를 고난에 빠트렸겠네…(이 책은 내가 추천했다,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어차피 우리가 여성학, 퀴어 이론 등의 학문을 깊이 있게 파지 않는 이상 그녀가 말하는 모든 것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이 책을 읽는 것이 의미 있다고 느꼈다. 우선 앞서 ‘비실재’로 치부되는 실재의 정지 상태로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에 그랬고 또한 나는 이 책에서 주디가 보여준 태도를 우리가 모두 함께 ‘만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 책을 읽는 의미가 생긴다고 본다.
이 책을 읽으려고 펼쳤을 때 책날개 부분에 저자 설명을 읽었다. ‘버틀러는 1999년 미국 학술지 <철학과 문학>에서 ‘최악의 저자’로 뽑혔을 만큼 난해한 글쓰기로 악명이 높지만…’ 처음에는 웃어넘겼다. 그리고 약간의 기대를 했다. 번역을 어떻게 했을 것인가, 에 대해서. 원문으로 본다면 그녀가 수사학 rhetoric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써낸 ‘난해한 글쓰기’를 직접 경험할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는 다시 한번 가공을 거친 ‘번역본’을 보기 때문에 그걸 다 경험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이 ‘난해한 글쓰기’와 ‘최악의 저자’라는 그녀에게 따라붙은 수식어에 반응하는 주디의 태도에서 나는 감격했다. (책의 60~ 61 페이지에 나온다.)
그 이상의 놀라움은 아마도 우리가 독서 대중을, 복잡하고 도전적인 책을 읽어낼 그들의 능력과 욕망을 과소평가한 탓일 수도 있다. 그때 복잡하다는 말은 호의적이지 않고, 도전적이라는 말도 당연히 진리로 여겨지던 것에 문제를 제기하며, 그런 진리의 당연한 수용이야말로 사실상 억압적인 것이 된다.
그녀는 퀴어 이론가이자 대학에서 문학 비평을 가르친다. 문화연구를 공부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언어학에 대해서 접한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럼 다시 질문. 여기서의 사회적 약속이 ‘모두가 평등한 상태에서 합의를 몇 번이고 거쳐 어떤 존재를 이런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였다.’라고 생각하는 나이브함은 우리에겐 이젠 없지 않나? (있다면 미안하지만 당신은 나이브하다) 평등하거나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항상 경계해야 하는 자연화 naturalization라는 개념이 이 책에서도 반복적으로 나오는데 자연화의 개념은 들리는 뉘앙스만큼 긍정적인 의미의 말이 아니다. 자연스러워 우리가 알아채지 못할 만큼 어떤 말이나 이미지 등이 우리에게 깊게 박혀있는 상태, 혹은 그렇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자연화’ 조차 부정적인 의미를 모르고 듣기엔 참 듣기 좋은 말 같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이걸 조심하라는 의미다.) 이와 관련해서 책의 61페이지에서 주디는 말한다. ‘상식에는 급진적인 면이 없다.’ 쉽게 이야기하라는 것이 그녀가 굳이 받아들여야 할 요구인지, 글이 명확하고 투명한 것이 무엇을 위해 그래야 하는지 되묻는다. 책을 쓰려면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언어 매체는 애초에 중립적이지 못하므로 그녀는 ‘난해한 글쓰기’라는 방식을 통해 도구로써의 언어에 대한 의심과 반박을 선언하는 것이다. 사실 그녀에게 최악의 저자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 그녀의 저서를 난해한 글쓰기라고 하는 것 모두 어쩌면 일종의 정치적 행위로 보이기도 한다.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논쟁을 이기는 방법 중에 ‘메시지를 공격할 수 없다면 메신저를 공격하라’는 말이 있다. 어떤 메시지를 들고 나온 사람 자체를 공격하고 그의 공신력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저 사람을 믿을 수 없으니 그가 말하는 것도 믿을 수 없다, 는 결론이 나게 되는 대표적인 논점 흐리기, 물타기의 기술이다. 그 비열함을 이렇게 우아하고 분명하게 받아치는 태도가 진심으로 감격적이었다. 앞으로 우리는 여자이기 때문에 혹은 우리가 가진 정체성을 이유로 메신저로서 공격받는 순간이 지금까지 보다도 더 많을 것이다. 나는 누가 뿌린 똥물을 뒤집어써서 추접스러운 냄새를 풍겨도 이렇게 대꾸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똥물을 뿌려놓고 냄새가 난다 그럼 어떻게 하나요?" (이 ㅆㅂㄹㅁ)
또한 앞서 살짝 언급했듯이 주디는 이 책을 세상에 모든 ‘비실재’로 치부되는 사람을 위해 썼다는 생각을 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주디가 해낸 엄청난 학문적 전개와 집요한 논쟁의 기반에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와 관련해서 63페이지에서 주디는 말한다.
나는 또한 배제당한 삶의 폭력성의 실상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삶’이라는 이름을 갖지 못하며, 그런 삶의 유폐 상태는 삶의 중지나 유예된 사형 선고를 의미한다.
나는 사회과학을 한 때 공부한 사람이고 여전히 사회과학적 관점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런 내가 생각하기에 이 관점과 학문에서 사람에 대한 믿음과 애정이 배제된다면 이를 더 공부하거나 유지할 필요가 없어진다고 생각한다. 사회과학의 기반은 반드시 인간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어야 한다. 사회과학자들은 현상을 바라볼 때 그 관점이 냉소적일 수는 있지만 (매우 높은 가능성으로) 그 태도가 냉정해서는 안된다. 인간 존재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것은 고작해야 인간을 노동력의 교환가치 정도로 보는 기업가들이나 하는 짓이다. (좀 사회주의자 같았나?) 가끔 대학의 연구자들을 보면 이론에 갇혀 사람을 안 본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구조 안의 사람들을 보지 않으면 구조를 파헤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어떤 사회과학 책을 읽을 때보다 나는 주디스 버틀러에게서 모든 정체성으로 싸우며 사는 존재들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느꼈다.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무척 감동적인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