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고 있었으나 또한 발견한 것에 관한

'명랑한 은둔자' 독후감

by 지독

<명랑한 은둔자, 캐롤라인 냅/ 김명남 옮김/ 바다 출판사>


1.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캐롤라인에게 말을 걸었다. 영어로. 그게 그가 쓰던 언어라 그런 것도 있지만 나는 외국어로 얘기할 때 느끼는 나와 언어 사이의 거리감을 좋아한다. 특히나 이렇게 내밀한 이야기를 할 때는 그런 것이 필요하다. 모국어는 나에게 너무 자연스럽고 가까운 언어라 내 감정을 북받치게 할 때가 많다. 아무튼 읽다가 결국 나는 얘기하고 말았다. no wonder why you left here that early. 하루에 담배를 두 갑씩 피우던 캐롤라인은 폐암에 걸려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기보다 그는 삶을 깎아먹으며 살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깎아먹을 것이 남지 않았으니 죽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삶을 아주 잘 알고 있다.


2. 중학교 때, 몇 학년이었던 것까진 기억하지 못 하지만 그래도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그때는 낮이었고 아마 쉬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교실은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로 시끄러웠는데, 나는 그 가운데서 혼자 앉아 멍하니 그 소음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때 참 외롭다는 생각을 했다. 그 당시의 나는 아주 매사에 날이 서 있었던, 누가 보면 사춘기를 심하게 겪는다고 생각할 법한 소녀였다. 나는 혼자 있고 싶었지만 그럼에도 늘 외로웠다. 어째서 그럴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양가적인 마음이었다. 그런데 문득 ‘혼자 있고 싶지만 외롭다.’는 사실을 그때, 그 낮에 아주 소란했던 와중에 홀로 고요했던 쉬는 시간에 느꼈다. 아주 분명하게. 고독한 것과 외롭다는 것은 다른 것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생각했다. 나의 선택인 고독, 혼자됨으로 자유로워지는 것과 불가피한 외로움, 혼자되는 상황에 굴복하는 것. 그때는 아무래도 어렸으니까 지금보다 훨씬 형편없이 그 문제를 다뤘다. 십여 년이 지났으니, 나는 나아졌나? 잘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혼자 있고 싶지만 외롭다. 고립감에 대해 생각한다. 고립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끊임없이 생각하는 날이 많다. 역설적이게도 고립된 상태에는 그런 생각을 차마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지금 내가 고립되지 않은 상태임을 증명한다. 사실 그 상태를 정확히 지칭하는 ‘고립’이라는 단어를 찾은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구체적으로 기억에 남는 시작은 누군가 ‘난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으면서 살 거야.’라고 한 말을 들은 이후였다. 흔한 말인데 유독 그때 이 말이 마음에 턱, 걸렸다. 사실은 못된 버릇인데 나는 이렇게 마음에 걸린 소리들을 집요하게 취조하고는 한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네가 줬으면 얼마나 줬는데?

받은 건 얼마나 되는데?

수적으로 그걸 계산할 수 있어?

논리적으로는?

네가 모르는 새에 무언가 주거나 받았을 가능성은 생각했니?"


그 말을 꺼낸 사람을 앞에 앉혀두고 이렇게 물었다면 나는 그에게 한 대 얻어 맞거나, 혹은 앉혀둔 그 누군가가 울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정도는 한다. 그래서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나 스스로에게 그렇게 묻는다. 당연히 내 마음도 고통스러워한다. 자해는 여전히 버리지 못한 버릇이다.


각설하고 얘기하자면 나는 결국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안쓰럽다.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질 수 있다는 착각, 그렇게 하고 있다는 과도한 자기 확신, 사실은 그 안에 숨어버렸을 뿐인 연약한 나. 나는 그 모든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착각에서 벗어나는 법이 무엇인지 당당하게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이 온전히 나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해서 설명하기가 참 어렵다. 내가 그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던 때는 사실 문득 찾아온 깨달음의 순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담배를 폈었고 엄마는 그걸 알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어떻게 아냐면, 우리는 떡하니 마주쳤다. 당황해 어색하게 넘어갔고. 서로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엄마에게 담배 피우러 나간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 종종 심부름을 위장해 담배를 피웠다. 그렇게 담배를 피우는데 문득, 엄마의 모른 척이 참 고마웠다. 엄마는 담배 냄새를 무척 싫어한다. 그리고 엄마는 여자애가 담배 피운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구세대다. 게다가 백해무익한 흡연을 딸이 한다고 하니 걱정도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엄마는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까지 그런 엄마의 태도를 한 번도 고마워한 적이 없었다.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혹은 그저 엄마가 겁쟁이라 외면한다고 생각했을 뿐. 그게 영 아닌 말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엄마가 나를 인내하고 배려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주위 사람들이 내 곁에 존재하며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준다는 사실들을 천천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깨닫기도 했고, 그게 저절로 느껴지기도 했다. 난 무의식적으로 내가 참으며, 내가 뭔가를 더 많이 내어주며 산다고 생각하며 살았을 것이다. 여전히 그럴지도 모른다. 혹은 앞으로 다시 그렇게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나는 곁에 있는 사람들의 애정과 배려와 인내를 느낀다. 고립은 자기 방어 기제라고 책에서 캐롤라인은 얘기했지만 내가 생각했을 때는 자해이기도 하다. 고립은 몹시도 자기 파괴적이다. 누구도 혼자 살 수는 없다. no man is an island (어떤 영화에서 이 말을 봤던 것 같은데. 휴 그랜트... 어쨌든.) 내가 말했듯 나는 아직 자해의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벗어나려 노력 중이다.


3. 내가 중독에 취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은 시점은 아마 작년이었던 것 같다. 나는 자주 불안한 사람이다 보니 늘 긴장 상태로 산다. 그 긴장 상태는 무의식적인 것이라 나조차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술을 마시면 그 긴장이 풀어진다. 나는 편안해지고, 좀 더 나다워진다고 느낀다. 그때 생각했다. 나 좀 조심해야겠구나. 초식동물의 감이 예민한 것처럼 나는 취약한 인간이라 기민하게 나의 상태를 느낀다. 그러다가 몇 개월 전 우울증의 증상이 신체적으로 발현하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나는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거의 매일 밤 술을 마셨다. 이건 사실 캐롤라인도 말하는 거식증과 관련이 있기도 한데 나도 과도하게 다이어트를 했던 경험이 있다. 그때 책에서 그가 말한 ‘통제의 쾌감’을 느꼈고, 그가 설명하는 것처럼 아무리 해도 충분하지 않았다. 그때도 기민하게 내가 그만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 발만 넘으면 거식증에 걸릴 것 같았다. (우습게도, 먹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에 반하는 짓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그 논리를 세운 후에야 거식증의 위협을 느꼈다.-너무나 당연한 소린데도 이해한 후에야 위협당한 내가 우스웠다는 소리다.) 캐롤라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던 것도 아마 그 부분을 읽을 때쯤이었다. 그때 그에게 말을 거는 것을 정말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중독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를 하며 선택의 순간에 대해서 말한다. 반드시 무언가, 내가 빠진 중독을 버리고 얻을 무언가를 선택해야 한다고. 내가 과한 다이어트 중독에서 벗어난 방식도 그런 식이었다. 나는 머리가 멍해졌고 더 이상 내가 똑똑한 것 같지 않았다. 그건 치명적이었다. 나의 지성은 나의 정체성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며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의 부분이다. 그런데 고작 마른 몸 하나 얻자고 그것이 망가진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이어트를 그만뒀다. 그러나 후유증은 남아있다. 나는 여전히 마음 편히 식사하지 못하고, 먹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입이 짧은 것과는 별 관련이 없다. 나는 원래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사람이라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울증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쯤에도 그랬다. 식욕을 통제할 수 없어 낮에 마구 먹어 놓고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저녁을 굶고, 대신 맥주를 마셨다. 멍청한 짓이지만, 아무튼 그렇게 했다. 기이하게 섞여버린 어떤 중독에 빠진 것이었다. 내가 술을 줄이기 시작한 것은 의사 선생님이 내게 알코올 의존증 증세가 의심이 된다고 말씀하셨을 때였고, 나는 아직까지는 잘 해내고 있다. 금연도 제법 잘 해내고 있고. 술을 많이 마실 때도, 담배를 피울 때도, 다이어트를 심하게 할 때도 나는 사실 그것이 중학교 때 시작된 자해가 발전한 형태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습관적으로 고통을 찾는다. 한창 스트레스받을 때는 귀를 엄청 뚫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술도 마시지 않고, 담배를 피우지도 않고, 피어싱이나 타투를 하지도 않는다. 더 이상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고통이 없다. 그래서 불안을 잊을 방법이 없다. 그래서 이전보다 더 자주 불안하다. 자해의 금단 증상이랄까. 그래서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캐롤라인이 담배를 하루에 두 갑씩 피우다가 42세에 폐암으로 죽은 것은 사실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행해진 자살이었다는 것을.


4. 일전에 신점을 봤는데 점쟁이가 나더러 혼자 미쳐갈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삼십 분 동안이나 했다. 나는 무속 신앙이랄 것을 믿지 않는데도 그때만큼은 꿰뚫린 기분이 들었다. 이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 책을 통해 캐롤라인을 볼 때 아주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의 끝, 혹은 나의 미래를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나는 캐롤라인처럼 오랫동안 사투하다가 천천히 나를 죽이지도, 혼자 미쳐가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이것은 나의 해석과 선언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그녀의 삶과 죽음을 내가 해석하는 방식에 대해 곡해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그 사투가 아름다웠다고 생각하고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내가 이렇게 몇 마디 말로 평가하기 싫을 정도로 그의 삶을 존중한다. 삶은 늘 그런 것이니까. 그녀가 글을 쓴-혹은 써야만 했던 이유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일기를 쓰기로 했다. 그리고 엄마와 여동생에게 일기장을 선물했다. 그리고 그 맨 앞에 편지를 썼다. 이것의 이름은 ‘상실 프로젝트’다. 그들에게 매년 일기장을 선물할 것이다.


상실은 삶에 편재한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시간’이 흘러가고, 그러는 와중에 우리는 무언가를 잊기도 하고 잃기도 한다. 게다가 우리는 매일 죽어간다. 요즘 들어 죽음이 필연이고 삶이 우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 중 누군가가 먼저 죽었을 때 서로에게는 흔적이 필요하다. 심지어 시간이 지난 후의 자신을 위해서도. 시간은 지나고 기억은 사라지니까 가끔 펴보면 예상치 못한, 잊고 있었던 삶의 흔적을 발견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자각하지 못했던 삶의 상실을 느끼리라. 그것이 비워내야 했던 것이든, 사라져 아쉬운 것이든 그것은 흔적 그 자체의 의미가 생길 것이다. 나는 이제 자해 대신에 글을 쓴다. 원래는 동반하던 것이었지만 이제 나는 나로부터 불안을 대체할 고통을 모두 뺏었으니 그 대신 종이에 상처를 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완전한 대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이게 나를 어디로 데려가 어떻게 만들 지야 나도 모르지만. 언젠가 맞이할 상실을 위해서. 다만 혼자 미쳐가거나 오래 나를 해치며 기어코 죽고 마는 짓은 하지 않기를 바라며.


+p.s 자해는 참 이상해. 중독적이라는 점에서. 이상한 쾌감이 있거든. 그와 동시에 나는 잘 인지하고 있었어, 나는 지금 이 행위를 함으로써 내 몸을 망치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이런 인지가 나만의 것일 수도 있어. 사실 의존증을 겪는 사람들은 의존증을 인정하지 않는 게 대부분이라고 해. 그런데 나는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 멈출 수가 없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여전히 신기해. 특히 알코올 의존증은 지금 생각해도 심각한 수준이었어. 진탕 마시고 뇌진탕이 오고, 얼굴에 멍이 들었는데도 아무 기억이 없을 때도 있었고. 술 마시다가 그대로 기절한 적도 많았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했어. 그 자체의 행위가 자기 파괴적이면서도 중독적이었던 것 같아. 정말 이상하고 신기하고 두려워. 그렇지만 이제 나는 잘 견뎌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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