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한 번쯤은 최악의 엄마를 만난다.

by 지독

*진행 중인 독서모임에서 <나쁜 엄마>를 주제로 쓴 에세이입니다.



‘나쁘다.’는 가치 평가로서 언제나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말이라 나는 이 ‘나쁘다.’는 형용사의 극단으로 가보기로 했다. ‘최악’ 최악의 엄마. 가장 나쁜 엄마. 세상에 가장 나쁜 엄마라고 할 만한 사람들은 참 많아 보인다. 그런 것으로까지 줄 세우기는 하고 싶지 않으니까, 차치하고. 과보호로 애를 망치는 엄마도 있고, 애를 방임하는 엄마도 있고, 급기야 애를 죽이는 엄마까지. ‘엄마’라는 존재가 나쁜 짓을 하는 방법은 아주 많다. 그러나 그 대상은 한정적이다. ‘엄마’라는 존재는 아이를 상정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엄마’가 나쁜 짓을 하는 대상은 늘 ‘아이’ 일 수밖에 없으므로 나쁜 엄마는 아이 입장에서 볼 때만 성립이 가능하다. 이렇게 뻔한 소리를 왜 하느냐고? 그에 대한 대답도 아주 뻔한 이야기다. 나는 ‘나의 엄마’가 제일 나쁜 엄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옆집 애가 학대를 당해도, 윗집 엄마가 애를 방임해도 어느 가정에서 어떤 엄마가 최악의 짓을 하던 나는 감히 그 집의 아이가 겪는 고통을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앞선 문장에서 나오는 두 번째의 ‘나’는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비단 나 자신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아이들을 의미한다. 사람은 난 데 없이 살아있을 수는 없으니 저를 낳아주고 길러준 어머니가 어떻게든 존재할 것 아닌가? 아이들은 그렇게 어떻게든 한 번쯤은 최악의 엄마를 갖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내가 누굴 욕하겠어, 바로 우리 엄마가 있는데!


뭐 그런 소리다.


어제 엄마랑 밥을 먹는데 난 아빠를 닮아 많이 섬세하고 불안한 성향이고, 엄마는 그에 비해 참 무던하고 안정적인 성향이라는 얘길 했다. 같이 낳았는데 이렇게 안 섞이는 것도 참 신기하다는 얘길 하던 중이었다. 엄마는 본인이 안정적인 이유가 엄마의 엄마인 외할머니 덕이라는 소리를 했다. 그러다가 나를 빤히 보면서 얘기했다.


“너도 그런 엄마가 있었어야 했는데. 그런 좋은 엄마 아래서 컸어야 했어.”


그래서 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


“그래도 이제 엄마 좋아. 27년 걸렸네. 예전엔 엄마가 싫었던 적도 있지만.”


나는 엄마가 나에게 왜 그렇게 말했는지 잘 안다. 그건 엄마의 죄책감이다. 자신이 내게 못해준 것,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받은 고통을 알고 있는 것과 더불어 그 안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죄책감을 좀 내려놓고 싶은 자기 연민이 있다. 그래서 나는 절대 “아냐, 엄마도 좋은 엄마였어. 최선을 다했어. 충분히 했어,” 하고 얘기하지 않는다. 나는 엄마를 그만 불쌍해하고 싶다. 예전엔 “엄마는 내가 이렇게 자라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어디 가서 내 자랑하고 다니지 마. 엄마가 잘한 건 아무것도 없어.” 하고 얘기하곤 했는데 이제 써놓고 보니 너무 미워하느라 애쓰는 게 좀 웃기다. 저때 그렇게 말했던 것을 후회하는 건 아니고. 그때의 나는 그래야만 했다. 때론 그때 품었던 미움을 그냥 흘러 보내는 것도 필요하다. 그와 동시에 이제는 내가 27년 만에 엄마가 좋아졌다고 대답하는 이유는 나는 이제 내가 엄마를 사랑한다는 것을 온전히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는 데에 자그마치 27년이 걸렸다.

일반적인 경우의 딸로서 말하자면 ‘나의 엄마’가 최악인 이유는 그 여자가 불쌍하기 때문이다. 내 개인적인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많은 딸들이 엄마를 불쌍해한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는 동안 내가 가장 가까이서 본 그 여자의 삶이 정말이지 안타깝고, 불쌍한 거다.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인지행동 심리학자 김경일 교수의 영상을 봤는데 ‘나에게 동정심을 일으키는 악인’에 관한 것이었다. 기시감이 들었다. 어머니가 딸에게 행하는 행태가 많은 경우에 이렇지 않나? 물론 그게 악의가 있고 말고의 문제는 아니다. 또한 어머니들이 악인이라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지만. 딸로 하여금 동정심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딸에게서 보상받고, 딸을 종속시키고 그와 동시에 이것은 행위 자체로 악행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악행은, 우리가 겪어왔듯이, 대물림된다. 우리는 성장과정에서의 자연스러운 동일시와 또한 본능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사랑이라는 이유로 그 여자들을 필연적으로 안타까워하고 불쌍해할 수밖에 없으니까. 타인의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것이 사랑의 반증 아니겠나. 그런데도 딸들의 사랑이 어머니의 의도치 않은 악행의 근거가 된다는 사실이 슬프다.


그렇게 삶이 굴러가다 보면 우리는 너무나 사랑하는 우리 엄마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순간을 필연적으로 마주하고 만다.


사실 어떤 자식이 몇 살이고를 떠나서 자식이 부모를 미워한다는 것은 미움을 받는 부모에게도 그렇겠지만 미워하는 아이에게 더 큰 고통이다. 부모는 자식이 마주하는 첫 타인이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에게는 자아가 생기는 근거이고, 나를 반추하게 되는 기준이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자식이 부모를 미워한다는 것은 극도의 자기부정이자 자기혐오가 된다. 나는 오래 그것에 시달렸다.


최근 들어 나는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가시적인 이유는 부모로부터 자립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취업난.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자립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이렇게까지 힘들게 만들 줄 몰랐다. 사실 그 기저에는 나는 지금까지 부모로부터 자립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고, 어떻게든 지금까지 내가 혼자서 결정해서 내 삶을 꾸려왔다는 오만하고 독단적인 생각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내 삶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일정 부분의 몫을 인정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을 인정해야만 하는 순간이 온 거다.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다고 결정하고부터, 나는 그들의 재정적이고 감정적 지원이 절실해져 버렸다. 이러한 심리적 갈등이 내 자아 정체감에 혼란을 일으켰다. 27년 동안의 살아온 나의 삶의 목표는 오직 그들로부터 독립하여 그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었는데, 이럴 수가! 뭐 대충 이런 상태였던 거지. 쉽게 말하자면 나는 27년간 부모를 미워하는 것-일종의 자기혐오-을 원동력으로 살았는데 그게 부정당하고야 만 위기에 놓였다고 할 수 있다. 어느 책에서 읽었던 수식이나 논리와는 달리 삶에서는 부정의 부정이 긍정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게 맞는 말이더라. 논리의 틀 안에서 말하면 사실 자기혐오를 부정당했다면 자기를 사랑하는 상태가 되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나는 아노미 anomie 상태를 맞이한 것이다. 그런 혼란 상태를 맞이하여 나는 혼자서 처참하고 꼴사나워져 갔다. 그러던 와중에 엄마가 마침 내가 사는 집에 방문을 했는데 내가 좀 청소를 강박적으로 하는 편이라 이것저것 잔소리를 했다. 엄마가 내 눈치를 보는 것 같길래 엄마한테 내 눈치 보지 말라고 (이미 다 보게 해 놓고) 농담을 던졌는데 엄마는 농담이랍시고


'월세 한 푼 안 내는데 내가 왜 이 집에서 네 눈치를 보느냐, ' 고 말했다.


저 말만 두고 보면 참 배려 없는 언행이고, 굳이 말을 저렇게 해야 하나 싶지만 사실 이건, 그냥 누구나 그렇듯 우리 엄마의 성격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한 귀퉁이에 자기애가 강하고, 남에 대한 배려를 잘 모르고, 심지어 둔한 부분이 있다. 그냥 그런 사람인 거다. 그리고 그게 유독 나랑 맞지 않는 부분일 뿐이고.


평소라면 나는 당연히


“왜 말을 그딴 식으로 해?!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닌데!”


소리를 바락 지르고 넘어갔겠지만 그때의 나는 정말 ‘취약한’ 상태여서 나는 너무 크게 충격을 받았고 그 후로 방에 틀어박혀 몇 시간을 내리 울었다. 엄마가 내게 상처 준 말을 끊임없이 곱씹었고 의도를 곡해했고 우울에 잡아 먹혀갔다. 그러는 와중에 가슴에 뻐근한 통증이 생겼고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숨이 막혔다. 일종의 불안 발작이 온 거다. 그렇게 몇 시간의 고통을 견디다가 나는 결국 엄마랑 얘기를 하기로 했다.


*여동생이 옆에서 도와주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거다. cheers to my sister.


나는 엄마랑 내 방문을 잠가놓고 둘이서 얘기했다. 몇 시간 전에 한 말이 나한테는 큰 상처가 되었고 그런 이유는 이러이러하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엄마가 내가 글 쓰느라 이렇게 예민한 거라고 단정 짓는 것은 모욕적이라고. (난 평소에 글 써서 저래, 하는 소리 안 들으려고 되게 노력한다고...) 우리 엄마는 악의 없이 나쁜 짓을 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자기 행동이 나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반복하는 사람은 아니다, 사실 그럴 수도 있는 사람이긴 한데 나를 너무 사랑해서, 나한테는 나쁜 짓을 반복하지 않는다. -적어도 안 그러고 싶어 한다. (난 엄마를 사랑하느라 이해심이 아주 넓어졌다.) 아무튼 엄마는 나에게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생각해보면 엄마와 나는 늘 이런 식이었다. 엄마는 나에게 의도치 않게 상처를 줬고 나는 상처를 받아 보복하듯이 의도적으로 엄마를 상처를 줬다. 그러다가 감정이 가라앉으면 우린 늘 서로를 마주하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아마 영원히 이런 식일 거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반복될 것이다. 엄마는 그러는 과정에서 내게 한 가지 사실을 증명해냈다. 그건 내게는 당연하지 않아서 나를 힘들게 만들었던 하나의 사실인데, 바로 내가 어떻든, 우리 관계의 상태가 어떻든 상관없이 엄마는 내 엄마라는 사실. 그 간단하고도 어려운 사실을 오랜 기간 동안 내게 증명해 보이면서 그 여자는 비로소 나의 엄마가 되었다. 그때 비로소 나는 내가 누군가에게 버려지고, 모든 것에 실패해도 돌아갈 곳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립과 성취에 매달려 외로워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도. 그러는 데에만 27년이 걸렸다.


사실 어쩌면 가족은 존재하는 것exist의 문제라기보다 되는 것become의 문제일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타인들이니까. 사실 '가족'은 이름 같아 마치 이미 존재하는 것 같지만 사실 난 그게 행위나 과정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건 삶이 합쳐지는 과정이고, 그게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한다. 게다가 나는 내가 엄마라고 부르는 그 여자를 너무 사랑해서 내겐 그 고통이 너무 치명적이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상처 줬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은 일종의 자기 방어 기제, 자기 보호 본능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우리에겐 내 엄마인 저 여자가 차라리 나쁘다고 얘기하는 것이, 나에게 상처를 준 엄마를 그럼에도 사랑한다고 인정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 된다. 마음은 생각보다 치밀하고, 논리 이전에 존재한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최악의 엄마를 한 번씩 가져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비극적이지만, ‘그래 나 사실은 엄마를 너무 사랑해서 엄마가 준 상처가 너무 컸어.’라고 인정하기 시작하면 비극의 끝이 보인다. 다행히 삶은 계속되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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