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의 영화를 보게 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왜 봤더라. 나는 소위 말하는 넷플릭스 증후군을 앓고 있다. 병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개인적으로 뭐든 현상화하고 이름 붙이고, 범주화하려는 게 웃기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구글에 넷플릭스 증후군, 이라고 치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넷플릭스 증후군이란 너무 많은 선택권으로 인해 작품을 결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을 의미하는 신조어다. 넷플릭스에서 실제 콘텐츠를 감상하는 시간보다 무엇을 볼지 검색하고 구경하는 시간이 더 긴 현상을 말하기도 한다.'
그래도 가끔 이렇게 수많은 선택권 앞에서 뭘 볼지, 최대한 합리적으로 나의 2시간을 할애하기 위해서 약 서너 시간 고민하다 보면 직관적인 선택이 더 도움이 될 때가 많다. 그 영화가 어떤 평을 얻었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따지기보다 그냥 꽂히는 거 한 번 보는 거다. 그러다가 망하면, 뭐. 인생의 망작 리스트에 올려두고 술자리 안줏거리로 신랄하게 씹어 먹으면 되니까. 나는 아무래도 왕가위의 영화에 익숙지 않았다. 그의 영화들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개봉했고, 인기를 얻었고 그냥 영화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 들어봤을 수도 있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아비정전>을 보게 된 것은 그냥 그 '직관적 선택'의 결과였다. 나는 그게 어떤 영화인지도 몰랐다. 나에겐 그 영화의 주연배우 장국영이 미안하지만 그냥 만우절에 죽었다던 홍콩 배우였다. 그가 그렇게 아름답다는데 그의 영화를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거다. 나는 그래도 제법 확고한 얼굴 취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TMI 지만, 나는 유덕화와 금성무 같은 얼굴을 사랑한다.- 장국영이나 양조위 같은 얼굴을 내가 좋아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 일을 확신하고 단언하는 게 그렇게 무의미한 줄은 그때 알았다. 나는 아비정전을 틀자마자, 그리고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기도 전에, 장국영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때, 그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을 때, 그 느낌이 참 이상했다. 그때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그가 아름답지 않다고 확신하기 전에 그가 살아 움직이는 것을 봤어야 했다고. 그의 눈빛은 포착하기 어려울 만큼 섬세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사진으로는 그를 충분히 알 수가 없었던 거였다. 장국영에 대한 선입견을 뒤엎음과 동시에 아비정전은 나의 많은 것을 뒤엎는 영화였다. 우선 스토리가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했던 것을 뒤집었고, 잘 알지도 못했던 왕가위의 미감을 만끽하게 했고, 심지어 결말 조차 그랬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비정전의 결말 부분에서 유덕화(이름이 뭐였지)가 아비에게 소리 지르는 씬을 좋아한다. 아비가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발 없는 새, 그 새가 땅에 내려오는 순간, 그것이 가지는 죽음에 대한 메타포에 대해 그는 정신 차리라, 소리친다. 그땐 이거 혹시 블랙 코미디인가, 생각하기도 했다. 그건 여전히 아주 마음에 드는 장면이다.
영화를 본 직후의 감상은 단순하게 '이게 도대체 뭐람?'이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도대체 뭔지 모를 그것이 가슴에 묵직하게 얹힌 기분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오랫동안 들여다봐야 했다. 언어화되지 않은 어떤 감상과 나는 왜 그런 감상을 가지게 되었나, 그래서 도대체 그건 뭐람? 나는 성격이 급해서 당장 결론을 내려야만 직성이 풀리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 나이가 들면서 받아들인 사실이 하나 있다. 모든 것의 결론이 언제나 즉각적으로 나는 건 아니며, 있는 결론을 내가 찾지 못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다만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고 결론까지 도달하는 그 과정이 어쩌면 그 결론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슴에 묵직하게 남은 그것을 품은 채로 왕가위의 다른 영화들을 보기 시작했다. 중경삼림을 봤고, 해피투게더를 봤다. 화양연화를 보고, 2046, 에로스 등등 볼 수 있는 건 다 찾아봤다.
그의 영화를 보면서 나는 인생의 어떤 순간들에 꺼내봐야 할 영화를 미리 본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의 영화마다 그것을 볼 적절한 때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화양연화를 보다가 그런 생각을 했는데, 내가 언젠가 40-50대가 되면 내가 결혼을 했든 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나는 꼭 그 영화를 다시 보고 싶다. 내가 지금 화양연화를 보고 느끼는 감상과 그때 마흔이 넘어 그 영화를 보고 느낄 감상이 아주 다르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해피투게더를 다시 봤다. 연애가 너무 하고 싶어서, 그리고 누군가의 체온이 아주 그리워서 그 영화를 틀었다. 사실 그러면 중경삼림을 보는 게 낫지 않나,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나도 그런 의문을 나 스스로에게 품었다. 연애가 하고 싶고 체온이 그리워질수록 나는 그것이 그렇게 씁쓸하게 느껴진다. 헤어짐으로 끝난 만남이 모두 실패라고 할 수는 없지만, 헤어질 때마다 나는 혼자됨을 견뎌야 하지 않았나? 헤어진 직후 견디는 혼자됨이란 분리불안 같다고도 생각했다. 마치 한 번도 혼자였던 적이 없다는 듯한, 오롯이 이제는 혼자라는 듯한 고립감과 불안이 나를 잠 못 들게 했다. 아휘도 보영도 마치 그래 보인다. 결국 분리되기로, 혼자이기를 받아들여야만 했을 때 이과수 폭포의 물을 맞으며 아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이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이 든 것은 아침에 샤워를 하며 공상에 잠겨있을 때였는데, 문득 나는 그의 영화에서 보이는 '불안'을 사랑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줄기를 맞으며 기계적으로 몸은 움직이고 머릿속은 복잡할 때 그런 생각이 불쑥 떠오르는 게 웃기다.) 아무튼 내가 그의 영화를 보며 끊임없이 매혹된 이유, 처음 아비정전을 보고 가슴에 묵직하게 남은 것 아, 그게 모두 불안이었구나 깨달았다. 나는 불안을 견디며 산다. 생존과 실존 사이에서, 요구와 욕구 사이에서, 이해와 오해 사이에서. 나는 그가 늘 어떤 순간, 스쳐 지나간 혹은 스쳐 지나보내지 못한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의 이야기에서 '불안'을 봤던 것이다. 관계의 어긋남, 그럼에도 끊어낼 수 없는. 이별에 갇힌 남자가 갇힌 것으로부터 문을 열고 나오는. 묻고 싶었으나 묻지 못한. 확신하고 확신받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한. 나는 그가 그려낸 불안의 순간들에 흠뻑 빠져 있던 것이다.
내가 태어난 즈음해서 개봉했던 영화들을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나, 하는 해답이 '불안'이라는 정서로 단순히 풀리지는 않는다. 그래도 가끔 매듭은 상상하지도 못한 방식으로 풀리고는 한다. 얼마 전에 <벌새>의 시나리오 집을 읽었다. 그 뒤에 붙은 평론들을 읽다가 나의 불안, 그리고 나만의 것이 아닌 9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갖는 불안을 설명하기에 아주 적절한 글을 봐서 인용한다.
집합적 몽상의 질서 안에서 우리는 꿈을 누군가 침탈할까,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나만 실패할까 불안하고, 그 꿈이 내 인생을 전혀 설명할 수 없어서 그 꿈 이외의 것을 이해하지 못해서 우울하다.
<벌새 시나리오 > 붕괴하는 꿈속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이별한다는 것 / 김원영 (171p~) 중에서
내가 태어난 94년 8월은 100년 만의 폭염이 찾아왔었고, 그해 10월에는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나는 그런 시대에 태어났다. 90년대는 한국 사회의 붕괴가 시작된 시기였다. 성수대교가 무너졌고, 이듬해 삼풍 백화점이 무너졌고, IMF가 찾아왔다. 집적되어있던 부조리와 폐해가 무너지기 시작하던 시대였다. 나는 공교롭게도 공교육 속 '체벌'의 마지막 세대이다. 가끔 강제로 머리카락도 잘렸고, 의자 들고 서있기도 했고 엉덩이며 손바닥이 부르트도록 맞기도 하는 와중에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한 경제난을 겪었고 그래도 대학은 갔다. 세월호 사건이 발생했고, 추모도 하지 못하도록 그 사건은 정치적으로 얼룩졌고 성차별과 여혐의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해 그에 대한 이견으로 사귀던 사람과 헤어지기도 했다. 대학 졸업할 즈음엔 역동하는 현대사 (아직 안 끝났네!) 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초유의 탄핵 사건도 벌어졌다. 그리고 그런 거대한 일들과는 마치 별개 같이 느껴지는 취업난의 당사자라 나의 아빠는 당신이 은퇴하기 전에 취업해라 여전히 잔소리를 한다. 게다가 2년 전부터는 역병이 돌기 시작했다. 사실 좀 웃기다. 살아있는 게 신기하다. 10년 후에도 살아있기를 염원하고 걱정하다가도 그냥 죽는 게 낫나 싶기도 하고.
각 시대마다 시대적 불안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내가 제일 힘들다, 우리 세대가 제일 힘들다 그런 말 하자는 게 아니다. 다만 불안의 정서가 온전히 개인의 것인 양 치부될 때가 많다는 것이다. 불안하게 된 이유도 개인의 잘못이고 불안을 덜어내려는 노력도 개인의 책임이라는 식의 사고가 만연하다. 우선 나부터도 그렇다. 나는 나의 불안을 대할 때 동굴로 향한다. 사람을 잘 만나지 않고, 아무런 이유 없이 울고, 그냥 침대 위에서 내다버리고 싶은 불안을 껴안고 운다. 그건 내 것이니 누구도 도와줄 수 없으니까. 그리고 매번 울 수만은 없으니까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본다. 문득 예술이라는 거 너무 좋다.
그는 영화를 통해 아주 사소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아니다. 그의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이 가진 불안은 시대와 무관하지 않다. 한참 그에게 빠져 그의 영화를 볼 때는 몰랐다. 시간이 지나고 오늘 아침 샤워를 하다가 깨달은 거다. 그래서 내가 그의 영화를 좋아하나 보다, 하고.
오늘 밤에는 <아비정전>을 다시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