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호스

독후감

by 지독


1. <화이트 호스> 독후감


‘이해는 가장 적나라한 오해이고, 오해는 가장 잘한 이해다.’ 나는 무척 자주 이 말을 인용하곤 한다. 이 말을 아주 오래 마음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이 말을 보고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인지 마침 그러한 생각을 하던 와중에 이 말이 내 눈에 들었는지는 이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해받고 오해당하고 누군가를 이해하고 오해하는 그 모든 과정들이 내게 무척 고통스러웠던 순간이 있었다. 실은 삶 자체가 이해와 오해의 연속이라 그때의 나는 아마 삶이 무척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어째서 저들은 내 말을 오해할까, 어째서 나는 저 사람을 이해할 수 없나. 아마 나의 글쓰기는 그것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이해와 오해의 그 고통스러운 간극을 좁히고자. 이해받고자, 오해당하지 않고자. 이 역시 글 속에서처럼 모든 것은 내 예상과 달랐다.

결국 모든 것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나의 삶도 마찬가지고, 이 책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그래 보인다. 글 속에서도 나와있는 저자의 죽음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저자는 진짜 죽었나? 정말로? 독자의 탄생에 의해 저자는 위치를 위협당했나? 그래서 결국 죽어버렸나?


아니, 저자는 살아있다.


롤랑 바르트는 독자의 탄생을 말하면서 저자를 죽였다. 그에게는 충분히 철학적으로 사유한 과정과 그 이유가 있었겠지. 또한 그 ‘죽음’과 ‘탄생’으로 선언된 것은 철학적 메타포겠지만 좀 무식하게 부딪쳐 보고 싶다. —롤랑 바르트에 대해서는 대학 때 잠시 배웠고 <사랑의 단상>이라는 책을 한 권 고작 읽었을 뿐이고, 이 독후감을 위해 논문 한 편 고작 읽었을 뿐이니 그와 내 사이에도 당연히 이해와 오해의 간극이 존재하므로— 바르트에 따르면 작품은 오랫동안 저자만의 것으로 인식되었다. 전적이고 최종적인, 저자는 세계 속의 조물주이고 작품 속 모든 것이 저자에 귀속되는. 절대 권력 위치였다. 독자는 일방적으로 그 전적이고 최종적인 저자의 의도에 다가가고자 해석한다는 것이 그가 저자의 죽음을 말하던 때에 지배적이었던 해석적 패러다임이었다.(변광배,저자의 죽음과 귀환: R. 바르트를 중심으로⌟,『세계문학 비교연구』 제45호, 2013) 글 속의 주인공이 소설 출간을 앞두고 ‘저자의 죽음’이라는 철학적 사유 속으로 피신한 것은 사실 그런 이유일 것이다. 모든 것이 전적으로, 최종적으로 저자의 것이 된다는 거대한 부담감. 그러니까 그녀는 저자의 죽음이라는 개념이 난무하는 책으로 숨으면서도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의 의미는 나만이 안다고, 내가 뭘 했는지 나는 안다고. 이것은 내 것이라고.


저자가 죽었다고 하기엔 소유권을 제법 분명히 주장하는데? 봐, 저자는 살아있다니까. 이 모순적인 경험을 글을 써봤던 사람이라면 모두 해보지 않았나? 평가의 잣대 끝에 놓인 상태에서 느끼는 무력감, 그럼에도 도무지 나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나의 글에 대한 집착. 그 모순적인 간극에 끼어 치열하게 하는 자기 합리화. 매번 하는 것이다. 익숙하고 씁쓸한 맛이다.


작년에 2차 창작을 하면서 독자 하나를 만났다. 오래된 판의 새로 유입된 작가였던 나는 ‘새로운 글’에 관심도 없던 그 고정적인 판에서 나는 꽤 괴로워하고 있었다. 읽히지 않는 글이 얼마나 외롭고 고된 것인지 그때 처음 깨달았다. 그저 쓰고 싶어 시작했다고 떠들어댔지만 사실 얼마나 읽히고 싶어 했는지 깨달았다. 어느 날 내 글을 정말 좋아하고 열심히 읽어주는 사람이 생겼다. 어찌나 기쁘던지. 그때 처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던 나에게는 그 모든 것이 특별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그것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분은 내 글에 지속적으로 의미를 부여했고 그만의 것으로 해석했다. 내 앞에 적나라하게 들이밀어지는 그것을 보는 것이 처음에는 즐겁고 기뻤으나 점점 부담스러워졌다. 그렇게까지 생각한 적은 없는데, 그분은 그렇게까지 해석해주었고. 논리적으로는 그것이 퍽 들어맞아 갔다. 그러니까 <화이트 호스> 속에서 대중에게 과도하게 사랑받고 결국은 글을 한 줄도 쓸 수 없이 슬럼프에 빠진 그녀에게 어느 정도 나는 공감한다. 특히 예술과 고결함을 사유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돌아다니다가 그 옷과 스스로를 분리하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이 나와 닮아있었다. 바르트가 말하듯 저자가 죽은 존재였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독자는 탄생했고 저자는 그 탄생에 자리를 위협받았다. 죽음의 선언을 할 만큼이나! 그러나 그와 동시에 저자는 죽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바르트는 본인이 작가가 된 후에 자신의 주장을 뒤엎었다고 하니 이 실존과 생존 사이의 욕구를 그도 비로소 알게 된 것 아닐까? — 아무튼, 바르트의 철학적 사유를 완전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내가 겪은 경험은 그랬다. 작가의 입장에서는 그 글이 온전히 내 것일 수 없다는 것은 비극적이다. 그러나 또한 그것이 현실이다. 또한 그런 현실 속에서 창작하는 사람은 창작자로서 온전히 가지는 것을 찾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한다. 그러니 글 속의 화자도, 그가 동경하는 ‘이선아’ 또한 그랬던 것이 아닌가 하며 흥분하는 것 아닐까. 오직 ‘나만의 것’을 찾기 위해.


송진 덩어리를 밟음으로써 뭉개진 그 흥분의 순간조차 내게는 무척 익숙하게 느껴졌다.


됐어. 뭐 살다 보면 생각나겠지, 진짜라면. 내가 진짜를 발견한 게 맞는다면.


나는 자주 내 안에서 불꽃이 타닥타닥 일려다가 꺼지고 마는 많은 순간들을 발견한다. 그럴 때 타닥타닥, 하는 소리가 나다가 힘없이 사그라지는 것을 보면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 적이 많다. 진짜 중요한 거였으면 생각이 날 거야. 내가 만들어낸 불씨니까. 사그라지지만 온기는 남아있으니 영영 식지는 않을 거야. 문득 그 식어가는 온기와 불씨의 흔적만이 남은 것을 좇는다면 정말 좌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사그라진 순간과 그때의 찰나는 지나갔다. 그제야 그녀는 관리인 여자와 마주 앉아, 대화한다. <화이트 호스>라는 노래에 대해서. 그 순간의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그 뭉개진 송진 같은 흥분과 지나간 찰나뿐이다. 다가올 일들, 마주할 해석을 두려워하고 그래서 요즘 들어 글을 쓰지 못하는 나는 소설 속 주인공이 송진을 밟은 그 상태에 멈춰있다는 생각을 한다. 오는지 오지 않는지 모르는 화이트 호스를 기다리며, 글쓰기는 어쩜 이렇게 어려운지 떠들어 대고 막상 글은 제대로 한 줄도 쓰지 못하면서. 어째서 오해와 이해의 간극이 이다지도 좁혀지지 않는지, 저자는 죽었고 독자가 탄생한 것이 맞는지 롤랑 바르트를 운운해가며.


아, 그러지 말아야겠다. 글 쓰는 나는 살아있고 글 속의 그녀들은 그 순간에 존재하고, 심지어 테일러 스위프트도 노래하잖아, 나는 공주가 아니고, 이건 동화도 아니란다. 나는 너의 화이트 호스가 필요 없단다, 하며. 그러니까 나는 글을 써야지.


2. 그 외 단편 독후감


사랑이 뭐라고


<오물자의 출현>을 읽고 감상을 쓰는 것이지만 사실은 <오물자의 출현> 속에 실린 <천국>에 대한 이야기다. 강화길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내가 감탄한 부분은 사실 아주 익숙함에 관한 것이었다. 작가는 지속적으로 익숙한 이야기를 한다. 그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고 그것으로부터 오는 긴장감이 이끌어낸다. 익히 아는 것들이 공포스럽게 다가온다. 너무 익숙해 몰랐지만 작가는 그 순간을 파고들어 그 안에 감춰진 공포를 찾아와 우리 앞에 들이민다. <음복>도 <가원>도 그랬다. <천국>을 읽었을 때 나는 나의 연애에 관해 떠올렸다. <천국> 속의 극대화된 광기를 벗겨내면 어느 정도 비슷한 구석이 있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조금은 덜 폭력적이었다는 소리다. 나는 이렇게 한 마디 덧붙일 때면 정말이지 모든 게 한심스럽게 느껴지고는 한다. 더 폭력적이고, 덜 폭력적이고 그것을 굳이 나누는 이유는 무엇인지? 어찌 되었든 내가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었다는 것은 똑같은데 말이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네게 실망했어”를 가장 많이 말하는 태도라든지, 여자의 죄책감을 자극해서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관계를 유지한다든지, 여자는 알면서, 다 알았으면서도 그런 가스 라이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마저도. 말하자면 사랑의 실패다. 누구는 사랑이 한 사람이 우주가 되는 확장이라던데 나의 사랑은 실패하여 축소되었고 단면적으로 남았다. 그런 경험이 내게는 존재하고 여전히 그 경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 사람과 2년 간의 연애를 하며 두 번의 헤어짐을 겪었다. 처음에 헤어지자고 했다가 나는 다시 매달렸다. 우습게도 <천국> 속 그녀처럼 그 얼굴이 좋았다. 아, 그 얼굴에서 아직 못 벗어나겠어. 그때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었다. 되지도 않는 핑계라는 것을 안다. 그 사람과 그를 사랑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으나 나는 그를 붙잡을 명분이 필요했다. 헤어지는 것이 옳은데 그럼에도 다시 그를 붙잡고 만나야 하는 나의 아집의 이유.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 그것은 사랑과 같이 진심이 담긴 것이어서는 안 됐다. 이미 실패한 사랑을 붙잡고도 나는 사랑의 실패를 마주하기 싫었으며 끝까지 모든 것을 그의 탓으로 돌리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다 알면서도 그렇게 된다. 그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남자로 여자인 나를 지배하는 것 자체를 좋아했고 알량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좋아했을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일 년이 더 걸렸다. 그때는 무척 저항적이었고 사명감에 빠져있었다. 스스로에게 선언하기도 했다. 사랑에 발목 잡히지 말자. 사랑이 내 발목을 잡으면 가차 없이 걷어차 버리자! 그때는 사랑이 고작 가부장제의 이데올로기로, 남성성의 헤게모니를 견고히 하는 수단으로 느껴졌다. 이건 내 안 좋은 버릇의 일부와 관련이 있기도 하는데 나는 과도하게 이성과 논리를 신봉한다.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게 영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생각보다 이성과 논리, 그것으로 만들어진 철학으로 설명되는 부분이 무척 광범위하다. 그러니 정말이지 아쉬워지는 거다. 여러모로. 정말 그럴 수밖에 없나? 사랑은. 실패할 수밖에 없나? 결국은 이데올로기, 헤게모니, 권력적 구조 그런 것들로 인해 필연적으로 사랑다운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압도적인 사랑으로 인해 이성과 논리를 신봉하는 내가 결국 패배하고야 마는 그런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예전에 내가 쓰는 사랑에 관한 글은 판타지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던 적이 있다. 세상엔 없는 그런 사랑을 쓰고 싶었다. 극 속에서는 그게 가능하다. 인물 둘이서 혹은 셋넷이서 사랑하면 글 속에선 외부적인 것은 얼마나 강력하든 감내하고, 함께 뛰어넘고, 그것을 넘어서 서로의 존재를 견디며 하는 사랑이 가능해진다. 나는 그것이 좋았다. 결국 나는 그런 것을 갈구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알면서도! 다 알면서도. 나는 내가 아는 것 이외의 것은 알지 못하기에 그런 것에 대해 희망한다. 희망은 언제나 미지의 영역을 향한 기대이므로. 내가 모르는, 차마 다 알지 못했던 사랑의 어떤 힘. 그래서 나는 사랑 때문에 이성과 논리와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거대한 어떤 것이 결국에는 패배하고 마는 상상을 여전히 한다.


사랑에서 정치적인 것들을 제외할 수는 없나? 정말로? 그것은 결국 분리되지 않는 것인가? 우리는 결국 무지의 베일의 상태가 될 수 없기에? 불가능한 것을 가정해야만 사랑이 사랑으로, 독단적이고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사랑에는 영영 실패하기만 하고 패배당할 수는 없는 것인가? 끊임없이 묻게 된다. <천국>은 사랑이 여남 간 권력 구조 내에서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꼬집고 여성과 남성 간의 사랑에서 여성이 느끼는 무력감을 날카롭게 캐치했다. 그것은 무척 적나라한 파고듦이라 <천국>에서 그려지는 사랑의 이름을 한 폭력에 소름이 끼쳤다. 그러다 보니 자꾸 묻게 된다. 정말, 사랑은 정말 결국 사랑을 까뒤집어보면 그런 것 밖에는 없는 것인가? 나는 이 질문에 아직 멈춰있으나, 여전히 희망한다. 그 너머에 무언가가 있기를.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척에 이러니 저러니 왈가왈부하면서도 여전히 바라고 있다. 사랑에 패배하는 날이 오기를.